<4등>은 국가인권위원회의 열두 번째 인권영화 프로젝트다. 준호(유재상)는 만년 4등 수영선수다. 재능이 없으면 속 편하게 취미로만 시키면 되는데, 또 그렇지도 않아 준호 엄마(이항나)의 속은 대회가 열릴 때마다 새까맣게 타들어간다. 준호 엄마는 신통하다는 수영 코치 광수(박해준)를 소개받고, 그에게 준호를 맡긴다. 16년 전 아시아 신기록을 달성한 국가대표 출신인 광수는 당시 폭력사건에 휘말려 이른 나이에 은퇴했다. 4등이 낮은 성적이 아닌데 뭐 어때, 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 영화를 보면 그게 말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실제로 학부모이기도 한 정지우 감독 역시 “준호 엄마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 (웃음) 영화 속 학부모 중 하나가 나이고, 그들이 가진 자식에 대한 불안감이 바로 내 마음”이라며, “이 영화는 부모로서 나의 고백과 자백 같은 게 담겨 있다”고 말했다. <4등>은 정지우 감독이 <은교>(2012) 이후 4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다.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 인권영화 연출 제안을 받았을 때 스포츠, 그것도 수영을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계기는 무엇인가.
=그간 열한번의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동안 스포츠 인권은 다뤄진 적이 없어 해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염소의 맛>(작가 바스티앙 비베스)이라는 그래픽노블이 있는데 물속을 묘사한 그림이 정말 아름답다. 평소에 그 그림 같은 장면을 만들고 싶은 바람이 있었다. 스포츠 인권이라는 주제와 맞물리면서, 기록이 나오지 않아 물속에서 우는 사람 이미지에서 출발하게 됐다. 이미지가 짠하지 않나.
-평소 운동 삼아 수영을 한 적이 있나.
=수영을 좋아하지만 해본 적은 없다.
-시나리오를 쓰기 전에 취재를 많이 했다고 들었다.
=다양한 분야의 체육인들을 취재했다. 처음부터 수영이라는 종목을 정한 건 아니고, 여러 종목의 국가대표 훈련장을 찾았다. 학부모, 코치, 선수를 만나다가 수영 종목의 코치와 학부모에 어울리는 이야기를 만들게 됐다.
-취재를 하면서 도움이 됐던 사연이 있나.
=아직도 이름을 잊지 않고 있을 정도로 인상적이었던 학부모가 있었다. 행동만 보면 자식에 대한 집착이 강한 엄마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얘기를 들어보면 지금 부모로서 최선을 다하지 않아 나중에 아이들이 나를 원망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마음, 금수저로 태어나 큰 노력을 하지 않아도 인간 구실을 하며 먹고사는 사람을 제외한 대부분 부모들은 자식으로부터 그런 원망을 듣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안고 있다. 이런 얘기를 하면서 눈가에 물기가 맺힌 걸 보면 누가 그녀에게 극성 엄마라고 손가락질할 수 있겠나.
-준호 엄마는 “(준호가 코치에게) 맞는 것보다 4등 하는 게 무섭다”고 말한다. 한 미국 역도 대표 선수는 “4위를 해서 동정의 메달을 받는다면 정말 싫을 것 같다. 그런 4위를 하느니 차라리 5위를 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준호를 ‘만년 4등’ 선수로 설정할 때 4등이라는 숫자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나.
=차라리 등수가 안 나오면 수영을 취미로 하면 된다. 건강에 좋으니까. 반대로 남들보다 실력이 월등하면 심각한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된다. 성적이 들쭉날쭉하면 수영을 하라는 건지, 하지 말라는 건지 몰라 괴로울 것 같다. 4등은 현실에 대해 가지고 있는 두려움 그 상태다. 아이가 아주 어렸을 때 부모는 ‘우리 아이는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랬던 부모가 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만 되어도 먹고살 만큼의 벌이를 하고 가족을 이루며 살아가길 원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평범하게 사는 건 우리가 꿈꿀 수 있는 거잖나. 하지만 지금은 그조차 어려운 세상이다. 현실에서 손가락 하나에 의지한 채 대롱대롱 매달린 느낌이 4등이 됐다, 안 됐다와 비슷할 것 같다.
-이야기는 정작 준호가 아닌 광수의 16년 전 이야기로 시작된다. 최고의 수영선수였지만 노름 때문에 스스로 무너진 사연 말이다. 준호가 아닌 광수부터 등장시킨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 스포츠에서 폭력의 근원은 국가 주도의 엘리트 스포츠에 있다고 생각한다. 여러 종목의 스포츠가 국가 대항전에 참가해 승리하면서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고, 국가에 대한 자부심을 고취시킨 건 분명하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간과한 건 운동선수들이 국가로부터 착취당했다는 사실이다. 어릴 때부터 운동선수로 키워지고, 운동 외엔 배운 게 없다보니 운동선수 이후의 삶에 대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살아가는 데 힘들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성공한 선수들은 그나마 국가대표로 명예와 자부심을 얻었다고 하면, 그런 선수의 수십배에 해당되는, 성공하지 못한 운동선수와 그 주변 사람들은 운동으로 삶을 구원받지 못한 거잖나. 이런 현실을 두고 스포츠계의 진보적인 학자와 선진적인 운동가들은 이제는 한국 스포츠계가 탄탄한 생활 체육 중심으로 재편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 중에 타고난 선수가 국가대표팀으로 가고, 국가대항전이 끝나면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는, 자연스러운 흐름이 맞다. 엘리트 스포츠가 개인(선수)을 찍어누르는 과정에서 필수 불가결한 것이 폭력이었다. 연습, 시합할 때 집중해라, 긴장해야 한다, 국가를 대표하고 있다 같은 강박관념에 빠져 폭력이 몸에 밴 사람이 그 이후의 삶에서 벌어지는 어떤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폭력 이외의 다른 것을 어떻게 쓰겠는가. 그걸 보여주기 위해 광수 사연으로 이야기를 열었다.
-영화의 초반부, 준호 엄마를 보여주는 데 꽤 공을 들인다.
=앞에서 얘기한 국가 주도의 스포츠 흐름에 엔진을 단 게 우리 엄마들이다. 4등만 하는 준호를 광수에게 수영 과외를 받게 하는 걸 누가 잘못됐다고 얘기할 수 있겠나. 그런데 이제는 사교육이 가지고 있는 효율성이 재고되어야 할 시기에 접어들었다.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스스로 찾을 때까지 기다린 뒤 시간이 얼마나 걸리더라도 좋아하는 걸 하면서 살아가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그런데 4등도 나쁘지 않은 성적이니 아름답지 않냐고 얘기하면 거짓말일 것 같았다. 결국 이 영화를 통해 1등도, 4등도 간단하지 않은 상황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수영장을 어떤 공간으로 그리고 싶었나.
=취재를 할 때 수영장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공간은 복도였다. 여름날의 한강변처럼 학부모들이 복도 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아이스박스에 바리바리 싸온 간식을 아이들에게 먹인다. 대회가 열리는 수영장은 승부만이 의미가 있는 공간이다. 미친 듯이 헤엄쳐서 남들보다 빨리 나가야 한다는 점에서 주식시장이나 경마장과 다를 바가 없다. 어느 날, 레인을 걷어낸 수영장을 보게 됐다. 대형 목욕탕의 냉탕 같더라. 냉탕에서 우리가 무슨 경쟁을 하나. 어른, 아이할 것 없이 모두 그곳에 첨벙 뛰어들어 자유롭게 놀 뿐이다. 레인을 걷어낸 수영장에서 물을 가로지르는 준호가 얼마나 자유롭게 보이나. 우리가 딛고 있는 현실을 수영장이라고 가정하면 아주 잠깐, 때때로 레인만 걷어서 놀면 되지 않을까. 현실에서 레인을 걷었다 쳤다 정도는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도 했다.
-준호 역할은 수영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연기하길 바랐다고 들었다.
=남자 수영선수의 몸이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 아름다운 몸을 가진 아주 감성적인 소년을 머릿속에 그렸다. 그런데 못 찾았다. 하하하. 몸이 예쁘고, 멋진 친구들은 많았다. 하지만 연기를 해야 되지 않겠나. 촬영을 6개월 동안 할 수 있었다면 캐스팅하고 싶었던 친구가 있었다. 천천히 찍으면 되니까. 하지만 인권영화는 그런 여유가 있는 프로젝트가 아니다. 그래서 눈높이를 낮춰 찾다가 우연히 준호 동생 기호 역에 오디션을 봤던 (유)재상이를 만나게된 거다. 불러서 연기 연습을 좀 시켜봤는데 감성이 너무 좋았다. 무엇보다 하루에 두세 시간 수영을 해준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조해진 작가의 소설 <로기완을 만났다>를 원작으로 하는 <로기완>을 준비하다가 멈춘 상태다. 현재 중국영화 <침묵의 목격자>를 리메이크하는 <침묵>을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다.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로기완>은 완전히 손을 놓은 게 아니다. 하지만 현재로선 어떤 방식으로 정리가 될지 잘 모르겠다. 지난해 이슈 중 하나가 난민이지 않나. 우리에게 난민이 서유럽에 떨어진 우리말을 쓰는 동포일 경우에는 정말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다. 그동안 <로기완>을 진행하면서 좀더 시간이 필요한 프로젝트라고 생각한다. <침묵>은 늦여름이나 초가을 촬영을 목표로 현재 시나리오 작업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