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신기주의 영화비평] 승자의 나라에서 내 집을 지킨다는 것
2016-04-20
글 : 신기주 (에스콰이어 기자)
<라스트 홈>, 희생자의 입장에서 보는 미국 금융시스템의 실체
<라스트 홈>

데니스 내쉬(앤드루 가필드)는 납득이 안 된다. 데니스는 법원에서 퇴거 명령을 받는다. 평생 살던 집에서 나가라는 통지다. 데니스의 엄마가 작은 가게도 열었던 집이다. 아들이 태어나서 학교에 들어갔던 집이다. 지금까지 내 집이라고 믿고 살아왔다. 데니스는 아들의 손을 잡고 법정에 서서 하소연한다. 법은 냉정하다.

어느 날 아침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부동산 브로커 릭 카버(마이클 섀넌)가 찾아온다. 손에는 법원 등기 서류가 들려 있다. 릭의 뒤에는 장전된 총을 찬 보안관이 서 있다. 릭은 데니스 가족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생필품만 챙겨서 집에서 나가라고 요구한다. 릭은 얄밉게도 예의까지 차린다. “우리도 정말 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지만, 법원의 명령에 따라, 이제 이 집은 은행의 소유입니다.” 데니스는 그렇게 자신의 집에서 내쫓긴다. <라스트 홈>의 첫 장면이다.

거두절미하고 전개되는 <라스트 홈>의 첫 장면을 이해하려면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에 대한 배경 지식이 좀 필요하다. 데니스가 집을 살 때 은행 대출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다. 당시만 해도 은행 대출을 끼고 집을 사는 게 나쁜 일이 아니었다. 분수에 넘치는 소비나 탐욕적인 투기 같은 게 아니었단 얘기다. 데니스한테 집을 사라고 먼저 꼬드긴 것은 은행이었다. 솔직히 건설일용직 노동자인 데니스 입장에서 집을 산다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데니스의 신용 등급은 서브프라임이었다. 그런데도 은행이 먼저 돈을 빌려주겠다고 나섰다. 매달 조금씩 이자만 갚아라. 대신 우리도 불안하니까 집을 담보로 잡겠다. 이자만 꼬박꼬박 내면 걱정할 것 없다. 이 집은 누가 뭐래도 당신 것이다. 윈윈이다.

한동안은 정말 윈윈 같았다. 저금리 시대가 지속됐다. 덕분에 대출금리도 낮았다. 데니스 입장에선 이자 부담이 적었다. 경기도 나쁘지 않았다. 데니스처럼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서민 경제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갑자기 경기 침체가 시작됐다. 경기 침체기에 들어서면 건설 경기부터 악화된다. 자연히 막노동 일감부터 줄어든다. 데니스로선 난감하지만 막노동을 해오면서 이런 경기 침체를 한두번 겪은 것도 아니다. 경제는 늘 호황과 불황을 순환한다. 경제를 모르는 데니스도 경제의 섭리 정도는 안다. 예전에 무지렁이 농사꾼들도 계절의 순환만큼은 알았던 것처럼 말이다.

이번엔 다르다는 걸 몰랐다. 경기 침체가 아니라 시스템의 실패였다. 그 무렵 뉴욕 월 스트리트에 있는 리먼 브러더스라는 투자은행이 망했다는 뉴스를 접한다. 데니스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른다. 하루아침에 대출금리가 급등한다. 데니스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대출이자가 불어난다. 데니스도 그제야 뉴스에서 흘러나온 내용들을 체감한다. 죽게 생긴 은행들은 연방준비제도(이하 연준)가 이 기준 금리를 올려주자 득달같이 대출금리부터 올린다. 대부분 은행 말만 믿고 변동금리를 선택했던 대출자들은 이자폭탄을 맞는다. 대출자가 이자를 감당하지 못하면 은행은 담보물인 집을 처분할 권리를 얻는다. 은행의 목적은 하나다. 담보로 잡은 집들을 유동화시키는 것이다. 은행들은 잽싸게 집들을 매각하기 시작한다. 시세보다 낮은 헐값이지만 이자 몇푼보다야 목돈이다. 이 과정에서 데니스처럼 살던 집에서 쫓겨나는 사람들이 속출한다. 이런 게 이른바 약탈적 금융이다. <라스트 홈>은 첫 장면부터 약탈 금융의 현장을 단도직입적으로 보여준다. 데니스가 무슨 상황에 처해 있는지 관객의 이해를 돕는 아무런 배경 설명이 없다. 금융위기 당시 대부분의 대출자들은 자신이 어쩌다 이런 처지에까지 몰렸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법원에 가서 하소연하고 인정에 호소하다 허무하게 내 집에서 내쫓길 뿐이었다. <라스트 홈>이 약탈 금융의 메커니즘을 관객한테 전혀 설명해주지 않은 채 불친절하게 이야기를 시작하는 건 그래서다. 카메라는 그저 당황한 데니스의 뒤만 쫓을 뿐이다. 덕분에 <라스트 홈>은 금융위기가 미국 서민경제에 초래했던 비극의 민낯을 오히려 더 적나라하게 재현해낸다. 이것이야말로 눈 뜨고 코 베어가는 경제 현장의 살풍경이다.

금융위기를 다룬 영화들은 많았다. 최근작으론 <빅 쇼트>(2016)가 대표적이다. <빅 쇼트>는 금융위기에서 돈을 번 월가 투자자들의 이야기다. 금융 천재들의 베팅을 통해 미국 금융 시스템이 얼마나 허술하고 부패했는지를 보여준다. 국내에 <대마불사>라는 책으로 출간된 커티스 핸슨 감독의 TV영화 <투 빅 투 페일>(Too Big to Fail, 2011)도 있다. <대마불사>에선 금융위기를 진화하기 위해 애쓰는 재무장관과 연준의장이 주인공이다. 둘 다 수작이지만 약점이 있었다. 금융위기의 진짜 희생자들이 이야기에서 배제돼 있었다. <대마불사>는 금융위기의 책임자들을 영웅처럼 묘사한 구석이 있다. <빅 쇼트> 역시 금융인들이 야기한 금융위기로 한탕하려는 또 다른 금융인들의 이야기다.

<라스트 홈>은 금융위기를 희생자의 시각에서 다룬다. 전쟁영화에 비유해볼 수 있다. <대마불사>가 사령부의 이야기이고 <빅 쇼트>가 장교들의 이야기라면 <라스트 홈>은 이름 없이 죽어간 병사들의 이야기다. <라스트 홈>이 첫 장면부터 약탈 금융의 현장을 보여주는 것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전투 신으로 시작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병사들은 정치인과 장군들이 세운 작전에 따르다 총알받이로 죽어간다. 데니스는 그렇게 개인이 이해하기엔 너무 크고 복잡한 금융 시스템에 의해 약탈당한 채 거리로 나앉게 된 수많은 데니스들의 대명사다.

그리고 악당 릭 카버가 등장한다. 약탈은 금융 시스템에 의해 자행됐지만 약탈을 실행하는 건 결국 릭 카버 같은 사람이다. 은행이 필요로 하는 건 집이 아니라 돈이다. 결국 담보로 잡은 집들을 팔아치울 사람이 필요하다. 평범한 부동산 중개업자였던 릭은 은행으로부터 헐값에 집을 사서 비싼 값에 되팔기 시작하면서 막대한 시세 차익을 얻는다. 일은 더럽다. 은행을 대신해서 사람들을 집에서 내쫓는 일부터 해야만 한다. 이 과정에서 릭은 악마의 하수인 노릇을 한다. 쫓겨나는 사람들은 은행이 아니라 릭을 미워한다. 얼굴도 마음도 없는 시스템을 미워하긴 쉽지 않다. 그건 데니스도 마찬가지였다.

릭은 오히려 자신을 미워하던 데니스한테 일자리를 준다. 빈집을 되팔려면 집을 수리하고 관리를 해야만 한다. 건설일용직으로 잔뼈가 굵은 데니스가 적임자다. 이때부터 데니스는 그동안 무지했던 약탈적 금융 메커니즘 속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데니스가 목격한 약탈은 전방위적이다. 내쫓긴 빈집들엔 냉난방 시스템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릭은 데니스한테 에어컨이며 난방기구 같은 걸 도둑질시킨다. 어차피 이젠 집도 절도 없는 사람들이 에어컨이 필요할 리가 없다. 주인 잃은 물건을 주워오는 것이니 식은 죽 먹기다. 릭은 이걸 다시 되판다. 데니스는 릭한테서 타인의 불행을 이용하는 약탈이 얼마나 짭짤한 돈벌이인지를 배운다. 데니스는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그러나 릭에게 반항하진 못한다. 데니스가 겪었던 일들이야말로 릭이 옳다는 명백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금융 시스템이 서민을 약탈하고 총을 찬 정부가 약탈을 돕는 나라가 미국이다. 그런 국가적, 체계적, 집단적 약탈이 자행되는데 그 안에서 개인이 작은 이익 좀 얻는다고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데니스도 릭을 닮아간다. 릭이 시킨 일을 옛 공사판 동료들한테 나눠주고 수익 중 일부를 몰래 가로챈다. 릭은 이미 알고 있다. 데니스도 기회만 주어진다면 약탈적 자본주의의 하수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걸 말이다.

릭과 데니스의 관계는 다소 전형적이라 <월 스트리트>(1987)의 두 주인공 고든 게코(마이클 더글러스)와 버드 폭스(찰리 신)를 연상시킨다. 고든 게코는 “탐욕은 좋은 것”이라고 버드 폭스한테 웅변한다. 고든 게코의 말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정신이었다. <라스트 홈>의 릭 역시 고든 게코 못지않은 명언을 남긴다. “너는 집을 짓지. 나는 집을 굴려. 집에 감정을 섞지 마. 집은 그냥 상자일 뿐이야.” 데니스 역시 릭의 말에 동의한다. 처음 약탈에 가담했을 땐 어머니와 아들과 함께 오순도순 살던 작은 집만 되찾으면 그만두겠단 생각이었다. 결국 정든 작은 집을 팔아버리고 수영장이 딸린 거대한 저택을 구입한다. 집에 감정을 섞지 말아야 하고 집은 굴려야 하는 대상이라는 릭의 말이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정신이라는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월 스트리트>처럼 <라스트 홈> 역시 바로 두 주인공의 자본주의에 대한 가치관 차이에서 결말이 갈린다. 고든 게코한텐 탐욕은 좋기만 한 것이었지만 버드한텐 아니었다. 주가를 조작해서 블루스타 항공사를 분해해체하려는 고든 게코한테 제조업의 노동은 구식 돈벌이에 불과했다. 정작 버드는 돈을 굴리는 금융업의 탐욕보단 몸을 굴리는 제조업의 노동이 더 가치 있다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라스트 홈>의 데니스도 마찬가지다. 끝내 집에 감정을 섞고 만다. 집은 그냥 상자가 아니라 사람이 사는 보금자리라고 믿는다. 집을 굴리기보단 집을 지키기로 결심한다. <라스트 홈>은 부동산판 <월 스트리트>라고 할 수 있다. 릭은 데니스한테 훈계한다. “미국은 승자의, 승자를 위한, 승자에 의한 나라일 뿐이야.” 솔직히 한국도 미국 못지않은 승자의, 승자를 위한, 승자에 의한 나라다. 2015년 한국의 가계 부채 증가 속도는 중국 다음으로 빨랐다. 대부분 주택담보 대출이다. 한국은 데니스한테 그랬던 것처럼 은행이 주택을 담보로 빚을 권하는 사회다. 그렇다면 <라스트 홈>에서처럼 한국의 금융 시스템도 하루아침에 약탈자로 돌변하지 말란 법이 없다. <라스트 홈>이 서늘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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