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서커스
2016-04-21
글 : 김혜리
<4등>

무슨 샹들리에인 줄 알았다. 항상 바쁘게 출렁이던 수영장이 휴식과 정비에 들어간 시간, 경쟁의 코스로 물을 구획짓던 레인 줄을 걷어 둥글게 틀어놓은 오색 똬리는, 영판 다른 물건인 양 찬란하다. 수영을 사랑하는 <4등>의 소년 준호(유재상)는 그것을 쓰다듬는다. 언제나 초시계와 다투고 코치에게 닦달당하지만 소년을 애초에 헤엄치게 만든 마력은 물이 주는 해방감과 아름다움이었다. 준호는 대회에서 몇등을 하건 누구보다 ‘예쁜 영법’을 가진 수영 선수이고, 햇볕을 쬐면 우주의 기운을 몸 안에 들일 수 있다고 아빠에게 설명하는 작은 현자다. 이 예민한 소년은 어느 새벽 훈련 도중 문득 레인을 벗어나 수영장 바닥에 그려진 네모난 빛을 좇아 레인을 가로지른다. 호루라기의 재촉을 잊고, 행복하게 헤엄친다. 그리고 다행히도 <4등>의 정지우 감독에겐 그 감수성을 공유하는 귀한 눈이 있다.

03/27

계속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이하 <저스티스의 시작>)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 영화는 오늘날 할리우드 슈퍼히어로영화가, 단일한 텍스트라면 응당 갖춰야 한다고 간주되어온 서사의 자기완결성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벗어났는지 보여주는 예다. 8편이 이어진 <해리 포터> 시리즈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소속 영화에도 후속작의 복선에 그치는 캐릭터와 일화는 등장했지만, 이야기의 기본적 기승전결을 저해하거나 지체시킬 정도는 아니었다. 반면 <저스티스의 시작>에는 2시간 반에 달하는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던져만 놓고 태연자약 수습하지 않은 스토리라인이 상당히 많다. 로이스 레인 기자가 추적한 미 국방부의 실험 무기 유출은 결국 내막이 무엇이었나? 크립톤 우주선의 시스템은 어떤 이유로 자기네 행성 출신 주민을 파괴할 존재의 창조 프로그램을 준비한 걸까? 원더우먼은 브루스 웨인이 렉스 루터의 데이터를 훔치리라는 사실을 어떻게 짐작하고 가로챌 계획을 세웠을까? 결정적으로, 이 영화는 허무하다. 영화 내내 갈등을 조장한 슈퍼 악당을 기껏 따라갔더니 180분이 다 될 무렵에 “사실 난 꼭두각시에 불과하고 동기는 (영화 전체를 통틀어 암시조차 되지 않은) ‘그분’만이 아신다”고 울트라 슈퍼 악당에게 공을 넘겨버린다. 아무래도 이건 스토리텔링의 도의에 어긋나지 않나? (하긴 렉스 루터 본인 아이디어가 아니었다니 똑똑하다는 인물이 왜 그리 대책 없는 계략을 추진했는지 의아함은 풀렸다. 슈퍼맨을 통제할 수 없으니 제거해야 할 존재라고 규정해놓고, 그보다 훨씬 무지막지한 둠스데이는 어떻게 컨트롤할 작정이었단 말인가!) 게다가 <저스티스의 시작>의 관객은 영화를 보다 말고 잠시 멈추어 예고편 모음을 감상하는 진기한 체험도 한다. 렉스 루터가 수집한, 장차 저스티스 리그를 구성할 메타휴먼들의 CCTV 영상을 브루스 웨인이 열어보는 대목이다. 잭 스나이더 감독은 이 클립들을 우연히 발견한 영상(found footage)으로 위장하는 수고도 대범하게 생략했다. 보안 카메라에 어쩌다 잡혔다고 제시되는 영상은, 더없이 편리한 앵글로 메타휴먼의 능력을 소개한다. 특히 아쿠아맨은 카메라를 향해 셀피 포즈를 취하다시피한다. 이 대목에서 나는 이제 슈퍼히어로영화를 보는 나의 기준과 상식을 수정해야 할 시기가 도래한 것이 아닐까 고민했다. 관객과 영화가 공유해야 할 뻔뻔함의 수준이 상향조정된 것이다. 물론 이것이 서브 장르 전체의 새 경향이라고 넘겨짚는 것은 속단일 수 있다. <저스티스의 시작>의 처지가 유난히 다급하기 때문이다. <아이언맨>과 <인크레더블 헐크>를 공개한 2008년부터 1기를 종합한 <어벤져스>까지 마블 스튜디오가 약 4년을 들여 구축한 슈퍼히어로들의 우주를, <저스티스의 시작>은 한방에 따라잡아야 할 사명을 띠고 있다. 그러다보니 풀어내긴 어려워도 끼워넣어야 할 정보가 많은 것이 당연하고, ‘내장형 예고편’ 및 꿈 시퀀스, 그리고 꿈속의 꿈 시퀀스가 구조적 솔루션으로서 장착됐다. 이야기는 텍스트 내적인 요철을 맞추는 것만큼이나 아직 존재하지 않는 다음 프랜차이즈영화가 발 뻗을 자리를 마련하는 기능이 중요하다. 영화는 점점 만드는 사람과 현재에 관한 표현이 아니라, 브랜드 소비자와 다음 분기에 출시될 속편을 위한 서비스에 가까워진다. 그럼 해당 영화의 서사적 해소는? 액션 클라이맥스가 자아내는 착시현상이 대체한다. 10년 후쯤이면 서점의 영화 시나리오 관련 책장에는 <시네마틱 유니버스, 어떻게 쓸 것인가> 같은 제목의 책이 꽂혀 있을지도 모르겠다.

03/29

코언 형제의 <헤일, 시저!>를 본 지 며칠이 지났다. 돌아볼수록 사랑스러운 영화다. 사적인 이유가 막강하다. 나는 어쩌다 영화에 관해 쓰고 말하는 일로 허덕허덕 밥을 벌어왔고, 종종 내 삶이 어쩌다 이렇게 흘러가고 있는지 어리둥절해지곤 한다. 나는 영화를 사랑하겠다고 비장하게 결심한 적이 없다. 가장 위대한 현대 예술이라고 판단한 순간도 없었고 ‘시네필’이라는 고귀한 이름을 내 것으로 바라본 적도 없다. 그런데 어느새 영화 없이 사는 방법을 잘 모르게 되었다. 인생이 짧은 탓이다. 몇년 후 시력이나 청력이 쇠해 영화를 온전히 접할 수 없게 된다 해도, 나는 대뜸 죽어버리거나 하지 않을 터다. 하지만 확실히 그 이후는 내게 여분의 삶일 것이다. 그냥 뜻밖에 그렇게 되었다. 그리고 <헤일, 시저!>는 나와 같은 사람에게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따뜻하고 세련된 격려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에디 매닉스(조시 브롤린)는 크리에이터가 아니다. 1950년대 초 할리우드 스튜디오 캐피털 픽처스 프로덕션의 프로듀서인 그는 제작 스케줄을 순탄히 굴러가게 하고, 스타의 말썽이 언론에 새나가지 않도록 사전에 방지하는 해결사이며 자본과 재능 사이의 중개인이다. 유능하다는 평판 덕분에 에디는, 당시 승승장구하는 방위산업체 록히드사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는다. 제시된 모든 노동조건은 할리우드의 그것보다 우월하다. 그럼에도 에디는 망설인다. “영화산업은 진짜 비즈니스가 아니죠. 광대놀음이잖아요. 어서 이직하심이…”라는 록히드 인사 담당자의 자신만만한 설득에 울컥 반감마저 느낀다. 에디는 이 반감의 정체를 “(영화를 포기하는 일이) 어쩐지 옳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라고 표현한다. 내겐 이 가치판단적 단어가 중요해 보인다. 코언 형제는 ‘매력이 없다’나 ‘불리하다’가 아니라, 무려 윤리의 차원에 속하는 ‘옳지 않다’라는 대사를 에디에게 주었다. 살펴보면 <헤일, 시저!>의 모든 인물은 상위의 가치체계를 신봉하고 있다. 자본주의, 공산주의, 종교, 가족이 그것이다. 에디 역시 강박적으로 고해실을 찾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패밀리 맨이다. 그런데 감독 코언 형제는 이 모든 이데올로기를 향해 어깨를 으쓱한 다음 1950년대 할리우드의 서커스적 면모를 그와 동등하거나 우월한 가치로 들어올린다. 특정한 재주를 가진 결함투성이 사람들이 모여 툭탁툭탁 만들어가는 소우주를 하나의 윤리적 이상향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영화에서 에디는 캐피털 픽처스의 성경 서사극 <헤일, 시저!>를 감수하는 종교 지도자 모임과 <헤일, 시저!>의 주연 스타 베어드 휘트록(조지 클루니)을 납치한 공산주의자들, 그리고 록히드사 사이에 끼어 있다. 그리고 끝내 극히 자본주의적 산업인 동시에 상호 모순된 다양한 이데올로기들을 두서없이 세상에 흘려보내는 엔터테인먼트를 인생의 근간으로 택한다. 여기에는 커리어의 선택을 넘어서는 결단이 있는 듯하다. 그는 사소하고 천박하고 도무지 세상에 쓸데없어 보이는 영화 안에서, 인생을 걸 만한 순수한 무엇을 보는 것이다. 종교나 이데올로기와 대놓고 견주어 고귀할 것이 하나도 없는 영화가 한 인간에게 그것들에 값하는 의미를 가질 수 있다면, 이 집단 생산의 산업, 집단 창작의 예술이 대안적 우주로 기능하기 때문 아닐까? <헤일, 시저!>는 현실에서는 부덕하고 평범한 자들이 적어도 영화 안에서는 문제를 분업해 해결하는 광경을 보여준다. 앵글이 이상하면 카메라를 움직이면 되고, 배우가 연기를 못하면 가르치면 된다. 영화사 법무팀은 무마할 스캔들이 난감하면 할수록 눈을 반짝이며 의욕을 불태운다. 이중 프랜시스 맥도먼드가 편집기사로 분한 편집실 장면은 자못 감동적이다. 우리는 몇분 전 세트에서 목도한 엉망진창의 연기가 그럴듯하게 잘라 붙여진 결과를 편집실 스크린에서 목도한다. 모든 테크니션의 노력은 속되고 수월해 보이지만 매일의 헌신을 요한다. 그런 의미에서 편집기사의 넥타이가 기계 톱니에 말려들어가 하마터면 죽을 뻔하는 작은 일화는 의미심장하다.

엉뚱하지만, 나는 에디 매닉스와 짝이 될 만한 영화 속 인물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지배인 구스타프(레이프 파인즈)를 생각해냈다. 에디는 철없는 재주꾼들이 굴려가는 영화 세상을 수호하는 데에서 생의 의미를 찾는다. 구스타프는 파시즘과 산업화 앞에서 구식의 우아한 취향을 고집하는 귀족들에게 완벽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에 몰두한다. 그들은 말하자면 과로에 시달리지만 ‘낙원’의 입구를 지키는 일에 행복을 느끼는 관리인이다.

<클로버필드 10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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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버필드 10번지>는 스토리는 물론 인물에 관한 정보도 철저히 통제한다. 그나마 주인공 미셸(메리 엘리자베스 윈스티드)에 대해 주어지는 정보는 디자이너 지망생이라는 사실이다. 남자친구의 청혼을 거절하고 새 생활을 찾아 떠났던 미셸은, 정체 모를 공습에서 의식불명의 그녀를 구했다고 주장하는 하워드(존 굿맨)의 벙커에 갇히고 만다. 하워드는 미친 납치범일까? 선한 사마리아인일까? 아니면 둘 다일까? 하지만 미셸은 <싸이코>의 마리온처럼 무방비하지 않다. 미셸은 무엇이 기다리건 문 밖으로 발을 딛기로 결심한다. 그 첫걸음은 전공을 살려 손수 지은 재활용 방역복이다. 벙커 사람들이 반복 감상하는 옛날 영화 중 한편이 1980년대 청춘물의 대표작 <핑크빛 연인>(Pretty in Pink)인 이유를 우리는 깨닫게 된다. <핑크빛 연인>은 부자 친구들에게 멸시당하던 가난한 동네 소녀(몰리 링월드)가, 낡은 드레스를 손수 리폼해서 졸업무도회에 당당히 입고 나서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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