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일을 업으로 삼은 뒤 몇 가지 두려움에 시달린다. 하나는 내 섣부른 견해가 타인의 감상을 망칠까 하는 걱정이고, 다른 하나는 글을 쓰는 내가 스스로의 감정에 충실한지에 대한 의심이다. 여기서는 설사 오독일지라도 내 감흥을 끝까지 밀어붙여보겠다. 이 글은 ‘닉 주디 결혼해’라는 <주토피아>가 남긴 유행어에 대한 나름의 화답이다. 당신이 이 사진들을 보고도 냉소를 날릴 수 있다면 이 페이지는 살포시 넘겨도 좋다.
살다살다 토끼에게 반할 줄은 몰랐다. 벅스 버니, 센타로의 일기, 심지어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의 명탐정 우사미까지 내 인생에 숱한 토끼들이 있었지만 이런 기분은 처음이다. 영화가 끝날 즈음엔 여우마저 강동원만큼 잘생겨 보이기 시작했다. 이 귀여운 커플(내 마음속 주디와 닉은 이미 맺어졌다)을 향해 샘솟는 사랑을 느끼며 극장을 나섰다. 애정은 안개에 가린 듯 불분명하면서도 매우 정확한 감정이다. 에둘러 꺼낸 모호한 표현마저 다 내 이야기처럼 들리다가도 어떤 구체적인 사연도 내 감정과 정확히 들어맞지 않는다는 걸 매번 깨닫는다. 톨스토이는 ‘행복의 얼굴은 비슷한 반면 불행은 제각각’이라고 했지만 사실 행복도 애정도 몇 마디 단어 안에 포획할 수 없는 사적이고 내밀한 감정이다. <주토피아>를 보고 난 뒤 바로 내 기쁨에 대해 말하고 싶었지만 꽤 오랫동안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했다. ‘매력’, ‘귀여움’ 등 익숙한 몇 마디 말로 이 캐릭터들의 생명력을 가두고 싶지 않았다. 내 안에 단어들이 충분히 쌓이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평론을 하다보면 문득 나를 둘러싼 어설픈 지식과 말이 나를 알 수 없는 곳으로 데려갈 때가 있다. 내 솔직한 감흥보다 날선 이론들이 훨씬 설득력 있고 논리적인 것처럼 들려 눈치를 보기도 한다. <주토피아>를 오래 품고 있는 사이나를 설득시킨 견해들은 주로 부정적인 해석들이었다. 이데올로기적으로 접근하면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한계는 분명하다. <주토피아>에는 이중으로 은폐된 차별적 요소(특히 성역할)가 여전히 잠재되어 있다. 이 부분은 워낙 선명해 지적하기도 쉽고, 무엇보다 말이 된다. 하지만 내 기쁨과 애정의 근거는 아니었기에 나는 이 달콤한 분석에 쉽사리 몸을 맡길 수 없었다. 당장은 보이지 않더라도 이 동물들이 내 마음에 꽂힌 이유를 좀더 뒤적여보기로 했다.
고백하자면 아직 답은 찾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 고백을 받아줄 지면이 생겨 안도감을 느낀다. 주디와 닉에 대한 애정을 곱씹고 더듬는 사이 피어난 한 가지 의문에 대해 설명하고 싶기 때문이다. 주디와 닉을 보며 디즈니의 의인화 전략이 실로 빼어나다는 걸 새삼 느꼈다. 주디와 닉은 사람 같다. 아니 적절치 않은 표현이다. 그들은 그냥 사람이다. 주디가 경찰이 된 후 기뻐하는 표정, 첫 근무를 마치고 시무룩 축 처진 어깨는 우리가 주변에서 익히 보아온 모습과 하등 다를 것이 없다. 다만 그 대상이 동물의 형태를 하고 있을 따름이다. 의인화는 말 그대로 사람을 흉내내는 표현법이다. 하지만 <주토피아>는 도리어 동물을 흉내내는 것처럼 보인다. 토끼가 사람을 흉내내는 건가, 사람이 토끼를 닮은 건가. 바탕과 출발이 무엇인지의 차이. 별것 아닌 듯 보여도 간극은 꽤 넓다.
본래 의인화는 감정을 투사하기 위한 비유법이다. 우리는 이해하지 못한 대상을 이해한 것처럼 표현하고 싶을 때 추상화된 감정의 말들을 갖다 붙인다. 가령 ‘거칠고 사나운 숲’이란 표현에는 숲의 정확한 묘사 대신 숲을 향한 나의 두려움이 묻어 있다. 일찍이 프랜시스 베이컨은 동심이란 미명하에 의인화를 남발한 동화들을 ‘종족의 우상’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았다. 인간의 관점으로 재편된 세상은 때때로 오류를 은폐하고 본질을 가린다. 하지만 <주토피아>는 여기서 조금 비켜나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주토피아>의 동물들에게서 사람의 흔적을 발견하는 건 그들의 모든 동작, 표정, 반응, 사고방식이 사람의 모습과 똑같기 때문이다. 주디가 흥분할 때 코를 움찔거리는 모습, 귀를 접었다 폈다 하는 행동, 혹은 당근 볼펜을 꺼내는 걸 본 후에야 우리는 주디가 토끼란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는다.
이 전략은 꽤 영리해 보인다. 한번도 진짜 공룡을 본 적 없는 우리가 <쥬라기 공원>의 공룡을 진짜처럼 받아들일 수 있는 건 거대한 물체의 울림, 골격과 움직임, 파충류의 피부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각 정보에 거짓이 없을 때 그 합이 비록 허상일지라도 이미지는 실체를 얻는다. <주토피아>의 동물들도 마찬가지다. 주디와 닉을 포함한 동물들의 행동 하나하나는 영화에서 우리가 숱하게 봐왔던 캐릭터들의 흔적과 조합이다. 거기에 강박에 가까운 디테일로 동물의 속성을 덧씌웠을 때 우리는 동물친구들의 생경한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볼 수 있다. 사실 동물이 아니라 한번도 본 적 없는 외계 생물이었더라도 상관없었을 것 같다. <주토피아>의 의인화, 아니 ‘동물화’의 디테일은 친밀감의 거리를 줄이는 마법의 레시피다. 익숙한 이야기를 새롭게 보이도록 착시를 일으키는 동시에 꼼꼼한 현실 반영과 이상적인 결말이 가능하도록 폭신한 완충재를 제공한다. 불편한 지점을 모두 가리는 그 이중 은폐에 대한 문제제기와는 별개로 효과만큼은 인정할 만하다.
다시 돌아와 왜 토끼에게 이토록 반했을까를 곰곰이 생각하다보니 주디가 점점 더 사랑스러워졌다. 주디는 말 그대로 ‘토끼처럼’ 귀엽다. 다만 토끼의 귀여움은 주디가 가진 사랑스러움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주디가 토끼라서 귀여운 게 아니라 귀여운 주디가 토끼였을 뿐이다. 나는 정의롭고 낙천적이고 부지런하고 무엇보다 제대로 사과할 줄 아는 주디 홉스에게 반했다. 그리고 만약 닉 와일드가 상대의 실수를 용서할 줄 아는 여우, 툴툴거리면서도 주변을 살필 줄 아는 속 깊은 이성친구가 아니었다면 그에게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닉과 주디의 미래를 두고 “사랑은 내가 할 테니, 너희는 우정을 지켜라”라는 팬들의 귀여운 질투도 보았다. 나는 이 커플의 미래를 응원하고 싶어졌다. <주토피아>가 진정 동물들의 유토피아가 될 가능성이 있다면 서로의 다름을 차별의 근거가 아니라 공감의 필요성으로 받아들이려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그 출발로 이만큼 적절한 커플이 또 있을까. 이유가 있어서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이미 사랑에 빠졌기에 행동 하나하나가 사랑스러워 보이는 건지도 모르겠다. 선후(先後)가 헷갈리고 인과(因果)가 무의미해지는 그 순간 내가 사랑 한가운데 있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내가 아직 너를 제대로 모른다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는 것. 그래서 지금부터, 앞으로도 알고 싶다는 것. 돌이켜보면 내 사랑의 고백도 항상 그렇게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