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버필드 10번지>의 결말 스포일러가 4월4일 일기에 있습니다.
<테이크 쉘터>의 커티스(마이클 섀넌)는 종말의 계시를 받고 방공호를 짓는다. <클로버필드 10번지>의 하워드는 음모론을 신봉해 같은 일을 한다. <테이크 쉘터>는 커티스가 본 멸망의 이미지가 계시인지 환각인지 관객이 고민하게 하지만, <클로버필드 10번지>는 왜 꼭 둘 중 하나여야만 하냐고 의표를 찌른다. 존 굿맨이 연기한 하워드는 그래서 링거와 족쇄를 같이 주는 복합적인 악역이다. <바톤 핑크>의 찰리처럼 위압적으로 등장하지만 용의주도하다기보다 어설프다. 맥주병으로 자기를 공격한 당사자에게 상처를 꿰매달라고 부탁하는 지경이다. 그의 방심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어마어마한 확신에서 나오고 이 점이 무시무시하다. “거절은 거절한다”가 그의 모토다. 하워드를 폭발하게 만드는 버튼은, 첫째도 둘째도 배은망덕한 태도다.
04/04
<클로버필드 10번지>는 원래 <위플래쉬>의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프로젝트였다고 한다. <위플래쉬>의 제작이 진전되면서 댄 트라첸버그 감독이 연출을 넘겨받았고 셔젤의 이름은 공동 각본 크레딧에 남아 있다. 한편 시나리오 단계에서 <지하실>(The Cellar)이었던 영화의 제목은 배드 로봇(J. J. 에이브럼스의 영화사)이 제작을 맡으면서 <클로버필드 10번지>(10 Cloverfield Lane)로 바뀌었다. 이에 대한 반응은 분분하다. 극장으로 초기 관객을 유인하는 데에는 속편 포지셔닝이 효과적이지만 <클로버필드>(2008)와 내용상 직접적 관련은 하나도 없으니 속임수 아니냐는 항의가 당연히 있다. 상당히 독창적인 데뷔작인데 제목 탓에 독자성이 가려졌다는 불평도 있다. 나는 아직 별 의견이 없다. 하지만 만약, J. J. 에이브럼스가 다른 지역의 다양한 인물이 겪는 동일한 재앙의 여파를, 재앙의 본체는 보여주지 않으면서 하나씩 1980년대 TV시리즈 <환상특급>(The Twilight Zone)식 영화 연작으로 만들 작정이라면 기대가 된다. 중간급 예산으로 B급 영화적 유희성을 살려가는 프랜차이즈라면 참신하지 않을까? 이 경우 <클로버필드>의 맨해튼과 <클로버필드 10번지>의 루이지애나를 초토화시킨 공습은 같은 재앙이고 앞으로 나올 연작은 큰 그림을 한 칸씩 채워갈 지그소 퍼즐 조각인 셈이다. 게다가 이런 부류의 스토리텔링이라면, 출세작인 TV쇼 <로스트>에서 J. J. 에이브럼스가 탁월한 기량을 증명한 바 있다. “안 될 것 없잖아?”라고 생각하게 되는 다른 이유는, 미국 TV가 전통적인 영화의 영역을 넘겨받는 한편 미국영화는 TV화되는 21세기의 현상 때문이다. 중간 규모 예산의 장르영화들이 자랑하던 밀도 높은 플롯과 캐릭터 스터디-와 그것에 능한 작가들-는 TV로 활동의 장을 옮겼고 할리우드가 수익원을 의지하는 속편과 유니버스물의 서사는 TV 연속극(serial)의 패턴을 닮아가고 있다. 현황이 이렇다보니 캐릭터들로 직접 연결되는 기존 슈퍼히어로 우주의 익숙한 확장방식과 차별화해, 이미 일어난 거대한 사태의 이모저모를 불규칙하게 드러내는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어떨까 호기심이 솟는 것이다. 적어도 인물 연결형보다 개별 영화를 연출하는 감독이 좀더 자유롭게 재량을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
이야기의 종장에서 미셸(메리 엘리자베스 윈스티드)은 자신의 전략과 기술로 하워드의 지하 벙커를 벗어난다. 그러고는 예상 못한 두 번째 강적과 마주쳐 우리도 그녀도 몰랐던 순발력과 전투력을 발휘한다. 마침내 자동차를 몰고 탈주한 미셸은 라디오에서 바톤 루즈의 피난소 안내와, 휴스턴에서 전투 경험자를 저항군으로 모집한다는 소식을 동시에 듣는다. 그녀는 남자친구와 가족이 어디 있을까를 고민하기 전에 휴스턴행 도로로 좌회전한다. 관객은 깨닫는다. 이제 미셸은 전투 경험과 싸움의 능력을 갖춘 인간이 된 것이다. 바로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우리의 눈앞에서. <클로버필드 10번지>는 미셸이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고 무슨 일을 겪었는지 구체적으로 전달하지 않는다. 길을 떠나려고 그녀가 짐을 싸는 도입부에서는 아예 음악으로 대사를 덮었다(차후 속편의 스토리를 운용할 여지를 남기는 선택으로도 보인다). 남자친구로 추정되는 인물 벤(브래들리 쿠퍼)과의 통화는 결혼을 둘러싼 갈등을 희미하게 암시하는 데에 그친다. 속박에서 벗어나 다른 삶을 찾아 떠난 모양새지만, 영화 초반 미셸은 충동 이상의 비전이 없어 보인다. 짐을 꾸리는 손길은 두서없고 와중에 술은 여러 병 챙긴다. 하워드의 벙커에서도 미셸은 예속된 신세다. 그런데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다가 의지와 실행력, 이타심을 발견한다. <클로버필드 10번지>는 그녀가 누구였는가에 무심한 대신 스토리가 진행되는 동안의 변화와 그 결과로 얻은 새로운 성격에 집중한다. <클로버필드 10번지>의 엔딩은, 이야기를 끝내는 동시에 다시 시작한다. 온갖 난관을 뚫느라 탈진했을 게 분명한 미셸은 앞선 어떤 장면보다 에너지 넘치는 모습으로 핸들을 꺾는다. 말할 나위 없이 속편을 암시하는 엔딩이다. 하지만 설령 후속작이 나오지 않는다 해도 자체로 통쾌한 결말이다.
04/05
<4등>이 재미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현실과 유관하기 때문이다. 안 그런 영화도 있냐는 반문이 돌아올 만하다. 고쳐 말하자. <4등>은 체벌 때문에 갈등하는 두 수영 선수의 이야기를 통해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일이 이다지도 초조한 이유를 들여다본다. 1등 해서 대학 진학에 도움이 될 것이 아니면 취미 하나 마음껏 탐닉할 수 없고, 자식이 매를 맞아도 성적이 오르는 쪽을 택하는 것이 현명한 부모의 행태로 간주되는 상황. 단기 성취와 효율을 제외한 나머지 가치는 모조리 허세나 사치로 취급되고, 인간적 품위를 갖기 위해서는 극소수 상위 그룹에 진입해야만 하는데 거기까지 이르는 동안 품위라는 말의 의미조차 잊어버리게 되는 괴상한 풍경. 초등학생부터 장년층까지 섞인 <4등>의 객석은 상영시간 내내 영화의 모든 말과 몸짓에 적극적으로 반응했다. <4등>은 인권영화로 기획된 프로젝트인 동시에 감독 정지우의 장기와 개성이 고스란히 살아 있는 작품이다. 매혹적이고 사늘한 개인주의자 캐릭터와 거기 밀착된 연기, 아등바등하는 군상을 바라보며 “무슨 일 났나? 뭘 그렇게까지”라고 반문하는 투의 유머, 부드럽고 섬세한 리듬감이 그것들이다. 이 영화의 수영장 물밑 풍경은, <해피엔드>의 근조등 신, <사랑니>의 공중부양 키스 신, <은교>의 노시인이 품은 환상을 잇는 정지우 특유의 태연자약하고 어사무사한 판타지다. 예정에 없던 무대인사에 나선 정지우 감독과 극장 출구에서 마주쳤지만 감상과 궁금증을 나눌 시간이 없었다. 저만치서 배우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04/19
<4등>을 본 지 2주 만에 정지우 감독과 만났다. 오늘 대화를 메모해둔다. 제일 많이 나온 말은 ‘맞을 짓’이었다. 이야기는 매우 즐거웠지만 돌아오는 길은 울적했다. 밑줄친 부분이 나의 말이고, 나머지가 정지우 감독의 말이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영화의 어느 지점에 체벌을 등장시키고, 어떻게 촬영할지 고민했겠다.
=준호(유재상)의 이야기를 들려주다가 코치인 광수(박해준)의 젊은 시절로 플래시백하는 구성이 관객이 이해하긴 쉬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광수가 먼저 맞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러면서도 선명하게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체벌 장면은 3D 모델링, 찍어서 거꾸로 돌리기 등 온갖 대안을 강구했지만 무술팀의 결론은 “조심해서 한번에 찍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이었다. 카메라 두대를 돌렸다. 맞는 상황의 불편한 얼굴을 따로 떼어 연기하면 안 되니까.
-액션영화를 만들 생각을 해본 적 있나.
=있다. 그러나 무용처럼 다루고 싶은 건 아니다. 그러고보니, 내가 영화로 찍고 싶은 건 액션이 아니라 폭력인 것 같다. 장르적 액션 말고 사람의 행위로서의 폭력을 찍고 싶다.
-젊은 광수(정가람)는 <해피엔드>의 보라(전도연), <사랑니>의 인영(김정은), <은교>의 주인공들이 그랬듯 이기적이면서 어딘가 매력적인 인간이다. 좀 ‘못된’ 인물에 끌리는 경향이 보인다.
=설명이 불가능하다. 맛있는 냄새에 침이 도는 것처럼 어쩔 수 없는 끌림이다.
-준호 역의 유재상 배우에 대해 들려줄 말이 있다면.
=엄청나게 영리한 사람이다. 예컨대 “형은 웃을 때 입꼬리를 올리질 않네요?”라고 불쑥 관찰하는 식이다.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어린 배우들을 연출하기 위해 상황에 대해 거짓말도 했다고 들었는데 유재상 배우는 절대 속을 사람이 아니다. 극중 정황을 이해하고 자기 방식으로 연기해야만 하는 배우다. <4등>의 준호도 그저 꿈을 이루는 소년이 아니므로 적합한 캐스팅이었다.
-영화 앞부분을 보며 1998년이 벌써 흑백으로 회고하는 시간이 됐구나, 흠칫했다. 하지만 흑백과 컬러로 1998년과 현재를 구분할 필요가 있었는지는 확신이 안 든다.
=광수가 겪은 체벌이, 코치가 된 광수가 준호에게 가하는 폭력과 준호가 동생을 때리는 사건의 씨앗이라고 인식해서다. 물론 광수를 때린 코치도 누군가에게 맞았겠지만, 극중 시간 안에서 폭력의 시원(始原)이라고 여긴 부분이라 흑백으로 구별했다. 첫 사건에 다른 사건들이 매달려 있는 구조다.
-난해하진 않지만 기묘한 이야기 구조다. 정확히 대칭도 아니고, 무엇보다 이야기의 시작이었던 광수가 마지막에 옆으로 슥 사라진다. 통상의 드라마라면 타락한 코치가 폭력을 거부하는 어린 선수를 만나 다시 맑아져야 할 텐데.
=박해준 배우가 ‘반성하지 않는 존재’라고 광수의 캐릭터를 설명하더라. 멋진 표현이다. “나는 반성하지 않아, 그럴 의사가 없어”라고 말하는 인간은 위력적이다. 영화 안에서 관습적인 화해로 퇴장시키는 것보다 존재감 면에서 더 강하게 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반성하지 않으면서 본인이 그런 줄 모르는 사람들과는 확실히 다르다. 인권영화라는 범주는 있지만 세부 주제는 직접 선택했다.
=여고생들을 무지막지하게 때리는 여교사를 찍은 유튜브 동영상을 보았다. 체벌 사유는 점심시간에 학교 담을 넘어 술 마시고 담배 피우기를 반복했다는 거였다. ‘맞을 짓’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더라. 거기서 이 영화의 질문을 정리했다. 몇 번째 담을 넘을 때부터 맞을 짓인가? 술까지 마셔서 맞을 짓인가, 담배만 피워도 맞을 짓인가? 이 물음의 답은 완전히 자의적이고, 체벌한 사람뿐 아니라 그것을 용인하는 제3자들이 정확히 어디 서 있는지를 드러낸다. ‘폭력의 대물림’이라는 말에는 같이 근심하지만 돌아서서 타인을 때리는 입장에 처하면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이 ‘맞을 짓’을 근거로 합리화한다. <4등>을 찍으며, 금지하는 방식의 언어로는 폭력에 관대한 문화를 멈출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 “때리면 안 된다”가 아니라 “맞을 짓이란 없다”로 시작해야 한다. 맞을 짓이 없다면 때리지 않고 가르치는 법을 생각해야 한다.
-“널 위한 최고의 교육법”이라는 명분으로 학생을 체벌하지만 어찌 보면 단지 교육 스킬의 미비함과 게으름 같다.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고 변화시키는 데에는 더 많은 시간과 교사로서 더 큰 능력이 필요하니까. 손쉬운 방법 중 체벌로 몇번 즉각적 효과를 보고나면 그걸 금과옥조로 믿어버리는 것 같다.
=한국 사회 특유의 조급함도 있다. 한번 밀리면 절대 역전할 수 없다는 불안과 공포가 있다. 어린 광수는 뛰어난 재능이 있었다. 그런 재능의 이면에는 게으름이 있고 주로 원인은 권태다. 뒤가 다 보이니까 지루한 거다. 이 시점에 큰 재능이 지치거나 질리지 않고 탐구할 영역을 열어주는 것이 좋은 교육이다. 그런데 단기 승부에 써먹을 수 있는 부분에만 교육이 집중되면 뛰어난 사람들은 게을러진다. 영화를 위한 취재 과정에서 만난 많은 재능 있는 운동선수들을 주변인들이 그렇게 대했다.
-구타 자체보다 4등만 하던 준호가 2등을 했을 때 코치가 전혀 칭찬하지 않는 모습과 때린 다음 마사지를 해주는 장면이 더 기괴했다.
=원래 남자들이 그런다. 때리고 난 다음 짜장면 사준다. 채찍과 당근의 교차다. <4등>에도 체벌한 다음 마사지를 해주고 먹을 걸 사주는 장면들이 있다. 그렇게 아이가 선생의 논리에 중독된다. 소위 ‘맷정’이 들고 어떤 부류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진리가 되어, 은퇴한 교사가 회갑잔치에서 “그래도 찾아오는 건 맞은 학생들이고 덕분에 잘됐다고 감사한다”는 성공신화를 퍼뜨린다. 폭력으로 끈끈한 멤버십이 생긴다고 집단적으로 믿어버리는 현상이다.
-준호 엄마(이항나)는 이 영화에서 희화화된 악역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다. 교육이 왜곡된 주요 원인을 한국 어머니들의 행태에서 찾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지나치게 무거워지지 않으려고 유머를 불어넣는 데에 엄마가 희생한 면이 있다. 엄마가 희생할 수 있는 까닭은 이항나라는 원숙한 배우가 몸의 기운으로 (심각함과 희극성을) 운용할 수 있어서다. 용한 코치를 소개받으러 교회에 가서 다른 선수 엄마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는 장면이 좋은 예다. 정말 낯 뜨겁고 어려운 장면이다. 한편 극중 인물 가운데 누구의 행동에 합당한 벌이 주어지고 있나를 보면 엄마만이 정당하게 대가를 짊어졌다는 인상도 있다.
-(이 문답에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개봉 후 결말에 대해 관객의 질문을 받았을 것 같다. 할리우드영화에서 많이 보는 승자가 실익도 명분도 다 가지는 결론과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등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부가 있다. 마지막 시합에서 준호는 대단히 곤혹스러운 처지다. 코치에겐 거절당하고 부모에겐 말도 못하고 혼자 대회에 나갔고 좋은 성적이 나온다. 마지막에 (몽둥이로 쓰인) 청소도구함에 흘깃 던지는 준호의 시선에는, 이 등수가 그동안의 혹독한 훈련이 남긴 결과가 아닐까 하는 의혹과 찜찜함이 있다. 그 정도가 내가 찾을 수 있는 적절한 결론이었다. 앞선 궤적을 싹 휘발시키고 각성하고 화해하기에는 이 영화가 너무 밀접하게 현실의 톱니바퀴와 물려 있었다.
-놀이와 경쟁이 공존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모든 것은 놀이로부터 시작되고 놀이시간이 길수록 최종 결과가 좋다는 것이 교육학자와 체육 관련 연구자들의 일치된 의견이다. 놀이를 완전히 건너뛰고 경쟁의 연쇄만 남겨두니, 이겼을 경우의 기쁨 외에 즐거움이 없다. 즉, 승리를 얻지 못하면 이제부터 나는 뭘 하나 고민이 시작되는데 부모는 넌 이미 다른 길을 찾기엔 너무 멀리 왔다고 말한다. 놀랍게도 교육 과정에서 놀이의 시기를 길게 유지하지 못하는 건 스포츠 분야만의 문제가 아니더라. 영화를 본 미술, 음악 전공자들도 “우리도 똑같다”고 들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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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걀 요리
판타지 블록버스터가 아닌 간만의 출연작 <미스터 홈즈>의 한국 개봉을 앞두고 있는 배우 이안 매켈런의 행보를 검색하다가 여태 몰랐던 그의 초단편영화(?)를 발견했다. 2015년 7월 <미스터 홈즈> 미국 개봉 당시 매켈런이 페이스북에 직접 찍어 올린 ‘세계 최고의 스크램블드에그 만드는 법’이다. 본인의 연기 재능이 화제가 되면 과도할 만큼 겸손을 고집해온 이 배우는, 양어머니의 달걀 레시피에 대해서는 최고의 자부심을 감추지 않는다. 포인트는 달걀, 버터, 크림(우유), 소금, 후추를 프라이팬 아닌 소스팬에 넣고 익히면서 주걱으로 열심히 섞는 것. 프라이팬은 가열속도가 빨라 달걀이 금방 퍽퍽해진다고 한다. “달걀을 섞는 동안 라디오를 듣거나 사랑하는 사람들과 대화해도 좋아요.” “이 방법의 멋진 점은 도중에 토스트를 준비하는 동안 잠깐 불을 껐다가 다시 익혀도 된다는 것이죠!” 등이 매켈런의 팁이다. 누군가가 <간달프의 마법 쿠킹> <매그니토의 메탈 키친> 같은 요리 프로그램을 기획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