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정재혁의 영화비평] 만화에서 영화로 옮기는 과정에서 선명하게 살아난 것 <바쿠만>
2016-05-05
글 : 정재혁

가냘픈 펜선이 하늘을 휘감고, 곧이어 등장한 붓선이 천지를 흔든다. 오오네 히토시 감독이 출연하고, 구도 간쿠로가 각본을 쓴 <바쿠만>은 만화를 매개로 청춘과 성장, 노력의 중요성, 그리고 성공까지의 지도를 상세히 그려주는 만화영화다. 2015년 개봉해 일본 아카데미상 6개 부문을 수상했는데 눈에 띄는 건 쓰즈키 유지 미술감독이 설계한 선의 세상이다. 영화의 중반부 회심의 만화 <세상은 돈과 지혜>를 그리는 장면은 이 영화의 가장 멋진 클라이맥스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인공 마시로 모리타카(사토 다케루)는 프레임으로 구성된 만화의 3차원을 펜과 붓으로 휘갈긴다. 카메라는 위아래, 좌우를 유연하게 움직이며, 덩달아 펜은 향기를 풍기듯 진한 자국을 남긴다. 만화를 소재로, 원작으로 했기에 당연히 취했을 기법이지만, 영화의 배경을 버리고 만화의 컷으로 장면을 구성한 아이디어는 그럴싸한 효과를 낸다. 외부환경과 캐릭터의 개입 없이 장면이 완성되는 덕에 관객은 영화 스토리에 보다 더 깊게 이입할 수 있고, 잡음을 소거한 펜의 소리는 무성의 종이만화에 음성을 부여하는 기능을 한다. 이 영화엔 거의 뮤직비디오에 다름없을 정도로 사카낙션의 <신보물섬>이 흐르는데 이는 영화를 하나의 커다란 소리덩어리로 인식하게 한다. 선은 프레임을 짜고, 그렇게 만들어진 그물은 음악을 끼고 흐른다. 2차원에서 3차원으로의 버전업 그리고 4차원까지의 확장, 소리와 펜, 문자, 그리고 프레임이 합일 지점에 이르는 순간 영화는 정점의 쾌감을 안겨준다.

영화의 메가폰을 쥔 건 오오네 히토시지만 전체적인 호흡과 분위기는 각본가이자 연기자인 구도 간쿠로쪽에 더 가깝다. 본래 만화마니아이자 말장난에 의한 대사 치기로 유명한 그의 솜씨는 이번 영화에서도 백분 발휘됐다. 특히 마시로 모리타카, 그의 콤비 멤버 다카키 아키토(가미키 류노스케)가 라이벌이자 동경의 대상인 니이즈마 에이지(소메타니 쇼타)의 배틀을 형상화한 시퀀스는 떨어지는 글자, 휘몰아치는 선, 앞뒤로 이동하며 3차원의 영역을 4차원의 입체 공간으로 전환시켜주는 카메라의 합이 황금비율로 이뤄진 장면이다.

여기서 마시로 모리타카는 거의 사무라이의 기세로 화면을 분할하는데 그렇게 쪼개진 컷은 흰 배경에 만화의 줄거리를 응축해놓은 듯해, 진한 드라마 흉내를 내는 듯한 인상을 준다. 사랑, 용기, 승리. 이 세 단어는 <바쿠만>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 중 하나다. 만화가 지망생 고교생의 방황을 잡아주는 건 사랑이고, 무모한 도전일지 모르는 만화잡지 연재 목표를 향해 주인공을 끌고 가주는 건 용기이며, 힘겨운 노력과 고통 끝에 결실을 맺어주는 건 승리다. 더불어 이 영화는 소년 시대의 이상을 표상화한 일종의 일기와도 같다. 마시로 모리타카가 딜레마에 빠져 고민하다 걷던 길에서 마주친 헌책방 앞엔 꼬마들이 <소년 점프>를 하나씩 사서 읽고 있다. 다이어리에 빽빽이 적힌 어릴 적의 기억이 현실의 아픔을 치유해주는 장면이다. 만화는 시대를 연결한다.

솔직히 이야기해 <바쿠만>의 이야기는 필요 이상으로 간단하다. 만화가를 동경하는 소년 둘이 라이벌과 겨루고, 동료들과 팀을 이루며, 한번의 절망, 그리고 작은 성공들을 딛고 <소년 점프> 권 두 표지호로 독자 랭킹 1위에 오른다는 빤한 스토리 전개를 따라간다. 화려한 카메라워크, 문자와 선의 앙상블이 없었다면 많이 심심했을 거다. 그래서 오오네 히토시 감독은 <바쿠만>을 단순히 고등학생 청년들의 꿈 이야기만이 아닌, 일본 국민 전체가 관여된 세상이라는 점을 일갈한다. 영화의 초반부 <바쿠만>은 일본에서 만화가 얼마나 대중적으로 퍼져 있는지를 통계 자료를 통해 보여준다. <바쿠만>은 1968년 창간해 초반엔 부진했지만 능력 있는 신인의 만화를 연재하며 조금씩 성공의 길에 들어섰다. 1980년대 <소년 점프>를 사보는 일본 국민의 비율은 무려 30%이며, 이는 일본인 20명 중 1명이 <소년 점프>를 산다는 의미가 된다. 더불어 1980년대 <닥터 슬럼프>의 히트에 이은 2주 합병호는 653만부라는 일본 역대 최다 판매부수를 기록했다. 숫자가 주는 의미는 만화가 단순히 어린아이들의 장난감에 불과하지 않고 일본 사회 전체, 시대의 흐름을 증명하는 역사 미디어임을 가리킨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만화는 시대를 연결한다.

한국에선 유독 안 팔리는 장르지만 일본의 장기인 것 중 하나에 청춘 학원물이 있다. <바쿠만> 역시 큰 얼개에서 청춘 학원물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학교가 등장하고 꿈과 이상을 논하며 청춘의 에너지로 매일을 설계하는 삶.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순수한 느낌의 여고생이 있다. <바쿠만>에서 마시로 모리타카의 맘을 단숨에 훔친 아즈키 미호(고마쓰 나나)는 영화에서 여주인공을 꿰차기도 한다. 전형적인 일본발 학원물을 완성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건 우정으로 쌓아올린 커뮤니티다. <바쿠만>에서 오오네 히토시 감독이 취한 전략은 어떤 캐릭터도 혼자 두지 않는 거다. 마시로 모리타카는 다카키 아키토와 짝꿍을 맺었고, 다소 폭력적인 후쿠다 신타(기리타니 겐타)는 채색에 특출한 재능을 뽐내며 마시로팀에 합류한다. 노가다에 가까운 15년 어시스턴트의 노동을 견뎌 데뷔에 골인한 뚱보 만화가 역시 한때 포기했던 꿈을 다시 꺼내들며 친구들과 함께한다. 누구도 혼자면 안 된다는 마음. 이는 <바쿠만>에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 중 하나다. 특히 극단적 적수로 설정된 니이즈마 에이지를 단순한 경쟁 상대가 아닌 함께 가는 동료로 묘사한 대목은 이 영화를 허망한 성공담으로 빠질 위기에서 구해준다.

한 계단 위에 두 계단이 있고, 그 위엔 정상이 기다리고 있다. <바쿠만>은 기적적인 승리, 극단적인 절망을 그리지 않는다. 마시로 모리타카와 다카키 아키토는 <소년 점프> 신인만화상 가작으로 시작해, 컬러 권두 특집, 독자 인기 랭킹 10위, 8위, 2위, 그리고 1위의 길을 어렵고 힘겹게 올라간다. 잭팟의 성공은 과장된 거짓말이고, 해답 없는 좌절은 부풀려진 엄살이다. 그리고 이는 인생의 주요한 덕목 하나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어떤 길에도 순서가 있다는 것, 그리고 행복은 기적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는 거다.

트렌디한 클리셰를 몽땅 들이부은 듯한 <바쿠만>이지만 좀 생소하게 느껴지는 건 청춘물에서 항상 주요 캐릭터로 등장하기 마련인 부모 세대가 자녀 세대와 완벽하게 단절되어 있다는 거다. 마시로 모리타카는 항상 집이 아닌 학교에 있으며, 그가 유사 부모관계를 갖는 건 삼촌인 가와구치 다로다. 이는 부모-자녀의 수직이 아닌 삼촌-자녀라는 수평의 관계를 형성하며, 직계가족의 답답함, 융통성 없음을 해소하는 기능을 한다. 보다 더 평등한 세상에서, 평형대에 올라 하늘을 올려다보듯 그려낸 만화의 세상은 소통을 가능하게 하고, 불가해한 문제의 답들을 하나씩 찾아낸다. 애니메이션, CG 등 아무리 3차원의 세계가 대세라 해도 2차원의 넓디넓은 품의 힘을 무시할 수 없다.

영화감독 이상일은 오래전 한 인터뷰에서 자니즈는 일본영화의 보물이라 말한 적 있다. 이 말을 요즘 버전으로 업데이트해 조금 확대해보면 남자 모델은 일본영화의 보물이다. 영화에서 니이즈마 에이지로 출연한 소메타니 쇼타는 남성 패션지 <멘즈 논노>의 메인 모델로 이름을 알린 배우다. 영화에서 다카기 아키토로 출연한 가미키 류노스케 역시 <주논 보이> 콘테스트 수상자이니 일본영화 내 남자 모델의 영역은 꽤나 견고해 보인다.

수천번 얘기해도 닳지 않는 말들이 있다. 우정, 사랑, 승리 역시 그렇다. <바쿠만>이 이 세 단어로 반죽해 비벼내는 만화 월드 역시 이상의 낙원을 이미지화해 제시한다. 개인적으로는 만화를 좀처럼 읽지 않았다. 소년만화는 물론, SF도 무협도 관심이 가지 않았다. 유일하게 간간이 찾아 읽었던 건 소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거나 고생하는 아줌마가 주인공인 사이바라 리에코 작가의 억척스런 홈드라마들이다. 이들이 거칠고 볼륨 높은 소년만화, SF와 차별되는 지점은 보다 수평적인 자세다. 크게 소리치지 않고, 억지 주장을 부리지 않으며, 조근조근 작고 아담한 말들로 블록 쌓듯 쌓아올린 유연함의 성은 어쩌면 강함을 자랑하는 세계보다 견고할지 모른다. <바쿠만>을 보고 마음으로 조용히 울었다. 영화의 메시지가 보여주는 풍경이 아연하고 서글퍼서라기보다 앞으로 그려질 길이 꽤나 험난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나의 장애물과 하나의 바위를 넘어 세상의 하늘 저 끝까지 점프한다. 이것이 청춘의 힘, 용기의 에너지, 승리의 쾌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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