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정 이사와 함께 인터뷰하면 안 돼? ‘100만’ 했다고 인터뷰하는 것도 민망하고, 혼자 할 말은 없어. 사진도 얼굴이 잘 안 나오게 찍어줬으면 좋겠어.” 인터뷰하기로 한 날, 김윤미 대표로부터 문자가 왔다. 털털해서 까다로움과 거리가 먼 사람인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은 듯했다. 한주에 채 10만명이 극장을 찾지 않았던 4월 비수기, 강예원, 이상윤 등 티켓 파워와 거리가 먼 주연배우, 10억원이라는 적은 제작비, 메가박스(주)플러스엠이라는 중소 배급사 등 흥행하기 쉽지 않은 환경임에도 <날, 보러와요>가 100만 관객을 불러모을 수 있었던 건 OAL 김윤미 대표의 세심한 성격도 한몫했으리라. 막상 인터뷰를 해보니 문자에서 보이던 까다로움이나 까탈스러움은 온데간데없고, 대화의 반 이상이 기사로 쓸 수 없는 ‘오프 더 레코드’일 만큼 입담이 화끈했다. 김윤미 대표는 이 말만은 꼭 써달라고 강조했다. “<날, 보러와요>는 이 영화를 지지하고 투자해준 사람과 이 영화의 가치를 모르고 지나쳤던 사람, 두 부류 모두에 의미 있는 작품이다.”
-지난 4월25일, <날, 보러와요>가 총관객수 100만명을 돌파했다.
=덕분에 김이정 이사, 공동 제작사 분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티켓 파워가 없는 배우, 10억원이라는 저예산, 청소년 관람불가, 비수기 등 흥행하기가 쉽지 않은 환경이었다. 이같은 악조건이라면 내가 아닌 누가 했더라도 정말 잘했다고 칭찬해주고 싶다.
-관객이 이 영화를 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가족의 동의만 있다면 누구라도 정신병원에 감금될 수 있다는 소재가 셌다. 코미디영화에 주로 출연했던 강예원과 영화로 넘어온 이상윤의 연기가 좋았고, 10억원이라는 예산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완성도도 높았다. 무엇보다 강예원이 대낮에 봉고차에 납치되어가는 예고편이 관객에게 먹혔던 것 같다. 무려 300만 뷰를 기록할 만큼 젊은 관객이 그 예고편을 찾아 보았고, 덕분에 사전 인지도가 많이 올라갈 수 있었다. 대진운도 좋았다. 같은 날 개봉했던 <독수리 에디>와 2주 먼저 개봉했던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이 그렇게 빨리 사그라질 줄 몰랐다.
-영화가 개봉했던 4월7일 무렵은 매주 10만명도 극장을 찾지 않는 비수기였다. 걱정되진 않았나.
=이 영화는 저예산 상업영화다. 저예산 상업영화는 정확한 타기팅만 하면 비수기라도 관객을 불러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영화가 재미있으면 보러 오고, 아니면 쭉 떨어지고. 만약 같은 스릴러 장르의 웰메이드 영화가 있었더라면 100만명을 불러모으기 힘들었을 것이다. 운이 좋았다. 사람들은 20만, 30만명 들 거라고 예상하더라. (웃음)
-<날, 보러와요>는 <올드룸>이라는 시나리오를 이철하 감독에게 제안하면서 시작됐다고 들었다. 당시 그 아이템에서 어떤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나.
=2014년 4월 공동 제작자인 최연주 대표로부터 그 시나리오를 받았다. 그때는 귀신이 나오는 장소를 소재로 한 공포영화였다. 이야기에 반전이 있는 걸 되게 좋아하는데, 그 시나리오의 맨 마지막에 여주인공이 미친 척했다는 반전이 마음에 들었다. 그 반전만 빼고 전부 스릴러로 바꿔서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영화를 함께 준비했던 이철하 감독님에게 보여드렸다.
-<날, 보러와요>는 제작자로서 어떤 의미가 있는 작품인가.
=함께 회사를 차린 김이정 이사와 나는 대기업 투자•배급사 출신이지 않나. 우리가 회사를 나가 이 작품을 제작한다고 했을 때 ‘쟤네가 뭘 하겠어’라고 의문을 표시한 사람들에게 적절한 대답을 내놓았다고 생각한다. 작은 시장에서 티켓 파워가 크지 않은 배우들과 시의적절한 소재를 가지고 시장에 안착한 결과물을 다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영화계 경력을 메가박스 코엑스 오픈 멤버로 시작했다.
=코엑스가 오픈했을 때 극장 매니저였다. 첫 사회생활이었다. 16개관 규모의 극장이 오픈한다기에 매주 16편의 영화를 볼 수 있겠다 싶어 지원했다. 막상 입사하니 한 영화가 두개관을 차지하기도 해서 6편만 걸리는 경우도 있더라. 멀티플렉스를 잘 몰랐던 시절이니까. (웃음) 3개월만 하고 때려치우려고 했는데 일이 재미있더라.
-뭐가 재미있었나.
=상영시간표 짜는 일을 했다. 당시 메가박스는 미국 로 극장의 시스템을 그대로 가져왔다(메가박스는 오리온과 미국 로 극장이 함께 설립했다.-편집자). 어떤 영화를 어떤 시간대에 배치하는가에 따라 관객수가 몇 천명씩 바뀌는 게 신기했다. 메가박스에서 2년 반 정도 일했다. 영화 제작을 하고 싶었는데 마침 쇼박스가 영화 사업을 시작해 회사에 그쪽으로 보내달라고 졸랐다.
-그때 배급팀으로 옮긴 건가. 배급은 영업을 해야 하는데 적성에 맞았나.
=사실 한국영화팀으로 가고 싶다고 졸랐는데(웃음), 극장 운영을 했으니 그 일에 어울리는 배급팀으로 보낸 것 같다. 처음에는 메가박스에서 내려보낸 낙하산이라고 선배들이 되게 싫어했다. 배급의 배자도 몰라서 ‘동판’(옛날에는 신문 광고에 들어가는 극장 광고를 동판으로 제작했다.-편집자)이 뭐죠?’ 그랬다가 욕먹고. (웃음) 원했던 일은 아니었지만 되게 열심히 했고, 나중에 인정을 받았다. 그러면서 선배들이 배급계의 좋은 사람들을 많이 소개해줬다.
-털털한 성격은 배급 일을 하면서 형성된 건가. 아니면 원래 성격인가.
=영업을 해야 하니까. 술 마시면서 사람들을 재미있게 해줘야 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다가가는 법도 배웠고. 원래 술도, 술자리도 좋아하지 않는다.
-의외다.
=술자리에 다섯명 이상 모이면 집에 일찍 가고 싶다. 술을 싫어해서 술을 마시자고 한 사람에게는 작정하고 대작한다. 연달아 폭탄주를 먹이는 것도 빨리 마시고 집에 일찍 들어가기 위한 전략이다. 다 이유가 있는 행동인데, 사람들은 김윤미와 술을 마시면 죽는대, 집에 못 간대 같은 얘기를 하는 거다. 그런 소문들이 뻥튀기가 된 거지.
-당시 담당했던 영화 중 지금 제작을 하는 데 교훈이 됐던 작품이 뭔가.
=배급을 하면서 느낀 것 중 하나는, 영화는 변화무쌍하다는 것이다. <범죄의 재구성>(2004)과 <늑대의 유혹>(2004)은 ‘이 영화는 이래서 안 돼’, ‘저 영화는 저래서 안 돼’ 같은 선입견을 깨준 작품이었다. <범죄의 재구성>이 나왔을 때 나이 드신 분들이 이 영화의 문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셨다. 그걸 보면서 관객층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늑대의 유혹>은 티켓 파워로 꼽을 수 있는 열혈 (강동원)팬층이 극장으로 유입된 영화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반대로 오만해서 좋은 교훈이 됐던 작품도 있었나.
=<효자동 이발사>(2004)는 500만명을 불러모을 줄 알았다. 이거 가지고 오려고 <고독이 몸부림칠 때>(2003)와 <마지막 늑대>(2004)를 패키지로 묶어 계약했다. 다 손해봤다. (웃음) <태극기 휘날리며>(2004) 할 때는 극장이 영화를 달라고 요청해와서 재미있었고. 그때는 배급사가 힘이 셀 때라 극장과 힘겨루기가 가능했다. 지금은 극장 산업이 메이저 멀티플렉스를 중심으로 질서가 재편돼 극장이 안 걸어주면 할 수 있는 게 없다.
-쇼박스는 왜 그만뒀나.
=3년을 일하니 못하겠더라. 관객수가 오르락내리락할 때마다 감정 기복도 컸고. 2005년에 그만뒀다.
-중소 규모의 영화시장이 중요하다고 인식하게 된 건 언제인가.
=2006년 MK픽쳐스가 중국에서 멀티플렉스 극장 사업을 하기 위해 현지 합자회사 베이징동방명강영원관리유한공사를 설립했다. 그때 부총경리를 맡았다가 영화 제작을 하고 싶어 한국으로 돌아왔다. 당시 강기명 대표와 함께 영화사 구안에서 예술영화를 수입•배급했다. 쇼박스에서 와이드 릴리즈 영화를 했을 때 ‘작은 영화 다 비켜라’라고 했는데, 작은 영화를 해보니 인식에 변화가 생기게 됐다. 중소 규모의 영화시장이 탄탄해지면 감독도, 제작사도, 소재도, 주제도 더욱 다양해질 수 있겠다 싶었다.
-CGV무비꼴라쥬(CGV아트하우스 전신) 한국영화사업 팀장을 맡았던 것도 중소 규모의 영화시장을 구축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나.
=그렇다. 당시 강기명 무비꼴라쥬 팀장이 “CGV가 중소 규모의 영화를 투자•배급할 건데, 그걸 해줬으면 좋겠다”고 요청해와서 쇼박스 한국영화팀에 있던 김이정 이사를 꾀어서 데리고 갔다. 영화는 이야기에 맞게 적정한 규모의 돈을 써서 적정한 규모의 배급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CGV아트하우스에서 중소 규모의 영화시장을 탄탄하게 만들고 싶었다. <무뢰한>(2014) 투자까지 마무리짓고 나왔다.
-김이정 이사와 함께 제작사 OAL을 차렸을 때 주변에서 반대를 많이 했다고 들었다.
=영화사가 다 망하고 있는데 너희가 와서 뭘 할 거야 그러고. 그런 얘기에 신경 안 쓰는 성격이라….
-OAL에서 첫 투자한 작품이 <또 하나의 약속>(2013)이었다. 만만치 않은 작품이었다.
=마케팅 전략을 눈물나는 아버지의 약속 이야기로 밀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한 이슈가 터지면서 관심이 사회운동쪽으로 옮겨갔다(개봉 당시 스크린 확보가 어려워지면서 삼성의 외압설이 나온 바 있다.-편집자). 사실 <또 하나의 가족>에서 <또 하나의 약속>으로 제목을 바꾼 것도 특정 회사가 언급되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그저 이 영화가 많은 상영관에서 상영돼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얻은 뒤 자연스럽게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영화를 투자•배급하기로 한 것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 들었던 얘기 중 가장 화가 났던 건 ‘그런 일이 벌어질 줄 몰랐어?’와 ‘야, 사회적인 이슈가 되면서 50만명이나 불러모을 수 있었어’였다. 애초의 마케팅 전략대로 갔고, 평소처럼 상업영화로 개봉했더라면 더 좋은 성적이 나왔을 거라고 장담한다.
-어려운 배급 상황에서도 투자자들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았다.
=그렇게 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유명한 배우가 나오진 않지만 영화의 힘만으로도 흥행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고, 작은 영화 시장에 활력을 주는 영화가 되고 싶었다. 돈만 벌려고 했다면 손익분기점을 넘었을 때 ‘돈 벌었다’ 하고 손을 탁탁 털고 일어났을 텐데… 눈물나는 드라마는 왜 흥행하면 안 되나. 그래서 <또 하나의 약속>은 무척 아쉽다. 어쨌거나 그 영화를 하고 난 뒤 1년 동안 김이정 이사와 아무것도 못했다. 상처도 많이 받았고, 후유증도 그만큼 컸다. 김이정 이사는 ‘언니니까 50만명이나 불러모은 거야’라고 위로해줬지만, 영화를 그만둘까 생각도 했었다.
-대기업의 우산 아래에서 일을 하다가 직접 제작사를 차려보니 어떤가.
=어느 제작자나 하고 있는 고민을 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함께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일을 잘할 수 있을까. 중국을 오가는 목적도 그 길을 찾기 위한 것이다. 제작자로서 새로운 영화를 만들고 싶다. 안전한 영화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 있지만, 그걸 깨서 재미있는 콘텐츠를 내놓고 싶다.
-회사 규모가 커진 것 같다.
=최근 여기저기서 웹드라마 제작 제안을 받으면서 사람을 좀 뽑았다. 극장은 이미 재편됐다. 건드릴 수 없는 질서라고 생각한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관객도 많지만, 최근 모바일로 웹드라마나 영상 콘텐츠를 보는 ‘엄지족’이 늘었다. 엄지족이 영화를 볼 수 있는 플랫폼이 네이버 말고는 거의 없다. 한국에도 넷플릭스 같은 플랫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극장이 아닌 새로운 플랫폼에 관심이 많다.
-다음 라인업은 뭔가.
=가제인데 스릴러영화 <소환의 밤>과 양영순 작가의 동명 만화가 원작인 <란의 공식>. <로얄 패밀리>와 웹드라마 <메이크 오버>도 있다.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