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홍진 감독 영화에 으레 나오는, 향해야 할 방향이 어딘지도 모른 채 엉뚱한 자취만 좇게 되는주인공으로 이번엔 곽도원이 낙점됐다. <곡성>에서 곽도원이 연기한 종구는 딸을 둔 아버지이자 시골 마을의 나태한 경찰이다. 그 동네에서 유독 어리바리한 인물이기도 하다. 마치 여행의 가이드처럼 곽도원은 알 수 없는 사건 속으로 슬금슬금 관객을 이끈다. 숱한 소문과 예상으로 뒤범벅된 <곡성>이 드디어 공개됐다. <곡성>을 보고 나면 유독 귓가에 남는 소리가 있을 것이다. 종구의 한숨 소리다. 실제로도 곽도원은 자주 한숨을 푹푹 쉬었다. 차마 다 말하지 못한 감정과 기억이 여전하기 때문이리라 짐작하며 그때 그 마을에서 겪은 일들에 관해 곽도원에게 물었다.
-<곡성>으로 올해 칸국제영화제 레드카펫을 밟게 됐다.
=의외로 별 기대를 안 하고 있다. 경험해본 적이 없거든. (웃음) 외신기자들이 날카로운 질문도 잘 던진다던데 어떻게 답변해야 할지 벌써 두렵다.
-전작들이 더 있지만 ‘영화배우 곽도원’을 제대로 소개한 첫 영화가 나홍진 감독의 <황해>(2010)인데 첫 주연작도 나홍진 감독의 영화다.
=날 믿고 또 한번 찾아줘서 기쁘다. 배우라면 다들 그럴 거다. 당연히 부담도 크다. 전엔 조연으로 다른 분들과 호흡을 맞춰가면 됐는데 <곡성>에선 내가 작품을 전반적으로 끌고 가야 하는 역할이다.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스스로 정확하게 알고 있기에 그렇게 해줄 수 있는 거지만, 나홍진 감독은 배우에게 많은 여지를 준다. 방 안에서 어떤 장면을 찍고자 하면 일단 배우에게 공간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을 준다. 방 안을 걸어보고, 보이지 않지만 곧 생겨날 어떤 걸 의심해보고, 이렇게 저렇게 움직이면 되겠다 생각해본 뒤에 감독에게 말하면 감독은 그때부터 방 안에 조명을 깔기 시작한다. 앞뒤 장면으로 무엇을 쓸지, 배우의 연기톤을 어떻게 조절할지 머릿속에 다 그려져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시나리오를 받아보고는 어땠나.
=…아휴. (웃음) 나홍진 감독 영화가 원래 좀 세잖나. 그렇지만 <곡성>은 폭력적인 영화가 절대 아니다. (웃음)
-일단 등급은 15세 이상 관람가다.
=그렇잖아. (웃음) <곡성>을 보고 관객이 두려움을 느낀다면 그것이 일상에서 충분히 일어날 법한 생생함을 담고 있기 때문일 거다. 살면서 물지 말아야 하는 미끼를 덥석 물 때가 있잖나. 있어선 안 되는 일들을 당하게 됐을 때 그 억울함과 두려움을 어떤 방식으로 드러낼 수 있을까. 연기하면서 가장 힘든 부분도 그런 거였다. 실체가 잡히지 않는 두려움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하는 것 말이다. 육체적으로도 무척 고되었지만 정신은 연기를 시작한 후로 가장 맑은 때가 아니었나 싶다.
-몸이 너무 피로하다보면 정신이 또렷해지는 순간이 있잖나.
=그래, 그런 상태다. (웃음) 코너에 몰린 김에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정신과 이성이 애를 썼던 게 아닐까. (웃음)
-종구는 주변으로부터 잘 치이는 소심한 인물인데 영화가 진행될수록 변화가 드라마틱하다. 아버지 역할도 드물었잖나.
=일단 나도, 나홍진 감독도 애가 없어서 아이를 둔 스탭들에게 ‘딸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할 것 같냐’고 물어보고 다녔다. 다들 선뜻 대답은 못하고 ‘야… 글쎄다. 하아…’ 정도의 반응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그게 답이었다. 그 막연한 눈빛과 한숨에 종구의 모든 게 있었다.
-악역만 연기해온 것은 아니지만 순진하고 선한 인물인 경우도 많지 않았는데 종구는 누군가에게 쩔쩔매거나 무력해지는 순간이 많다.
=시골 마을의 나른한 일상에 익숙한 사람이어야 하니까 한달쯤 곡성에 가서 지내다 왔는데 거긴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지내는 동안 동네 분들과 친해지고 사투리도 연습하면서 지냈다. 무엇보다, 선한 연기를 하려면 마음을 선하게 가져야 한다. <곡성> 촬영 초반이 <변호인>(2013)을 찍은 직후였는데 나홍진 감독이 내 눈을 가만 보더니 “아직 <변호인>에서 못 나오신 것 같다. 눈이 무섭고 날카롭다. 그 눈은 쓰지 말아달라”고 하더라. 안 착한데 착한 연기를 하려니 더 힘들었던 건가. (웃음)
-인물의 기운이 팽팽하게 맞서는 영화다. 구니무라 준, 황정민 등 관록 있는 배우들과 부딪치는 가운데 균형을 잘 잡아야 했을 텐데.
=연기 잘하는 배우랑 하면 오히려 편하다. 내가 분위기를 만들어줄 필요 없이 반응만 하면 된다. <곡성> 크랭크인하고 한달쯤 뒤부터가 (황)정민이 형 촬영이었는데 형 없는 초반 한달이 너무 힘들었다. 형이 합류한 뒤의 기분? 아픈 부모를 모시는 집의 막내로서 근근이 집안을 꾸려가는데 서울에서 일하는 큰형이 선물을 잔뜩 사들고 돌아와서는 ‘그간 고생했다. 이젠 내가 집안을 이끄마’라고 말하는 것 같더라. (웃음)
-일본인 배우인 구니무라 준과는 어땠나. 외국인 배우와 연기하는 것도 처음이다.
=할 말이 뭐 있겠나. 참… ‘고급진’ 연기를 하셨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은데 카메라 앞에서의 존재감이 엄청났다. 그 어른은 호흡부터가 다르더라. 대퇴부가 좋지 않아서 평소 걸음이 불편하신데 카메라만 돌아가면 그 험한 산길을 어찌 그렇게 빠르게 뛰시는지 모르겠다. 하도 육체적으로 힘든 연기를 하시니까 매일 근육이 경직되고 통증이 있었다고 했다. 촬영 마칠 때마다 아미노산을 30알씩 드시면서 나까지 늘 챙겨주시더라. 카메라 밖에선 참 자상하셨는데 “배우는 늘 착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조언해주신 게 기억난다.
-현장에 놓인 동물 사체나 벌레 등 여러 소품이 대부분 진짜였다고 들었다. 어떻게 버틴 건가.
=미술팀과 소품팀의 노고에 대단히 감사드린다. (웃음) 그 역겨운 것들을 모두 리얼하게 마련해주셨다. 썩은 내가 아주…. 아휴…. 죽은 닭을 사다가 방 안에 방치해둔다든가…. 덕분에 나는 반응만 하면 되었다. 외지인(구니무라 준)의 집에 찾아간 종구가 방문을 열어보고는 “이런, 씨벌놈…” 하고 뇌까리잖나. 그거 연기 아니다. (웃음) 그렇지만 그런 현장에 대해 엄살을 떨 일이 아니다. 장난처럼 말했지만 실은 배우로서 최상으로 연기할 환경을 만들어준 걸 겸허히 받아들이고 고마워하고 있다.
-평소 다른 배우의 연기를 꼼꼼하게 보는 걸로 안다. <타짜>(2006)의 김윤석이 신발을 끌며 연기하는 걸 보고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2011)의 조 검사를 만들어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종구 연기에 참고한 다른 것도 있을까.
=직업병이다. (웃음) 저절로 다른 사람을 관찰하게 된다. 처음 들어간 극단에 있던 형이 해준 말이 있다. “하루에 네가 한 가지씩을 배우면 일년이면 365개, 십년이면 3650개의 기술을 갖게 된다”는 말이었다. <타짜>에서 김윤석 형님이 무덤에 꽃을 던지고 흙을 뿌리고 걸어나오는데 뒷굽을 끌며 보폭을 작게 해 빠르게 걷는 걸음에서 굉장한 포스가 느껴졌다. 그걸 조 검사한테 썼다. 평소에도 배우들끼린 “내가 너 그러는 거 언제 한번 (연기할 때) 쓴다?”란 말을 습관처럼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가족이 다같이 염하는 걸 봤다. 모두 울고 있는데 그 와중에 ‘부모가 돌아가시면 실제로 사람이 이 정도로 우는구나’, 이 따위 생각을 나도 울면서 하고 있더라. (웃음) 이번에 종구는 그러지 못했다. 그런 ‘기술’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인물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 속 곽도원을 생각하면 표정과 음성에서 자연스레 ‘세다’는 느낌부터 떠올린다. 어릴 때 수줍은 성격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인데 그런 점에서 <곡성>에서의 변화가 흥미롭다.
=처음 이미지가 참 중요한 것 같다. 오디션 보러 가서 ‘나 이거 하고 싶다’고 편하게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잖나. 역할을 받는 대로 연기하다보니 그렇게 되는 거지. <황해>에서 교수로 나오니까 다음엔 공무원을 하게 되고, 양복 입은 회사원 연기를 하게 되고 그렇게 이미지가 굳어갔다. 썩어도 준치라잖나. 자꾸 하다보면 중간은 하게 되는 것 같다. (웃음) 물론 그러면서도 다른 역할을 해보려고 많이 노력한다. 전엔 여름만 되면 1인용 텐트를 들고 전국 무전여행을 다녔다. 동서울터미널에 가서 제일 처음 오는 버스를 타고 아무 데서나 내려서 무작정 다니다가 텐트 칠 만한 데가 나오면 텐트 치고 자고. 여름만 되면 그 짓을 했다. 거지꼴로 한달이고 두달이고 살고. 그렇게 사는 게 참 좋았는데 요샌 그러지를 못하겠더라. 연기도 늘 도전해야 하는 것 같다. 배우가 마냥 계산적으로 굴면 안 되는데 그 조율이 참 힘들다. 겸손하고 섬세하게 오래가고 싶다.
-차기작으로 <아수라>(감독 김성수)와 <특별시민>(감독 박인제)이 기다리고 있다.
=<특별시민>은 한창 촬영 중이다. 지금 모든 관심이 거기 가 있다. <아수라>는… 검사 역할을 또 한다는 데 부담이 조금 있었다. 정민이 형에게 조언을 구했더니 “내가 깡패 역할을 많이 해봤는데 같은 깡패여도 다른 시나리오, 다른 시대배경, 다른 배우들과 연기를 하는 거니까 틀림없이 다른 깡패가 나올 거란 믿음이 있다”고 말해주셨다. 그 말에 용기를 얻었고 역할의 직함에 매이지 않기로 했다. ‘김차인’ 검사이지 김차인 ‘검사’인 게 아니니까. (웃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