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씨네인터뷰] “만들고 칠하고 덧입혀 구현한 홍길동 월드” -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 장근영 미술감독
2016-05-18
글 : 이예지
사진 : 오계옥

새로운 비주얼 감각을 선보인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이하 <탐정 홍길동>)에서 가장 중요했던 건 아마 모호한 시공간 위에 가상의 ‘홍길동 월드’를 지어내는 일이었으리라. 영화의 프로덕션 디자인을 맡아 그를 설계한 장본인은 장근영 미술감독이다. 당시로선 파격적인 장르물이었던 <화산고>(2001) 미술감독으로 데뷔한 그는 <지구를 지켜라!>(2003)로 제23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기술상을 수상했으며, <아라한 장풍대작전>(2004), <중천>(2006) 등의 장르영화들로 뚜렷한 색깔의 필모그래피를 채워나갔다. 그런 그가 약 10년의 공백기를 가진 후, 2016년 <탐정 홍길동>의 미술감독으로 돌아왔다. “늘 해보지 않은 것에 도전하고 싶고, 새로움을 표현하는 데 두려움이 없다”는 그는 과감한 표현으로 조성희 감독의 세계관을 구현해냈다. 여기엔 스크린에는 보이지 않는 노력이 따랐다. 5천권의 책을 커피물에 적시고, 건물벽을 잘 부서지게 하기 위해 목재조각들은 일일이 모자이크했다. 화려한 CG들의 이면엔 그가 설계한 골격과 손때 묻은 수작업들이 자리했던 셈이다. 이어서 <탐정 홍길동>과 정반대의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아수라>의 미술감독도 맡은 장근영 감독의 귀환을 반기며, 이번 작업의 비하인드와 근황을 물었다.

-<탐정 홍길동>은 조성희 감독만의 인장이 강하게 찍힌 영화다. 가상의 공간을 설계하는 프로덕션 디자인이 중요한 영화일 텐데, 제안을 받았을 때 어땠나.

=<늑대소년>(2012)을 봤을 때, 한국에 새로운 스타일의 영화가 나왔다 싶어 반가웠다. 젊은 신인감독이 한국에서 쉽게 시도될 수 없었던 소재를 새롭게 풀었더라. 조성희 감독과 함께 작업해보고 싶다고 생각하던 차에 마침 제안이 왔다. 조성희 감독이 차기작에선 더 과감하고 새로운 걸 시도해보고 싶다며 내가 잘 어울릴 것 같다고 하더라. 아마 전작들의 장르색을 참고했겠지. 적임자를 만난 셈이다. (웃음)

-조성희 감독과의 커뮤니케이션은 잘됐나.

=조성희 감독은 이번엔 <늑대소년>보다 한발 더 나아가, 본격적이고 새로운 장르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고 했다. 그가 레퍼런스로 삼은 건 1950~60년대 흑백 누아르영화들이다. 필름누아르는 빛과 어둠이 강하고 이분법적으로 나뉘어져 있고 빛의 그림자가 인물의 심리를 반영하는 표현주의 영화다. 내 성향과 딱 맞는 작품이었다. 난 홍익대학교에서 조소를 전공했는데, 조성희 감독 역시 미술을 전공했기 때문에 서로 이해가 빠르고 소통이 잘되더라. 그는 열려 있는 사람이고, 새로움을 추구해나가는 데 거침이 없었다. 내가 과감한 컨셉을 제안하면 조 감독은 더 세게 얘기하는데, 정말 신났다. (웃음)

-한국의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지만 도시엔 마천루가 즐비하고, 명월리는 동화 속 마을 같다. 이런 판타지적 시공간을 어떻게 표현하려 했는가.

=가상의 공간이라 생각하고 접근했다. <탐정 홍길동>은 고전 <홍길동>을 재해석한 누아르영화로, 현실적 관점에서는 이질적으로 보일지라도 관객이 조성희 감독이 창조해낸 홍길동 월드에 들어간다면, 영화 안의 세계를 즐길 수 있을 거다. 그러기 위해선 많은 걸 새로이 창조해야 했는데, 내가 미술감독으로 데뷔했던 <화산고>와 작업방식이 비슷해 신인으로 돌아간 마음으로 임했다. <화산고>는 국내 최초로 100% 디지털 색보정 작업을 시도한 영화로, 필름으로 찍은 걸 디지털 스캔을 받아 거의 모든 배경을 CG로 합성했고 색보정을 한 뒤 다시 필름으로 인버팅해서 상영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상에서만 존재하는 가상의 공간을 만든다는 면에서 <탐정 홍길동>과 비슷한 면이 있다. 물론 15년 전 필름 시대보다는 지금이 훨씬 진보했지만. (웃음)

-필름누아르와 판타지가 기묘하게 뒤섞인 장르적 색채를 구현하기 위해 미술적으로 어떻게 접근했나.

=표현주의는 캐릭터의 감정을 극대화해 공간에 반영하는 것이다. 악인과 선인의 공간의 색채와 소재에 대비를 주는 방식으로 공간을 디자인했다. 이렇게 세운 골격 외에 또 중요했던 건 하늘과 스모그다. 조성희 감독이 하늘을 다 만들고 싶다더라. 미술팀과 연출팀이 머리를 맞대고 신마다 그 신의 무드와 인물의 감정선을 반영한 하늘을 구상했다. 하늘에 대한 레퍼런스를 찾아 신마다 먹구름이 어두운 하늘, 뭉게구름이 낀 하늘 등을 설정했다. 그린매트를 치고 촬영했고, 후반작업을 할 때 원경과 하늘을 CG로 재탄생시켰다. 또 하나, 현장에서 제일 중요한 말은 “스모그!”였다. 실외든 실내든 스모그를 짙게 뿌리고 조명은 콘트라스트를 강렬하게 줘, 만들어진 미술 위에 깊이감을 만들었다. 실외에서 스모그를 뿌리면 매번 바람에 날아가 정말 쉬운 일이 아닌데. (웃음) 예전 필름누아르를 찍던 방식 그대로 했다.

-선과 악, 각 캐릭터를 반영한 공간은 어떻게 구현했나.

=공간이 캐릭터를 설명해줄 수 있어야 한다는 목표로 디자인했다. 초반부 길동(이제훈)이 극적으로 등장하는 하수도 기계실은 길동 내면의 공허함을 반영한 공간으로, 건조한 시멘트 공간에 책상만 딸랑 하나 놨다. 그리고 천장을 낮게 짓고 철골 구조물이 위에서 짓누르는 형상을 만들어 과거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길동 내면의 억눌린 중압감을 표현했다. 선과 악의 대비는 쉬웠다. 동이 집은 누추해도 예뻐야 하는 동화적인 집이었고, 허허벌판에 자리한 보성장과 태광정비소는 서부영화에 나오는 여관이나 무협영화의 주막처럼 쉬어가는 곳으로 설정해 따듯한 색으로 표현했다. 반면 악인의 장소는 블루톤으로 표현했다. 강성일(김성균)의 아파트는 굵직한 직선 대들보를 배치해 강하고 냉정한 강성일 캐릭터를 반영했다. 광은회의 공간인 송전탑은 악마적 형상으로 표현했고, 11자형 건물은 무너진 바벨탑 같은 이미지로 만들었다. 건물의 지하실은 욕망이 들끓는 느낌을 주기 위해 번들거리는 검은 유광으로 처리했다. 표현주의가 가장 강하게 반영된 공간들이다.

-CG가 적극적으로 활용된 영화인데, 어디까지가 미술의 영역이고 어디까지가 CG의 몫이었나.

=사실 <탐정 홍길동>이 CG에만 의존한 건 아니다. (웃음) 촬영, 조명, 미술, 세트가 만들어놓은 골격과 디테일, 질감이라는 베이스에, 후반작업 과정에서 CG를 입혀 완성도를 높였다. 영화에 약 35개의 공간이 나오는데, 이중 29개가 직접 지은 세트다. 이천에 있는 무대마당 스튜디오에 A세트, B세트를 지었고 오픈세트까지 지어 85% 정도가 세트 분량이다. 태광정비소는 무려 500평짜리 세트고, 말순이 폐가로 뛰어가는 장면의 오픈부지는 1천평에 달하는데 일일이 풀을 심었다. 예산의 한계로 모든 건물을 다 짓지는 못했고, 4층 목조건물인 보성장은 1층만, 3단짜리 건물인 폐가는 하단부 5m만 짓고 나머지는 CG로 보강하는 방식이었다.

-모든 세트와 소품에 일일이 색을 칠했다는 얘길 들었다. 이렇게 수작업을 고집한 이유가 있나.

=단순히 색을 칠한 게 아니라 질감과 디테일을 사실적으로 만들어내는 ‘작화’에 주력했다. 하수구 기계실은 목재에 녹슨 철제의 질감이 나게 작화를 한 것이다. 책방에는 책만 5천권 이상 쌓았는데, 조명을 강하게 쳤더니 책의 흰 옆면이 하얗게 날아가 보이더라. 우리가 원하는 건 톤다운된 색이었기 때문에, 진한 커피물을 전부 발라버렸다. 온통 커피향으로 진동했지. (웃음) <탐정 홍길동> 다녀온 소품은 딴 데서 못 쓴다고 소품팀이 난감해했지만, 잘 협조해줬다. 마지막 총격전이 벌어지는 유선장은 건물의 벽면이 한번에 부서지게 하기 위해, 발사목이라는 쉽게 부서지는 나무를 쪼개 모자이크하듯 짜깁기해서 만들었다. 3박4일 동안 철야 작업한 결과다. (웃음) 모든 영화들이 일부 소품을 칠하지만, 대부분은 적절한 소품들을 가져다 세팅한다. 그런데 우리는 모든 걸 직접 칠하거나 만들어버렸다. 전에 없던 새로운 걸 보여주고 싶더라. CG가 적극적으로 사용된 영화지만, 그 밑바탕엔 이런 수작업의 노력들이 깔려 있었다. (웃음)

-전작들도 <화산고> 등 장르적인 색채가 강한 영화들이 많다. 장르영화를 좋아하나.

=영화는 다 좋아한다. 작업할 때 장르를 가리진 않는데 어쩌다보니 그런 경향성이 생겼다. (웃음) 그래도 돌이켜보면, 어릴 때부터 <미래소년 코난>과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천공의 섬 라퓨타> 등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초기작들, <스타워즈> 시리즈에 열광했다. 테리 길리엄 감독의 파격적인 SF <브라질>도 좋아한다. 어린 시절부터 좋아해온 영화와 애니메이션들이 나의 작업에 좋은 양분이 된 것 같다. 난 항상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싶고, 기존에 없는 것들을 표현하는 데 두려움보다는 기대감이 크다. <지구를 지켜라!>는 미술과 의상까지 맡아서 했는데, 외계인을 표현하는 작업이 너무나 재미있더라. 장준환 감독이 원했던 컬트적이고 괴짜 같은 느낌을 살리는 것도 즐거웠다. 그 인연으로 옴니버스영화 <카멜리아>(2010)에 포함된, 가까운 미래의 부산을 배경으로 삼은 장준환 감독의 SF로맨스 중편영화 <러브 포 세일>도 작업했다. <아라한 장풍대작전>의 류승완 감독 역시 내가 제안하는 미술을 전폭적으로 지원해줘서 과감한 표현에 어려움이 없었다.

-언제부터 영화 미술에 관심을 갖고 시작하게 됐나.

=학생 때부터 영상에 관심이 많았다. 2004년에 제대하고, ‘무대와 영상’이란 미술 회사에 들어가 1년간 CF와 뮤직비디오 등의 작업을 거치며 영화의 미술감독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처음 영화 작업을 했던 건 <은행나무 침대>(1996)에 소품으로 참여해 은행나무 침대를 제작한 것이다.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1999)에는 세트로 참여해 특수분장 회사 메이지의 신재호 대표와 함께 세트와 미니어처를 작업했고, <화산고>를 통해 미술감독으로 데뷔했다. 당시로선 파격적으로 CG가 동원된 판타지영화였지만, CF 등에서 CG 합성, 특수효과 등의 경험으로 단련된 상태였기 때문에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데뷔 후 활발하게 활동하다 <마이 뉴 파트너>(2007) 이후 한동안 공백 기간을 가졌다.

=그간 개인적으로 연출 욕심이 있어 시나리오를 썼다.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동화처럼 담아낸 단편 SF애니메이션 <조각난 달>을 제작하고 연출하기도 했다. 그러던 차에 <탐정 홍길동>의 의뢰를 받고 10년 만에 미술감독 본업으로 다시 복귀했다. 정말 재미있게 열심히 했다. (웃음)

-<탐정 홍길동>으로 복귀 직후 <아수라>의 미술도 맡았다.

=10년 전부터 김성수 감독과 작품을 하자는 얘기를 했다. 당시 김 감독님이 <무사>(2001) 등 영화를 활발히 하던 시기인데, 비슷한 시기에 나온 <화산고> <지구를 지켜라!>의 미술을 인상 깊게 보고 같이 작업하자고 연락을 주셨다. <각시탈> <외팔이 검객> 등 여러 작품에서 프리 프로덕션 작업까진 같이 했는데 안타깝게도 프로덕션까지 가지 못했다. 1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난 지금에야 함께하자는 약속이 지켜진 셈이다. (웃음) <아수라>는 끝없이 싸워야 하는 세상 속 얽히고설킨 인간 군상의 모습을 한국적인 정서 속에 담아내는 하드보일드 드라마다. 이야기 자체가 리얼하게 느껴져야 해서 사실적인 미술이 중요했다. 드라마와 인물들의 갈등이 중점이었고, 절대 미술이 두드러져서는 안 됐기 때문에 현실에 녹아들 수 있는 프로덕션 디자인을 했다. <탐정 홍길동>과는 미술적으로 정반대에 있는 영화인 셈이다.

-김성수, 장준환, 류승완 감독부터 조성희 감독까지 다양한 세대를 아우르는 감독들과 작업했다.

=영화 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건, 감독이 원하는 것을 제대로 표현해주는 것이다. 미술감독은 시나리오를 정확히 이해하고 감독과 긴밀히 소통하며 레퍼런스, 스케치 등을 통해 그가 원하는 그림을 구현시키고, 현장 촬영 때까지 의사소통을 해야 한다. 감독의 성향에 따라 경우가 달라 항상 새로운 마음으로 노력하는 게 중요하다. 감독과의 소통과 호흡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기기 때문에 여러 세대 감독과의 작업이 가능한 게 아닐까. (웃음)

-앞으로 또 도전해보고 싶은 영화 미술이 있나.

=한국에서 본격적인 SF나 판타지 장르가 만들어진다면 정말 도전해보고 싶다. 하지만 나는 영화를 사랑하기 때문에 의뢰를 받으면 장르 불문하고 무엇이든 성심성의껏한다. (웃음) 한국 영화산업에서 기술 인력들이 나이가 들면 빨리 물갈이가 되는 게 아쉬울 뿐이다. 할 수 있는 한 영화 미술을 계속하고 싶다. 찾아주는 사람이 없어 나중에 은퇴하면, SF 대서사 웹툰을 그리고 싶다. 하지만 당분간은 그릴 일이 없길 바란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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