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망가졌던 <엑스맨> 시리즈는 브라이언 싱어의 손을 거쳐 부활했다. 브라이언 싱어는 시간여행을 통해 기존의 시리즈를 완전히 뒤엎고 새로운 얼굴, 새로운 뮤턴트들로 팬들을 열광시켰다. 이제 찰스 자비에 하면 패트릭 스튜어트와 제임스 맥어보이, 매그니토라고 하면 이언 매켈런과 마이클 파스빈더의 얼굴이 동시에 떠오른다. 2011년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로 시작을 알렸던 프리퀄 3부작의 최종작이 드디어 공개를 앞두고 있다. 규모를 키웠다는 말에 오리지널 3부작의 엔딩 <엑스맨: 최후의 전쟁>(2006)을 떠올리며 걱정하는 팬들도 있다. 먼저 공개된 북미 평단의 반응이 기대보다 못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누가 뭐라 해도 브라이언 싱어가 아닌가. 일단 보고 판단할 문제다. 이에 앞서 <엑스맨: 아포칼립스>의 이모저모를 먼저 짚어보자. 기대도 걱정도 그 후의 문제다.
최강의 적, 최강의 뮤턴트 아포칼립스
태초에 그가 있었다. 아포칼립스는 최초이자 최강의 돌연변이다. 5천년 전 고대 이집트에서 태어난 ‘엔 사바 누르’는 미지의 존재들(원작에서는 외계종족 셀레스티얼)에게 힘을 받아 최초의 뮤턴트로 거듭난다. 강력한 능력을 과시하며 신으로 추앙받던 그는 문명사회를 건설해 인류의 야만성을 없애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긴다. 긴 잠을 자고 깨어남을 반복하며 그때마다 파괴를 통해 인류를 새로운 곳으로 이끌려 하는 그가 처음으로 일으킨 ‘아포칼립토’는 기원전 3100년 이집트 첫 번째 왕조. 아카바 클랜이라는 충성스런 추종자 집단을 선발해 강자만이 살아남은 세상을 만들었다. 이후 기원전 1900년 소돔과 고모라, 1450년 미노스 문명의 멸망, 1200년 미케네 문명의 멸망, 1070년 이집트 문명의 붕괴, 서기 64년 로마대화재, 79년 폼페이 화산 폭발, 서기 800년 마야 문명 멸망이 모두 그와 아카바 클랜의 작품이라는 설명. 1980년에 깨어난 아포칼립스는 인류의 모습에 다시 한번 실망하고 멸망의 칼날을 휘두르고자 하고, 엑스맨이 여기에 대항한다. 오랜 세월 신으로 살아온 아포칼립스는 그저 수사적인 의미가 아니라 모두 힘을 합쳐야 겨우 저항할 수 있는, 말 그대로 최강의 적이다. 팬들 사이에선 (인기 있는 끝판왕이라는 의미에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의 타노스와도 비견되는 존재로, 강력한 힘과 텔레파시, 사이킥 능력, 자신의 몸을 분자 단위로 조정해 거대화할 수도 있다. 다른 뮤턴트의 힘을 빼앗거나 강화시킬 수도 있다. 파괴를 통해 세상을 정화하는 지고의 존재는 인류가 살아남을 가치가 있는지 엑스맨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인사이드 르윈> <엑스 마키나>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에 출연한 연기파 배우 오스카 아이삭이 배역을 맡아 한층 신뢰를 더한다.
묵시록의 네 기사들
아포칼립스는 본인의 힘도 강력하지만 종말을 몰고 온다는 묵시록의 네 기사를 대동하고 나타난다. 단순히 묵시록을 흉내낸 것이 아니라 묵시록이 그를 묘사한 것이라는 추측에 걸맞게 아포칼립스는 뮤턴트의 능력을 증폭시켜 네명의 기사로 만든다. 정복의 백기사는 사이킥 에너지를 두른 칼로 물체를 절단하는 샤일록이다. 원작에서부터 인기 캐릭터로 <엑스맨: 최후의 전쟁>에 짧게 등장하기도 했다. 최대한 원작에 가까운 비주얼로 등장할, 팬들을 위한 선물 같은 캐릭터로 올리비아 문이 캐스팅됐다. 전쟁의 적기사는 <엑스맨> 시리즈의 영원한 악역 매그니토다.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2014) 이후 홀연히 사라졌던 그가 뮤턴트들이 인정받은 평화로운 시대에 왜 다시 아포칼립스의 수하가 되어 돌아왔는지가 관전 포인트 중 하나다. 기근의 흑기사는 <엑스맨> 시리즈 최고 인기 캐릭터 중 하나인 스톰이다. 엑스맨 원년 멤버이기도 한 스톰이 적으로 등장할 수 있는 건 엑스맨 결성 이전인 1983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꾸준히 스톰 역을 맡아온 할리 베리 대신 신예 알렉산드라 십이 젊은 시절 스톰을 연기한다. 마지막으로 죽음의 청기사는 <엑스맨: 최후의 전쟁>에도 나왔던 엔젤이다. 사실 <엑스맨: 최후의 전쟁>에서 나온 엔젤과는 전혀 다른 존재로 브라이언 싱어가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를 통해 시간과 역사를 뒤바꿔놓았기 때문에 출연이 가능했다. 격투 중 날개를 잃고 상심한 엔젤에게 아포칼립스가 자신의 권능으로 기계 몸과 강철 날개를 부여해 한층 강력해진 존재로 등장한다.
익숙하고도 새로운 엑스맨들
거대해진 적에 걸맞게 엑스맨 진영도 한층 강화됐다. 엑스맨 결성 이전 주요 멤버들의 젊은 시절을 만날 수 있는 이번 영화에서는 기존에 익숙한 캐릭터들의 새로운 모습을 접할 수 있다. 엑스맨의 리더 사이클롭스는 코믹스에 비해 그동안 영화에서는 비중이 크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얼마나 활약할지 기대를 모은다. 할리우드의 주목받는 아역배우 타이 셰리던이 어느덧 훈훈한 청년이 되어 새로운 사이클롭스를 선보인다. 진 그레이는 오리지널 <엑스맨> 시리즈의 핵심을 담당했던 캐릭터로 원작에서는 이후 초월적인 존재인 피닉스 포스로 거듭난다. 프리퀄 3부작 이후 새로운 <엑스맨> 시리즈가 나온다면 핵심이 될 유력한 캐릭터다. <왕좌의 게임>의 산사 스타크 역으로 국내에도 얼굴을 알린 소피 터너가 캐스팅됐다. <엑스맨2>(2003)에서 백악관에 침입해 대통령 암살 직전까지 갔던 순간이동능력자 나이트 크롤러도 새롭게 태어났다. 브라이언 싱어 감독은 “아직 어린 나이트 크롤러는 2편보다 좀더 생기 넘치고 영적이며 순수한 캐릭터”라고 밝혔다. 이들은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로 인해 바뀐 시간 축에 있는 캐릭터들이기 때문에 먼저 등장했던 오리지널 속 캐릭터들과는 다소 차이가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선보인 퀵실버도 다시 활약한다. 짐 크로스의 명곡 <Time in a Bottle>이 흐르는 전작의 2분짜리 장면은 촬영에만 17일이 걸렸을 정도로 공을 들였는데 이번에도 그것과는 다른, 하지만 확실히 특별한 장면이 있을 거라는 후문이다. 브라이언 싱어에 따르면 유머는 줄고 좀더 복합적인 캐릭터가 될 거라고 한다.
오리지널 3부작과 프리퀄 3부작의 연결고리
1973년 매그니토의 대통령 암살을 막은 이후 돌연변이의 존재는 세상에 알려졌다. 역사의 궤도를 수정하며 오리지널 엑스맨들과는 다른 타임라인 속을 살게 된 1983년의 돌연변이들. 브라이언 싱어 감독은 1980년대가 평화 속에 불안을 표현하기 적절한 시대라고 판단했다고 한다. 찰스는 자비에 영재학교를 운영하며 세상과의 화합을 꿈꾸지만 세상의 어둠을 맛본 레이븐은 여전히 인간을 불신한다. 찰스는 전투를 위한 팀을 꾸릴 생각이 전혀 없지만 레이븐은 다가올 전투를 대비하고 싸우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래에 대한 두 사람의 견해 차이는 <엑스맨> 시리즈가 반복해오던 것이지만 이번에는 공동의 적 아포칼립스의 등장으로 한데 뭉친다. 이번 작품은 시리즈의 출발인 1편으로 다시 이어지는 연결고리이며 엑스맨 결성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확인할 수 있는 프리퀄의 마지막 작품이다. 서로 다른 타임라인상에 있는 두 시리즈(오리지널 3부작과 프리퀄 3부작)를 잇는 여러 장치들이 있지만 이미지적으로 가장 강력한 한방을 고르라면 아무래도 민머리의 찰스 자비에 교수가 아닐까 싶다. 이번 영화에서 드디어 민머리가 된 제임스 맥어보이를 만날 수 있다. 제임스 맥어보이는 처음 찰스 자비에 교수 역에 캐스팅됐을 때 너무 기쁘고 흥분한 나머지 바로 머리를 밀고 촬영장을 찾았다고 한다. “이번 작품(<엑스맨> 1편)에서는 머리가 긴 찰스 자비에를 연기할 것”이라는 브라이언 싱어의 말을 듣고 당황했다는 맥어보이는 이번에야말로 머리를 밀게 된 소감을 묻자 “좋았다! 다음 작품을 위해 기를 필요만 없었다면 계속 머리를 민 상태로 지냈을 것이다”라며 감격을 전했다고.
“규모가 가장 큰 영화”
<엑스맨: 아포칼립스>는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로부터 이어지는 프리퀄 3부작의 최종장이자 엑스맨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진정한 출발로 봐도 좋다. <엑스맨> <엑스맨2>를 연출한 브라이언 싱어가 잠시 하차하고 <엑스맨: 최후의 전쟁>이 시리즈의 문을 닫아야 할 정도로 길을 잃자, 이십세기폭스는 다시금 브라이언 싱어를 긴급 투입했다. 망가진 세계를 살리기 위한 싱어의 선택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1950년 냉전 시기로 돌아가 엑스맨의 탄생, 찰스 자비에와 매그니토의 탄생을 그린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에 이어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에서는 아예 시간여행을 통해 기존의 설정을 스스로 파괴해버릴 수 있는 알리바이를 확보했다. <엑스맨: 아포칼립스>에서는 프리퀄 3부작에서 재조립했던 시간을 정돈해 다시금 2000년 <엑스맨>으로 연결되는 다리를 놓는다. 동시에 프리퀄 3부작을 마무리하는 영화인 만큼 상상할 수 있는 제일 방대한 판을 벌이고, 쏟아부을 수 있는 최대 물량을 투입했다. 제작자 사이먼 킨버그의 말대로 “여러모로 규모가 가장 큰 영화”인 이번 작품에서 아포칼립스와 포 호스맨 진영과 엑스맨 진영이 맞붙는 상황은 인류의 미래를 건 ‘전쟁’이라는 표현이 적절해 보인다. 다만 고민 없는 물량 투입으로 쓴맛을 봤던 <엑스맨: 최후의 전쟁>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는 <엑스맨> 시리즈가 꾸준히 고민해온 주제를 놓치지 않아야 할 필요가 있다.
갈등은 어떻게 풀릴 것인가
<엑스맨>은 전통적으로 차별받는 소수에 대한 이야기를 다뤄왔다. 특별한 능력을 가진 뮤턴트들이 다수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을 때 억압받는 소수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다시 말해 소수자로서의 삶의 방식과 선택이 원작에서부터 반복되어온 화두다. 능력이 자유가 아닌 억압의 원인이 된다는 점에서 기존의 히어로물과 궤를 달리하는 이색적인 시리즈라 할 수 있다. 뮤턴트들은 늘 서로의 차이와 다름에 대해 폭력으로 저항할지, 인내하고 설득할지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왔다. 그래서 <엑스맨> 시리즈는 늘 내부의 전쟁이었다. 뮤턴트 그룹을 이끄는 수장 찰스 자비에와 매그니토가 각각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말콤X를 모티브로 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유명하다. <엑스맨: 아포칼립스>에서는 최초의 뮤턴트 아포칼립스의 등장으로 엑스맨들이 하나로 뭉친다. 얼핏 외부의 적이 내부의 결속력을 다져준 것 같지만 파괴와 정화를 주장하는 아포칼립스의 사상은 인간을 배제하고 뮤턴트 왕국을 만들려는 매그니토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차이가 있다면 <엑스맨: 최후의 전쟁>처럼 소수에 의한 테러에 가깝던 그들의 투쟁이 전쟁 혹은 재해 규모로 확장되었다는 점이다. 전통적인 갈등 구도가 규모를 급속도로 키웠을 때 애초의 질문과 시리즈의 본질이 얼마나 제대로 전달될지 주목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