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희의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이하 <탐정 홍길동>)을 본 사람들이 아무런 주저없이 동의하는 한 가지는 말순이가 귀엽다는 것이다. 영화 재미의 3분의 1, 유머의 절반은 연기가 처음이라는 아역배우 김하나의 캐릭터 말순이에게서 나오는 것 같다. 관객이, 다소 길긴 하지만 긴장감이 그렇게 떨어진다고 할 수 없는 클라이맥스 장면을 실제보다 지루하다고 느낀 이유도 순전히 말순이가 안 나왔기 때문이다. 신 스틸러란 이런 캐릭터를 보고 나온 말이 아닐까.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다
귀여운 어린아이를 데려다놓고 관객의 시선을 끄는 건 손쉬운 일처럼 보인다. 필요한 것은 제대로 된 캐스팅과 연기지도 그리고 캐릭터를 너무 짜증스럽거나 억지스럽지 않게 관리하는 각본이다. 이는 대부분 몰개성적인 영역이다. 적어도 감독과 각본가에게는.
하지만 <탐정 홍길동>에서 말순의 존재는 그렇게 단순해 보이지 않는다. 캐릭터 기능성의 명쾌함을 생각하면 이 단순하지 않음은 더욱 재미있다. 말순과 말순의 언니 동이(노정의)의 기능을 보라. 똑똑하고 예쁘고 조숙한 언니와 아주 예쁘지는 않아도 많이 많이 귀엽고 별난 꼬마의 조합은 흔해빠졌다. 이들이 냉정한 주인공 탐정의 마음을 건드리고 나중에 구조의 대상이 된다는 건 영화를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예측 가능한 길을 가는 캐릭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순은 무언가 다르다. 여기엔 쉽게 언어화할 수 없는 퀄리티가 있다.
이 퀄리티를 잡아내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은 조성희 감독의 중편이고 아마도 아직까지 그의 최고 걸작인 <남매의 집>(2008)과의 연관성을 잡아내는 것이다. 두 작품에는 부인할 수 없는 유사성이 있다. 낯설고 위협적인 어른과 보호자 없이 고립된 두 어린아이. 물론 <남매의 집>이 훨씬 무섭고 전형성에서도 벗어나 있다. 하지만 설정과 분위기의 연결성은 무시할 수가 없다.
<남매의 집>에서 무시무시한 불안감과 폐소공포증을 일으키는 가장 큰 도구는 무엇인가. 그건 바로 영화 전체가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이 영화는 오빠인 철수의 눈높이에 맞추어져 있고 어른 역시 그의 관점에서 재해석된다. <탐정 홍길동>은 비슷한 상황의 반대 방향에서 시작하는 영화이다. 다시 말해 침입한 어른이 주인공이다. 우린 그가 온갖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도 있는 위험한 남자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 어려움 없이 그가 안전한 인물임을 믿는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등급의 영화에서 타이틀롤일 리가 없을 테니까.
이 관점의 역전이 <탐정 홍길동>이라는 영화에 끼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일단 더이상 영화는 호러가 아니다. 우린 홍길등을 두려워하지 않고 아이들에게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걱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두 영화를 어우르는 특유의 무언가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것은 분명한 시간대를 잡아낼 수 없는 시대배경과 폭력적인 이야기를 넘어서는 무언가이다.
이건 결국 눈높이에 대한 것이다. 관점의 방향이 바뀌었지만 <탐정 홍길동>은 조숙한 어린아이의 환상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이 영화의 눈높이는 동이에 맞추는 것이 가장 그럴싸한 것 같다. 그렇다면 영화 속 말순의 개성도 설명이 된다. 말순은 아이가 보는 아이이다. 여전히 지켜주어야 할 어린 동생이지만 어른이 보는 것처럼 완전히 대상화되어 있지 않은 존재이다. 만약 이 영화의 눈높이가 조금만 더 높이 있었다면 말순은 전혀 다른 캐릭터가 되었을 것이고 지금보다 훨씬 ‘귀염둥이’ 역할에 충실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위치에서 말순은 이야기 속에서 스스로 자신의 캐릭터를 끌어갈 힘을 얻는다. 익숙한 틀에서도 신선함을 잃지 않고 단순한 귀염둥이가 아닌 무언가로 남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것은 홍길동의 이야기가 동이가 만들어낸 허구라는 뜻이 아니다. 그렇게 복잡한 레이어가 있는 영화가 아니다. 단지 <남매의 집>에서처럼 시선과 눈높이를 제한할 필요가 없는데도 영화가 이런 순진무구함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이들은 그렇다고 쳐도 왜 홍길동은 이렇게 어린아이 같은가?
캐릭터의 성장은 가능할까?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나온 조성희 영화에서 진짜 어른과 ‘어른의 사정’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이들 중 아이들이 주인공인 영화는 <남매의 집>뿐이지만 다른 영화들도 어른 배우들이 캐릭터를 연기할 뿐 이들의 정신연령은 사춘기를 그렇게 넘어서지 않는다. 여기서 가장 기만적인 영화는 <늑대소년>(2012)이다. 많은 관객은 이 영화를 로맨스로, 그러니까 ‘어른들의 사정’을 다룬 영화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 영화의 송중기 캐릭터는 척 봐도 의인화된 개이고, 영화가 그리는 것도 로맨스가 아니라 소녀와 개의 관계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짐승의 끝>(2010)에서 이민지가 연기하는 미혼모는 임신해서 아기를 가졌다는 것만으로 ‘어른’의 위치에 서지만 정작 하는 행동은 미숙하고 유아적이다. 심지어 그 영화에서는 신(이건 다른 무엇이건)도 유치하다.
홍길동도 마찬가지다. 그는 딱 열살 조금 넘은 아이의 상상 속 산물이다. 엄청난 추리력을 과시하는 명탐정이지만 어른스러움은 찾아볼 수 없다. 늘 기억하지도 못하는 과거에 집착하고 있고 어른임을 증명해줄 어떤 서류도 갖고 있지 않다. 옆에 무려 고아라가 있는데도 두 사람 사이엔 어떤 성적 긴장감도 없다. 어린아이들이 종종 그렇듯, 그의 행동도 극단적이다. 있는 그대로 묘사되었다면 가차 없이 19금을 먹었을 그의 초반 행동과 막판의 대학살은 한국영화의 어른 주인공이 거의 저지르지 않는 일이다. 그가 아이들과 적당히 유치한 선에서 쉽게 소통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몇몇 관객은 이런 아이들과의 교류를 통한 순화가 캐릭터 파괴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정신연령을 고려해보면 이는 그냥 자연스러워 보인다.
‘조성희 월드’는 대부분 미성숙한 아이들의 상상과 경험을 재료로 이루어진다. 이들이 대부분 막연한 과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건 이들이 읽는 책의 배경이 현재인 경우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그리는 과거는 구체적인 현실의 연장이 아니라 장르적 모험의 무대이고 그 모험은 아이들의 악몽에서 끄집어낸 것이거나 장르적 상상의 결과이거나 그 둘의 조합이다.
지금까지 조성희 영화가 가장 성공적으로 관객을 자극했던 감정은 공포였다. 그건 주변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어린아이의 공포였다. <늑대소년>이 선택한 ‘소녀와 개’의 이야기도 강렬했지만, 로맨스의 필터를 통해 영화를 본 관객이 이 감정의 순수성을 얼마나 잡아낼 수 있었는지 의심이 간다. 앞의 영화들에서 수동적이거나 중립적이었던 주인공은 <탐정 홍길동>에서 모험에 대한 판타지를 펼친다. 그리고 적극적인 행동이 대부분 그렇듯 이는 성장을 의미한다. <탐정 홍길동>의 속편들이 궁금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성장한 캐릭터를 끌고 모험의 다음 단계로 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