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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스스로를 비우고 채운 시간” - 양심적 병역거부 수형생활 마친 김경묵 감독
2016-05-26
글 : 정지혜 (객원기자)
사진 : 백종헌

“안녕하세요, 김경묵입니다.” 5월1일, 전주국제영화제를 취재하던 기자에게 반가운 문자가 도착했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언하고 1년2개월간 수형생활을 한 김경묵 감독이었다. 3월30일 가석방됐다는 소식을 듣고 몇 차례 만남을 청했으나 답을 들을 수 없던 차였다. 이후, “독자분들에게, 영화인들에게 인사를 전한다고 생각해주세요”라며 다시 한번 인터뷰를 요청했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걱정도 되지만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다”는 대답을 받고 서울에서 마주 앉았다. 이날의 대화에는 <청계천의 개>(2009), <줄탁동시>(2011), <이것이 우리의 끝이다>(2013)를 통해 자기 안의 고민을 꾸준히 영화로 옮겨온 감독 김경묵에 대한 이야기는 많지 않다. 대신 자신의 양심과 신념에 따라 감옥으로 간 인간 김경묵의 ‘한때’에 대해 들었다. “정리 중, 고민 중이다”라는 얘기를 유독 많이 하던 그의 진행형의 말들 속에서 감독 김경묵의 다음 영화들의 윤곽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해본다.

-인터뷰하자고 스트레스를 준 것 같아 괜스레 미안하다.

=감독으로 새로운 작품을 내고 인터뷰하는 것도 아니다보니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싶더라. 감방에서 보낸 시간을 지금도 계속 정리 중이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도 고민이고. 스스로도 아직 정리가 안 된 말들을 한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전화를 줘, ‘독자분들에게 출소했다는 인사를 한다는 생각으로 만나자’라는 말이 기억에 남았다. 계기가 없으면 계속 이 상태일 것 같았다. 틀 안에 있기보다는 이렇게 나오는 게 좋겠다 싶었다.

-통영 구치소에서 출소하고 제일 먼저 한 일은 뭐였나.

=그곳에서 1년을 지내면서 내내 바깥 풍경이 궁금했다. 접견 오는 사람들마다 풍광이 아름답다고 하기도 했고. 출소하고 사흘 동안 통영에서 여행을 했다. 그러면서 구치소도 다시 한번 찾아가봤다. 그때 많이 놀랐다. 내가 있던 구치소가 바다가 보이는 곳에 둘러싸여 있었고 주변에 벚꽃까지 만개했더라. 엄청난 괴리감이 전해져왔다.

-이번 전주국제영화제에도 다녀왔다.

=감방에 있을 때 정말, 영화가 보고 싶었다. 나가면 무조건 전주에 갈 생각이었다. 근데 막상 가려니까 엄두가 안 나더라. 그때 김희정 감독님이 연락을 해오셔서 ‘페스티발 메이트’로 같이 가면 내가 덜 방황할 것 같아 가겠다고 했다. 가니까, 정말 좋았다. (웃음) 사흘간 머물며 영화도 9편 정도 봤다. 감방에서도 주말이면 영화를 보여주는데 대부분 가족관계의 회복을 주제로 한 교화용 영화들이다. 영화제에서 영화를 보다보니, ‘아, 내가 한때 좋아했던 영화들이 이런 거였지?’ 싶었다. ‘한국독립영화의 밤’ 행사에 가서 사람들도 만나고. 사람을 만날 준비가 안 돼 있다고 생각했는데 준비할 필요도 없이 이렇게 만나면 되는 거였다.

-2014년 11월, 형 확정 재판을 앞두고 쓴 병역거부 소견서에 물리적, 정신적 차원에서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대해 말했었다. 수형생활 동안에는 어떤 생각들을 하며 보냈나.

=수감 초기, 혼거방에 잠시 있다가 줄곧 독거방에서 노역도 없이 지냈다. 맞지 않는 신발을 신고 있는 느낌이었다. 자유가 없는 상태로 살다보니 그 자체가 힘들었다. 수형생활은 끝까지 적응하지 못했다. 익숙해지기까지도 시간이 걸렸다. 양심적 병역거부가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반성할 게 없더라. 갑자기 법무부에서 다시 집어넣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웃음) 대신 내 삶을 돌아보는 데 집중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어땠고, 여기까지 오게 되기까지 어떻게 살아왔나를 계속 탐색하면서 스스로를 비우고 채웠다. 외부에 글을 쓰고 접견을 하는 일보다 그게 더 중요했다.

-생각은 좀 정리됐나.

=시간이 좀더 지나면 선명해지겠지만 감방에서의 나는 분명 감옥에 가기 전의 나와 다르다. 그런데 다시 세상으로 나와보니 감옥에서 살며 만들어진 자아와 감옥 밖의 지금의 나 사이에 또 갭이 있더라. 여러 내 자아들이 자연스레 통합이 되지 않는다. 어떻게 그 접점을 찾을 수 있을까가 제일 큰 고민이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지지하는 운동과 대체복무제 도입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말해왔다.

=2004년 ‘전쟁 없는 세상’ 사람들을 알게 되면서 함께 고민해왔다. 노무현 정부 때 대체복무 도입 얘기가 잠깐 나왔다가 지금까지도 아무 변화가 없다. 사회적 발언 없이 조용히 수형생활을 하러 갈 수도 있었다. 영화 만드는 사람인데 이런 목소리를 내는 모습으로만 기억될까 부담도 됐으니까. 하지만 이 문제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려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었다. ‘전쟁 없는 세상’ 친구들이 이 문제로 절망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봐왔다. 전세계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가장 많은 국가가 한국이다. 징병제가 당연시되다보니 대체복무 자체가 용인되지 않는다. 많이 답답한 부분이다.

-앞으로 만들어보고 싶은 작품의 구상도 수없이 해봤을 텐데.

=일부러 작업 생각은 하지 않으려 했다. 작업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20대 때 했던 작품들과 비슷하게 하고 싶지도 않다. 그때는 1인칭 관점에서 감수성 짙고 낭만적인 작품을 만든 것 같다. 자신에 대한 일종의 살풀이의 태도로. <줄탁동시>부터인가 <유예기간>(2014), <이것이 우리의 끝이다> 때부터인가가 과도기였다. 나와 연결돼 있는, 내가 공감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2인칭의 관점으로 살폈던 작품들이다. 수형생활을 하면서는 나 자신과 바깥 세계를 3인칭 시점에서 보게 됐다. 뉴스를 봐도 지금 내가 있는 곳 너머의, 내가 개입되지 않는 세계를 보는 것 같았다. 일종의 카메라의 시점 같은 거다. 이런 관점이 이후 내 창작물에 변화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영화계 동료들이 면회를 많이 간 걸로 안다. 그중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나.

=장건재 감독님이 아내인 김우리 PD님과 딸 장우리양과 함께 오신 적이 있다. 정말 오랜만에 아이를 본 거였다. 감옥과 어린아이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인데. 아이가 주는 건강한 에너지 덕분에 마음이 되게 맑아졌다. 나중에 ‘베이비 우리’에게 그날이 어떻게 기억될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수형생활을 하다보면 신체적, 정신적으로 기력이 쇠해지는 소위 ‘징역병’이 생긴다고 하더라. 건강은 괜찮나.

=아침 6시에 일어나 밤 10시에 자는 규칙적인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명상과 요가를 한 적이 있어서 그 기억을 더듬어 혼자 해보곤 했다. 출소하자마자 그때의 생활과는 정반대의 생활을 하고 있다. 점점 더 몸이 망가지는 과도기다. (웃음)

-당장 작업을 할 것 같지는 않고, 올해 꼭 해보고 싶은 게 있나.

=작업은 서두르지 않으려 한다. 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그때 하면 된다. 다만 굳이 영화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어떤 방식으로든 감옥에서의 생활을 정리해두고 싶다. 감옥에 있으면서 ‘내가 한국 사회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곳에 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쯤 한국 밖에서 이 나라를 바라보고 싶어졌다. 그런 기회를 만들고 싶다. 아, 근데 오늘 작품 얘길 너무 안 한 거 같다. 맞다! 인디스페이스에서 6월17부터 3일간 전작전을 열게 됐다. 그런 것도 잊고 있었다니.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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