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수의 야간재생]
[김현수의 야간재생] “내 인생? 나쁘지 않았어” <크리드>
2016-05-26
글 : 김현수

마블의 슈퍼히어로 ‘블랙 팬서’가 단독 주연인 영화는 라이언 쿠글러 감독이 연출을 맡는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찾아간다고 했던가. 아마도 마블은 그의 두 번째 연출작이자 <록키> 시리즈를 잇는 속편 <크리드>의 완성도를 보고 믿음을 가졌을 것이다. 1976년, 부둣가에서 고리대금업자 수금이나 하며 소일하던 서른살 ‘록키’가 세계 챔피언과의 일생일대의 대전 기회를 얻었던 것처럼, 1986년생의 젊은 할리우드 신인감독에게도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물론 <크리드>는 그만한 기회와 대우를 받아 마땅한 영화다.

그의 곁에는 연인 애드리안도 친구 폴리도 스승 미키도 떠나고 없다. 당대 최고의 인기 복서 록키 발보아는 아직 세상에 남아 있다. 여전히 필라델피아를 벗어나지 않은 채 그가 살던 동네에서 레스토랑을 운영 중이다. ‘이탈리아 종마’ 록키는 그가 살아가는 영화 속 세상 안에서 존경받는 전설적 스포츠 영웅이다. 생각해보니 그를 연기한 실베스터 스탤론이 살아가는 지금 여기에서도 한명의 배우가 제목과 동일한 이름의 캐릭터를 40년째 연기하는 것은 <록키> 시리즈뿐이다. 이제는 배우와 캐릭터의 구분이 무의미해질 정도로 둘은 그 자체가 되어 있었다.

한 청년이 록키를 찾아와 다짜고짜 권투를 가르쳐 달라며 떼를 쓴다. 청년은 록키의 라이벌이자 둘도 없는 친구였던 세계 챔피언 아폴로 크리드와의 인연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록키는 의심하지만 아도니스(마이클 B. 조던)는 아폴로의 숨겨진 아들이 틀림없다. 사실상 마무리된 시리즈를 잇는 속편 아이디어치고는 너무 구차한 것 아닌지 의심해볼 수 있다. 그런데 록키가 아도니스에게 기본 훈련법을 설명하는 이 장면에 이르면 모든 의심이 눈 녹듯 사라진다. 록키가 열심히 종이에 적은 쪽지를 아도니스에게 건네자, 그는 아이폰을 꺼내 사진만 찍고 떠나려 한다. “이 쪽지는 안 들고 가?” “이미 제 클라우드에 올라갔어요.” “뭐? 어느 구름에?”

록키가 제자에게 권투를 가르치던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3편과 4편을 이으며 스승이자 친구였던 미키와 아폴로를 차례로 떠나보냈던 시리즈는, 5편에 이르러 열정 넘치는 프로 지망생 토미 건이라는 젊은 캐릭터를 투입시켜 록키와 호흡을 맞추게 한다. 록키에게 권투를 배웠지만 재능만 믿고 까불다가 유명 에이전트에 농락당하는 그 캐릭터는 대중적인 매력이 없었다. <록키 발보아>에서 록키와 싸우던 젊은 챔피언 캐릭터 딕슨도 정신적인 스승과 제자 관계였겠지만 록키에 비하면 배우가 지닌 매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크리드>의 아도니스는 그들 모두와 다르다. 영화의 허리 부분을 든든하게 받치고 있는 훈련 장면에서는 어느새 아도니스가 록키의 존재감을 겁도 없이 공격한다. 과거 록키가 땀 흘렸던 체육관에서 훈련하는 그의 모습은 섹시하기 이를 데 없다.

정통성. 오랜 시리즈의 뒤를 이으려면 벗어날 수 없는 굴레다. 더군다나 시대의 아이콘이라 부를 만한 ‘록키’가 아닌가. 일단 라이언 쿠글러 감독은 ‘권투’에 있어서만큼은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과학적인 동시에 업계의 현실을 잘 담아내고 싶어 했다. 영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선수 역할은 실제 활동 중인 현역 선수들이 맡았다. 클레이튼 J. 바버 무술감독과 트레이너 코리 칼리에가 8개월 동안 조던과 함께 그의 외향을 선수답게 만들어냈다. 제작 과정을 담은 비하인드 영상에서 그들은 그 과정을 ‘조각’에 비유했다. 몸을 만들면 만들수록 ‘만들어진다’고 했던 조던은 인터뷰에서 대뜸 부모님께 감사인사를 전하기도 한다. “타고난 유전적 요인도 도움이 됐겠죠.”

“그냥 주먹만 휘두르면 손이 망가져. 다리를 같이 써야 된다고.” <록키> 시리즈에서 라이벌 아폴로 크리드는 록키의 펀치를 받쳐주는 다리 역할이나 다름없었다. 라이언 쿠글러 감독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자연스레 이 시리즈를 접했고, 아버지를 위해 속편 아이디어를 생각했다고 말한다. 그때 감독이 가장 끌렸던 캐릭터가 바로 아폴로 크리드다. 필라델피아의 풍경 앞에서 늘 홀로 포즈를 취하던 록키 옆에 웬 흑인 청년이 서 있는데 그가 아폴로의 아들이라니. 시리즈의 팬들에게는 이보다 더 감동적인 순간이 없을 것 같다. 록키는 그제야 말한다. “내 인생? 나쁘지 않았어.”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록키> 시리즈가 앞으로도 완전할 수 있는 건 <크리드>가 있기 때문이라고. 록키도, 실베스터 스탤론도 정말 보석 같은 영화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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