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배순탁의 영화비평] 과거의 향수에 기대어 미래의 희망과 약속 노래한 <싱 스트리트>
2016-06-01
글 : 배순탁 (음악평론가)

※음악에 관한 다량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부자라고 해도 현금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감독 존 카니의 언급처럼 1980년대 아일랜드는 실업자 천국이었다. 경제가 파탄나면서 가정이 무너졌고, 가정이 무너지자 10대들은 미래를 향한 약속을 아일랜드 아닌 다른 곳에서 찾기 시작했다. 바로 런던이었다. 영화 <싱 스트리트>는 아일랜드라는 절망 속에서 런던이라는 희망을 찾아 떠나는 아일랜드 10대들의 이야기다.

영화에서 런던을 상징하는 곡은 <Rio>다. 신스 팝/뉴웨이브 밴드 듀란 듀란이 1982년 히트시킨 이 곡은 가족이 함께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볼 때 뮤직비디오로 나온다. 주지하다시피, 듀란 듀란은 1960년대 비틀스와 롤링 스톤스에 이은, 제2차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첨병과도 같은 밴드였다. 미국에서도 크게 성공을 거뒀기에 영화에서는 미국에서 활동하느라 직접 출연하지 못해 라이브 연주 대신 뮤직비디오를 방영하는 것으로 대체된다. 이 뮤직비디오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바로 영국에서 최고의 뮤지션/밴드들만 나올 수 있다는 <톱 오브 더 팝스>(영화에서는 ‘인기 팝송 시간’으로 번역)이다. 우리가 아는 거의 모든 위대한 영국 출신 뮤지션들이 이 프로그램을 거쳐갔다고 보면 된다.

<Rio>가 의미하는 바는 지리적으로는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을 이루는 강인 리오그란데다. 그러니까, <Rio>는 미국에 대한 일종의 메타포인 셈이다. 기실 1980년대의 잉글랜드 역시 아일랜드보다는 좀 나았을 뿐이지 경제적으로 그렇게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아일랜드 청소년들이 런던을 꿈꿨다면, 잉글랜드 청소년들은 미국을 꿈꿨다. 즉, <Rio>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벗어나 성공을 갈망하는 심리를 상징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다.

“음악은 배우는 게 아냐”

영화는 주인공 코너가 방구석에서 어쿠스틱 기타를 치는 것으로 시작된다. 누가 봐도 엉망인 기타 실력으로 밴드 결성을 다짐하게 되는 이유는 단순하여 명쾌하다. 첫눈에 반한 여자 라피나에게 관심받고 싶어서다. 하긴, 저 위대한 기타리스트 에디 반 헤일런이 그랬던가. “온종일 기타만 연습해서 잘 치게 되니까, 여자들이 저절로 주위에 모여들더라고요.”

주위에 조력자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모두가 중요한 멤버들이지만 핵심은 멀티 플레이어로 설정된 에먼이다. 에먼을 연기한 배우 마크 매케나는 ‘실제’ 음악을 했던 아버지 덕에 ‘실제’로 온갖 악기를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영화 속 첫 만남에서 에먼은 롤랜드 주노 신시사이저로 영화 <베벌리힐스 캅>의 주제가인 해럴드 팰터마이어의 를 연주한다. 이외에 기타, 베이스, 각종 퍼커션에 이르기까지, 가히 더블린의 하림이라고 해도 괜찮을 면모를 보여준다.

자칭 ‘미래파’를 지향하는 소년들은 밴드 이름을 싱 스트리트로 최종 결정하고 연습에 몰두한다. 첫 카피곡은 당연히 <Rio>다. 코너는 이 연습곡을 녹음해서 형인 브렌든에게 들려준다. 애매한 표정의 브렌든은 곡이 끝난 뒤 문을 여닫으며 이렇게 말한다. “구린내 좀 빼야겠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섹스 피스톨스는 배워서 음악했냐? 니가 뭔데? 스틸리 댄쯤 돼? 음악은 배우는 게 아냐.” 자막에서는 (아일랜드 발음으로) ‘스틸리 단’이 생략되었으니 기억해놓고 감상해보기를 바란다. 음악을 배워서 하려면 테크닉이 스틸리 댄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 ‘미래파’를 추구하면서 고작 카피나 하다니, 그건 내가 있었던 전설적(?) 카피 전문 밴드 ‘연말정산’이나 하는 짓일 뿐이다. 1980년대 영국 음악의 영웅들인 디페시 모드나 조이 디비전급의 밴드가 되려면 창조는 조건이 아닌 필수다. 이 돈오의 깨달음과 함께 싱 스트리트는 연말정산과는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다. 코너와 에먼을 중심으로 작곡에 몰두하고, 뮤직비디오에 라피나가 참여하면서 조금씩 듣고 볼만한 노래와 영상을 갖춰나간다.

존 카니의 현재까지 최고작

스승이 되어준 건 당연히도 훌륭한 음악들이었다. 밴드는 조 잭슨의 <Steppin’ Out>,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도 삽입되었던 잼의 <Town Called Malice>, 블레이즈의 <Ghost of a Chance> 등을 영감의 원천으로 삼아 제법 멋들어진 자작곡을 창조해낸다. 음악이 쌓여갈수록 위축되었던 과거는 사라지고, 코너는 패션을 통해 달라진 자신을 표출하는 법도 배운다. 운명을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게 되면, 자신감은 자연스럽게 상승하는 법이니까. 심지어 코너는 자신을 때렸던 배리를 로드 매니저로 기용하고, 앞뒤 꽉 막힌 벡스터 수사를 음악으로 디스하면서 파티에 모인 학생들로부터 커다란 환호를 얻는다.

이외에도 영화는 여러 음악을 통해 관객에게 인상적인 순간을 전달하는 데 성공한다. 제네시스의 <Paperlate>와 이 곡을 작곡하고 노래한 필 콜린스는 코너의 형 브렌든에게 의문의 1패를 당하고, 영화 속 가장 중요한 정서적 키워드라 할 ‘행복한 슬픔’은 큐어의 명곡 <In Between Days>를 통해 대신 표현되는 식이다. 그러나 싱 스트리트가 창작곡으로 승부를 걸었듯이 기존 곡들보다 중요한 것은 당연히도 이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노래들이다. 영화를 본 관객 중 대다수가 <Drive It Like You Stole It>에 애정을 드러내고 있지만, 글쎄, 나에게 한곡만 꼽으라면 <The Riddle of the Model>을 선택하겠다. 1980년대 영국산(産) 뉴웨이브에서 기이한 에너지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이 곡은 그때 발표되었어도 꽤나 주목을 얻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을 만큼 빼어난 완성도를 들려준다. 그다음으로는 왠지 콜드플레이풍의 구성미를 떠올리게 하는 <Up>을 놓고 싶다.

아련하고 애틋한데 발랄하고 경쾌하다. 과거의 향수에 기대어 있으면서도 미래를 향한 약속을 잊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좋은 작품들이 대개 이렇다. 서로 방향성이 다른 정서들을 솜씨 좋은 만듦새로 엮어내고, 그 만듦새 자체를 동력 삼아 저절로 굴러가게끔 할 줄 안다. 국가 경제가 파탄나고, 가정이 무너지는 현실에서도 음악을 통해 희망을 잃지 않았다는 메시지는 어쩌면 고루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영화에서는 고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각성제와도 같은 영화는 위대해질 수 있지만 때론 마취제 같은 예쁜 영화도 우리에겐 필요한 법이니까 말이다. <원스>보다는 음악영화적으로 ‘더’ 탄탄하고, <비긴 어게인>보다는 ‘덜’ 상업적인 영화. <싱 스트리트>는 존 카니의 현재까지 최고작이다. 최근 개봉작에 한해서 말하자면, <곡성>으로 피폐해진 마음, 이 영화로 치유하면 딱일 것이다.

관련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