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의 건축가 렘 콜하스는 1992년 일본의 신건축 공모전 주제로 “스타일 없는 집”(House With No Style)을 제안했다. 이해하기도 쉽지 않은 주제의 이 공모전에서 요스케 후지키는 100개의 평면 카탈로그를 제안해 당선한다. 100개의 평면들 모두는 각각 지붕이나 화장실, 창문이 없는 등 어떤 ‘결여’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 결여는 우리가 집을 이루는 데 필수적이라고 생각되는 기본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생겨난 것들이다. 요스케 후지키는 지붕이 없는 것과 같은 예외적인 상황만이 우리의 관습적인 생활방식을 흔들어서 스타일의 작은 차이가 아닌, 건축의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 삶의 형식이 만들어내는 억압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영화 <더 랍스터>(2015)를 보고 나는 루이스 브뉘엘의 <절멸의 천사>(1962)를 떠올렸다. 두 영화는 모두, 삶의 어떤 일반 원칙을 제거함으로써 이야기가 시작된다. <절멸의 천사>에서는, 저택의 저녁 만찬에 초대된 일군의 사람들이 이유 없이 방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상황에 처한다. 자신의 자유의지로 문을 열고 나갈 수 있다는, 너무나 당연한 인간의 행동을 제거함으로써 이 특별한 이야기는 진행된다. 그리고 <더 랍스터>도 독신자는 구성원으로 용납하지 않는 사회를 전제로 하고 있다. 이렇게 두 영화는 너무나 당연해서 의문 없이 받아들이는 삶의 한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우리의 삶의 형식이 만들어내는 억압, 즉 ‘형식의 독재’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더 랍스터>는 커플의 ‘형식’에서 탈락한 한 남자(콜린 파렐)가 도시로부터 이송되어, 해변에 위치한 건물에 수용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겉보기에는 호텔처럼 보이는 이 장소에서 독신자가 된 남녀들은 정해진 기간 안에 자신의 짝을 찾아 도시로 되돌아가거나 반대로 짝을 찾는 데 실패할 경우, 스스로가 선택한 동물로 바뀌는 수술을 받고 나머지 삶을 살아가야 하는 운명에 처한다(주인공 남자가 선택한 동물은 로브스터이다). 이들은 호텔에서 자신의 짝을 찾아가는 도중에, 커플의 삶을 거부하고 숲속에 도망쳐 살고 있는 독신주의자들을 사냥한다. 그리고 독신주의자 한명을 잡을 때마다 수술까지의 기간은 하루씩 유예된다.
건축 공간은 기본적으로 억압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음식은 부엌에서 만들기를, 잠은 침실에서 자기를, 몸은 욕실에서 씻기를 강요한다. 그중에서도 호텔은 ‘싱글 룸’ , ‘더블 룸’같이 사용자가 싱글인지 커플인지에 따라서 이용에 제한을 두는 건물이고, 사적인 공간(객실)과 공적인 공간(로비, 식당)에서 할 수 있는 행위의 구분이 명확한 장소이다. 아마도 이러한 특성 때문에 호텔이 수용소나 군대 막사 대신 독신자들이 자신의 짝을 찾는 장소로 선택되어졌을 것이다. 남자가 호텔에 입소한 초반부에 ‘형식의 독재’에 관한 암시가 자주 나온다. 입소 인터뷰 장면에서 이성애자인지 동성애자인지를 묻는 질문에 남자는 대답을 주저한다. 그는 대학생 때 가졌던 한번의 동성애 경험 때문에 자신이 속할 범주를 고민한다. 신발 사이즈가 41.5는 없고, 41과 42에서 선택해야 한다든지, 테니스는 커플에게만 허용되고 독신자들은 골프와 수영 같은 운동만을 할 수 있다는 것 등도 형식의 억압에 대한 사례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주인공이 오른팔을 허리띠 뒤편에 수갑으로 고정하고, 왼손잡이로 하루를 보내야 하는 장면은, 신체의 직접적인 통제를 통해서 우리를 둘러싼 형식의 억압을 보여주고 있다.
숲은 호텔과 정반대로, 커플로 하는 모든 행동은 금지되고 혼자서 욕망을 해결하는 것만이 허락된다. 호텔이 짝이 되기를 강요하는 공간이라면 숲은 반대로 혼자 되기를 강제하는 공간이다. 연애는 금지되고 서로 돕는 것도 금지되고, 심지어 파티에서도 각자 헤드폰을 쓰고 자신의 음악을 들으며 서로 다른 춤을 춘다. 도망쳐온 독신주의자들은 집 대신 초우비를 사용해서 게릴라처럼 생활한다. 숲은 호텔과 다르게 공간의 ‘위계’가 사라진 장소이고 나무 아래 모든 곳이 열린 공간이며 나무 뒤에 몸을 겨우 가리는 방법만이 개인이 사생활을 확보할 수 있는 곳이다. 파놉티콘 감옥처럼, 숲의 독신주의자 사회는 누군가에게 보여질 수 있다는 가능성에 의해서 통제된다.
<더 랍스터>와 <절멸의 천사>의 유사성은 구조적인 측면에만 있지 않다. <더 랍스터>에는 아일랜드의 숲에 어울리지 않는 낙타나 공작이, <절멸의 천사>에는 도시의 저택 거실에는 존재할 수 없는 곰과 양이 등장한다. 그리고 두 영화 모두 의사와 건축가가 나온다. 이러한 유사성이 의도적이지 않다고 하더라도, <더 랍스터>의 주인공이 변하고 싶은 동물로 선택한 로브스터는 자연스럽게 살바도르 달리의 <로브스터 전화기>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살바도르 달리와 루이스 브뉘엘이 함께 <안달루시아의 개>(1929)를 찍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더 랍스터>와 <절멸의 천사>를 초현실주의로 설명할 수 있다(영화에서 주인공 남자는 로브스터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귀족처럼 피가 파랗고, 장수하며, 죽을 때까지 성욕을 유지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달리의 <로브스터 전화기>의 별칭은 ‘성욕을 일으키는 전화기’이다).
우리는 여전히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초현실주의 하면, 흔히 녹아내리는 시계 그림 같은 꿈속 이미지를 연상하기 쉽지만 나에게 초현실주의의 중요성은 ‘카다브르 엑스키’(cadavre exquis)로 설명되는 시 창작 방법론에 있다. ‘우아한 시체’로 번역되는 이 개념은 두 단어나 이미지를 ‘우연’으로 연결하는 것이다. <로브스터 전화기>에서처럼 전화기와 로브스터가 합쳐져서 만들어내는 새로운 관계는 관습적인 논리 체계를 흔들어놓는다. 소설가 김영하는 테드 컨퍼런스에서, 문학이란 “말이 안 되는 상황을 먼저 던져놓고 그 상황을 설명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예로 들었다. 서사의 특징을 갖고 있는 현대의 예술작업들은 관습적인 스타일을 벗어나려고 노력하고, 그러한 시도들은 초현실주의에서 ‘우연’이란 방법으로 형식화되었다(요스케 후지키의 평면과 <절멸의 천사>의 결여는 ‘우연’의 다른 이름이고 동일한 낯섦을 만들어낸다).
비 내리는 들판, 여자가 한손에 총을 들고 차에서 내린다. 그리고 들판에 서 있는 한 무리의 당나귀들에게 천천히 다가간다. 그녀는 당나귀들 중 한 마리를 총으로 쏘아 죽이고 차로 돌아간다. 영화가 시작되면 <더 랍스터>는 영화 속 내용과 인과관계가 설명되지 않는 앞의 장면을 보여준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남자를 기다리는 장님 여자의 물컵은 웨이터에 의해서 다시 한번 채워진다. 칼로 자신의 눈을 찔러 장님이 되려는 남자의 두려움과 주저를 의미하는 이 인상적인 장면 이후에도, 우리는 남자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영화는 끝난다. 세상은 무수히 많은, 정교한 형식들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나는 내가 아닌 누구의 마음도 알지 못하고, 내가 실제로 경험하지 못한 어떤 것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결여, 우연, 모름 같은 단어들은 이 낯선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작은 창이다. 나에게 어떤 예술작품은 ‘현기증’을 느끼게 한다. <절멸의 천사>가 그런 영화이고, <더 랍스터>의 시작과 마지막이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