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역꾸역, 문구들을 빠짐없이 읽어 내려갔다. 강남역 10번 출구에 붙어 있는 ‘살려 달라’는 포스트잇. 그 하나하나가 마음에 덕지덕지 붙어 떨어지지 않는 기분이었다. 나 역시 생명에 위협을 느낀 그 많은 아찔한 순간들을 돌아보았고, 그게 나만의 경험이 아니었다는 확인에 절망적인 시간이었다. 지난 몇주간, 여성들은 맞았고(부산 동래구 폭행사건), 공식 행사를 중단당했으며(경희대학교 총여학생회 주최 ‘마이리틀여혐-여혐러에게 고하는 사이다 토크쇼’ 제지 사건), 집단 성폭행(브라질의 16살 소녀 성폭행 사건)을 당했다. 현실의 여자들이 크고 작은 고초를 당하는 동안, 영화 속 여자들은 성녀로 추앙되었다가 (배신감이라 여기는 감정을 못 이긴 남자들에 의해) 창녀가 되는 나락에 빠졌다. 돌아보면 상당수의 영화에서 아름다운 여성은 남성의 성장에 등장해 혼란을 가중시키는 어떤 이물질로 취급당하기 일쑤였고, 사춘기 소년들은 그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성장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었다. ‘강남역 살인’이라는 상징적 사건을 겪고 할 말을 잃은 여성들은, 그제야 그 기막힘에 대해 소리내야 한다는 연대를 확인했다. 때마침 도착한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를 보면서, 아가씨(김민희)와 하녀(김태리)의 꿍꿍이와 작당이, 그들을 억압하던 남성을 향한 아름다운 연대임을 확인한 순간, 내 안에 한줄 경쾌한 마음이 솟았다. 피해자인 여성이 되레 손가락질당하고 이리저리 피해다녀야 하는 이 억압적인 구조 안에서 온전히 살아남으려면 더디지만 쉬지 않고 자유로워질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공고해졌다.
아이폰 시계를 열었다. 파리, 샌프란시스코, 도쿄, 방콕같이 이미 등록된 리스트에 몇개의 도시를 추가로 등록했다.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포르투갈의 리스본, 라오스의 비엔티안. 한번도 간 적 없지만 문득 그곳 여성들의 시간이 궁금해졌다. 지금도 순결을 중시하는 전통에 따라 ‘여성성기절제’를 강요받는 아프리카의 악습을 그린 다큐멘터리 <소녀와 여자>(2015) 속 소녀들이 겪는 끔찍한 시간을 돌아본다. 성폭행을 방어하기 위해 원치 않은 조혼을 해야 하고, 유방암 발병률이 높아져도 여성성을 감추려 붕대로 가슴을 꽁꽁 싸매고 지내야 하고, 성폭행하려던 남성들이 씌운 누명에 돌에 맞아 처형당하는 이야기들이 민담 속 먼 과거가 아닌, 현재 벌어지는 이 지구상의 이야기다. 그 무수한 폭행의 순간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그녀들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웅크리고 살아왔을까. 때로는 사소한 여행길에도 그런 위험이 전가되지 않을 리 없다. 몇해 전 폴란드의 크라쿠프를 떠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수도 사라예보를 가려고 할 때 인포메이션센터의 직원이 극구 만류하던 기억이 난다. “여자가 가기엔 너무 위험하다”라는 게 이유였는데, 한참 고민하다가 그냥 버스터미널에 가서 티켓을 끊어버렸다. 그런 이유로 포기하고 시도하지 않으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차라리 부주의해도 세상을 경험하는 걸 미덕으로 삼고 살아야 당찬 여성이 되는 거라는, 내 안의 암묵적 타협도 없지 않아 있었다.
사라예보에 도착한 첫날 밤, 그곳의 나이트라이프를 경험하고서는 크라쿠프의 청년이 좀 오버한 게 아닌가 싶어졌다. 당시 3개월 정도 짐을 싸들고 동유럽을 여행하던 때였는데, 히잡과 차도르 차림일 거라는 예상과 달리 여성들의 의상이 동유럽 지역에서 본 것 중 가장 화려했다. 분위기로 볼 때 이 도시에서 이방인으로 감지하게 되는 위협은 그리 크지 않아 보였다. 물론 폴란드 청년의 우려에 대해선 충분히 이해가 갔다. ‘아무 일도 없으면’ 그렇게 아무 일도 없는 게 되는 것일 뿐 사라예보가 아니라 그 어디라도 위험은 잠복하고 있으니까. 사라예보의 역사를 살짝만 들춰내보아도 위험이 사라진 건 불과 얼마 전 일이다. 1990년대만 해도 이곳은 이슬람계와 크로아티아계, 그리고 세르비아계가 민족과 종교를 사이에 두고 내전을 벌였던 격전지였다. 그 싸움으로 10만명 넘는 무고한 시민이 목숨을 잃어야 했고, 그 안에 사라예보 출신 여성감독 야스밀라 즈바니치가 영화화한 <그르바비차>(2005)의 기막힌 여성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12살난 딸 사라의 수학여행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웨이트리스로 취직해 돈을 버는 에스마. 사라가 세르비아군의 성폭행으로 태어난 ‘악마의 씨’라는 사실을 숨긴 채 긴 세월을 견디며 살아왔다. 내전 중 ‘인종청소’라는 명분 아래 세르비아군은 어린 소녀부터 부녀자까지 가릴 것 없이 이슬람 여성을 강간했고, 낙태를 못하게 군 수용소에 가둬두었다 풀어주었다. 열두살 사라가 사춘기를 보내는 그르바비차는 사라예보에서 가장 피해가 극심했던 지역이다. 피해자인 에스마는 다시 돌아보기조차 힘든 그날의 만행을 평생 껴안고 그렇게, 지금은 평범해진 이 도시를 살아간다. 그 ‘살아냄’을 두고 어머니의 사랑, 위대한 포옹 같은 수식어를 붙이는 것도, 엿 같은 이 세상의 속박 중 하나다.
그렇다고 지금의 사라예보에서 에스마의 상처를 유추해낼 수단은 없다. 말한 것처럼 사람들은 활기차 보였고, 백주에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은 정감이 넘쳤으니까. 그러던 그 며칠이 지나 관광구역인 올드타운을 벗어나면서, 나는 이곳저곳 건물에 난 총탄의 흔적을 발견했다. 마을 주민이 일러준 ‘밖에 나가면 지뢰를 조심하라’는 말이 떠올랐다. 다들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지만, 이 지구는 끔찍한 기억을 겪은 에스마도, 그 아픔을 내재한 채 태어난 그녀의 딸 사라도, 악습과 폭행에 노출된 채 불안에 떠는 무수한 여성들이 여전히 살아가는 곳이다. 질서가 깨지고 혼돈이 오는 순간, 가장 먼저, 가장 깊게 상처를 입는 것은 가장 약한 이들이다. 그 약자들 속에, 여성이 존재하고 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ps. 마침 그때가 사라예보국제영화제 기간이었고, 그곳에서 차우셰스쿠 독재정권으로 임신중절이 금지되었던 1987년. 불법낙태가 행해지는 루마니아의 현실을 그린 크리스티안 문주의 <4개월, 3주… 그리고 2일>(2007)을 봤다.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때였고, 끔찍한 상황은 영화 속 묘사였지만, 그땐 다음 행선지로 정해두었던 루마니아행을 포기했던 기억이 난다.
*사라예보는 해마다 8월이면 동유럽영화제의 중심인 사라예보국제영화제가 열리는 활기찬 도시다. 올해로 22년째다. 산 아래 작은 분지마을, 올드타운의 정감어린 돌길, 마을의 중간을 가로지르는 하천까지 마을의 풍경이 소박하면서도 이국적이다. 마을 사람들 모두 허물없이 말을 건네주어, 그 분위기가 단지 풍경으로만 그치지 않고 기억에 오래 남는 도시가 된다. 중심가에서 벗어난 지역에 있는 총탄자국은 부러 보수를 하지 않은 듯싶다. 내전의 상처를 깨끗이 ‘재건’하는 대신, 잊지 말고 살아가자는 이곳 사람들의 작은 의지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