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송경원의 영화비평] 첫 번째 CG영화 <정글북>을 체험하며
2016-06-15
글 : 송경원
<정글북>

한때 애니메이션과 실사영화를 구분 짓는 건 사진적 존재에 근거를 둔 리얼리즘이었다. 그린 것과 찍은 것의 차이, 대상이 카메라 저편에 있고 없음의 구분이 둘 사이 견고한 장벽으로 우뚝 솟아 있었다. 컴퓨터그래픽(CG)이 등장한 이래 이 경계는 하루가 다르게 얇아지고 있음을 느낀다. 한동안 CG는 그리는 것과 찍는 것 사이 경계를 허물기보다는 완충재 역할에 가까웠다. ‘애니메이션/영화’의 구분이 ‘애니메이션/CG/영화’ 정도로 바뀌었다고 보면 적당할 것이다. 초반에 CG는 어디까지나 그리는 것의 영역에 속해 있었고, 사람들의 눈은 사진의 사실성과 CG의 과도한 정교함을 충분히 구분할 수 있었다. 소위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라고 부르는 낯섦, 머리로 계산하고 그려낸 것의 이질감은 ‘찍은 영화’의 위상을 도리어 견고하게 만들어줬다.

CG가 카메라의 물질성을 절대 따라할 수 없을 것이란 믿음은 한편으론 필름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대한 반작용처럼 보인다. 여기선 인공지능이 인류를 위협할 거라는 두려움과 유사한 종류의 냄새가 난다. 혹은 비디오가 라디오를 죽이고 말 것이라는 공포. 뉴미디어가 올드미디어를 밀어내는 것에 대한 반감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그려진 것(CG)이 찍는 것(필름)을 대체해나갈 때마다, 존재를 부정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새로운 기술에 대한 거부감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알다시피 비디오는 라디오를 끝내 죽이지 못했다. 뉴미디어의 속성은 올드미디어를 차용하고 모방하되 점령하진 않는다. 언뜻 섞이고 반발하는 듯 보이는 두 매체는 사실 경쟁관계가 아니다. 어느 특이점을 지나면 별개의 영역에서 각자의 색을 강화해나가기 시작한다. <정글북>을 보면서 내가 그 특이점을 목격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애니메이션 킬드 라이브 액션 시네마?

<정글북>은 영화인가, 애니메이션인가. 모글리 역의 닐 세티 한명을 제외한 모든 것을 CG로 그려낸 이 영화를 과연 실사라고 불러도 좋은 것인가. 답은 잠시 보류해두고 <정글북>의 CG가 이룬 성취에 대해 먼저 살펴보자. 아마도 동물들이 사람의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면, 또는 이 모든 것이 CG로 이뤄진 세계라는 가열찬 홍보가 없었다면 이 동물들이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단번에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영화 속에선 오직 배우의 목소리만이 흑표범 바기라, 호랑이 쉬어칸, 곰 발루, 뱀 카아가 사실 그려진 존재라는 것을 구분하는 확실한 지표로 작동한다. 가령 오랑우탄 킹 루이의 명령을 받는 원숭이들은 말을 하지 않는데, 말을 금지당한 동물들의 모습은 거의 완벽히 우리가 자연다큐멘터리에서 보던 동물들의 모습과 일치한다. 요컨대 현재 CG기술은 제한적으로는 실사영화와 구분이 어려울 정도의 묘사가 가능한 영역에 도달했다.

물론 <정글북>의 CG가 완벽하다는 건 아니다. 다만 모션 캡처에서 퍼포먼스 캡처로 진일보한 기술의 비결에 대해 언급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초기 CG는 최대한 현실과 가깝게 모사를 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필름이 24프레임의 잔영이라면 디지털은 기술적으로 그 몇 배의 프레임도 구현이 가능하다. 가능하니까 그냥 그렇게 했다. 그때만 해도 인간이 받아들이는 정보량의 한계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고, 여백을 통해 리얼리티를 재구축한다는 걸 알지 못했다. 리얼리티란 본질적으로 사실이 아니라 사실을 흉내 내는 작업이다. 지금부터 관객을 속이겠다는 선언이라 생각해도 좋다. <정글북>의 시각효과를 담당한 로버트 레가토는 특수효과의 본질이 ‘우리가 본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는 것을 재현하는 방식’에 있다고 했다. 핵심은 지각을 속이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선 CG 역시 여러 특수효과 중 하나의 유효한 수단에 불과하다.

초기 CG가 정보량을 극한으로 채우는 것으로 사실에 가까워지려 했다면, 소위 퍼포먼스 캡처의 방향은 필름을 흉내 내는 것이다. 정확히는 우리가 필름을 보는 감각, 24프레임의 환영을 재현하여 감각을 재구성하는 것에 가깝다. 이는 정보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정보를 비워내는 것이며 순간을 정확히 찍는 것이 아니라 움직임의 흔적들(이를테면 화면의 뭉개짐)을 모방하는 것이다. 드디어 과시에의 욕망(혹은 두려움)을 비워내고 덜 보여줘도 괜찮다는 여유를 획득한 셈이다. 나는 최근 CG영화들이 조금씩 선보이고 있는 이 심리적 여유야말로 변화의 특이점이라고 생각한다. 대상을 필사적으로 흉내 내는 단계를 지나 필요한 효과만을 차용하겠다는 태도는 CG를 하나의 유효한 도구의 위치로 안착시킨다. 과거 CG영화들이 CG의 전능함에 매달려 필름영화과 서로 날을 세웠다면 이제는 그 강박을 벗고 독자적인 영역으로 눈 돌릴 수 있는 단계에 도달했다.

CG는 애니메이션과 실사영화의 경계를 무너트리지 않을 것이다. 한때는 애니메이션의 연장으로 오해되어 찍는 영화의 의미를 퇴색시킬 거라는 우려도 낳았다. 하지만 올드미디어(필름)의 속성을 충분히 흡수한 뉴미디어(CG)는 이제 새로운 길, 애니메이션도 라이브액션시네마도 아닌 색다른 시도를 하지 않을까 짐작된다. 이 시점에 필요한 건 독자적인 문법과 이에 대한 대중의 인식인데, 나는 <정글북>이 그 단초를 제공한다고 본다. 우리는 무엇을 보고 애니메이션이라 부르는가. 여기서 그려졌다는 건 애니메이션의 일부 요소에 불과하다.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쌓아온 다양한 연출, 문법, 애니메이션이기에 가능한 표현들이 애니메이션을 애니메이션답게 한다. 실사영화도 마찬가지다. 필름은 실사의 필요조건에 불과하다. 제대로 된 실사영화를 위해선 그 외 수많은 요소, 움직임, 역사가 동반되어야 한다. 그것은 흉내 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며 그럴 필요도 없다.

극장에서만 가능한 체험, 첫 번째 CG영화

나는 <정글북>을 애니메이션도 실사영화도 아닌 ‘CG영화’라고 부르고 싶다. 아마도 좀 더 세련되고 적절한 용어는 CG영화들의 특성이 한층 명확해진 다음에 다시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여기서는 가꾸고 강화했으면 하는 몇 가지 특색, 혹은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고 싶다. 이후경 평론가는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2014)을 두고 “시저의 눈은 마치 인간의 눈을 따로 찍어 합성한 것처럼 사실적이다. 그런데 시저의 눈이 인간의 눈을 닮아가는 동안, 어떤 광채가 사라져버린 것 같다”고 언급했다(<씨네21> 965호 이후경의 영화탐독, ‘전편의 성취를 잇지 못한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 전적으로 동의한다. 지나치게 사실적으로 묘사된 시저의 눈은 “불필요할 정도로 많은 대사와 정형화된 표정”의 대표적인 사례다. CG로 재현된 눈은 빈 정보, 여백의 미학, 카메라만이 가능한 우연의 포착을 절대 재현할 수 없다. 설사 정교한 계산을 통해 ‘우연의 순간’을 모사한다 해도 그 속임수가 얼마나 유의미할지는 모르겠다. 그것은 그저 카메라와 실사영화에 맡겨두면 족할 영역이다.

‘CG영화’가 지향해야 할 영역은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한다. <정글북>이 흥미로웠던 건 이것이 상업영화의 감각과 즐거움으로 완벽하게 조율된 세계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 거창한 주제로 심도 있게 들어가려 했다면 도리어 의문이 들었을 것이다. <정글북>을 최초의 ‘CG영화’라고 보고 싶은 건 이것이 모두가 아는 이야기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에 집중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평균을 맞추고 이야기를 편편하게 다지는 데 탁월한 재능을 드러낸 존 파브로 감독의 보편타당한 연출은 <정글북>의 CG라는 도구의 적절한 활용법을 제시한다.

CG의 첫 번째 장점은 생경한 대상과 어려운 움직임을 매우 구체적으로 재현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철저한 계산으로 구축한 가상의 공간은 완벽하게 통제된 퍼포먼스를 선보이기에 적합하다. 3D가 <아바타>(2009)나 애니메이션처럼 그려진 영화와 결합했을 때 좀 더 뛰어난 결과물을 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순수한 움직임에 대한 놀람. 이는 어쩌면 (몇몇 3D영화가 성취했던) 초기영화에 깃든 놀람의 순간과도 비슷하다. 뤼미에르 형제의 <기차의 도착>(1895)이 당시 관객에게 보여준 것은 ‘기차가 도착한다’는 사실의 재현이 아니라 극장이란 공간에서 만날 수 있는 신기하고 새로운 체험이었다. 내가 ‘CG영화’라고 부르고 싶은 영화들 역시 우리에게 그와 같은 새롭고 신기한 체험을 선사할 가능성을 품고 있다고 본다. 오직 극장(이라는 통제된 공간)에서만 가능할 체험. 순수한 움직임에 대한 경이.

애니메이션은 대상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힘이라는 점에서 초기 영화의 운동성과 맥을 함께한다. 그런 점에서 <정글북>의 목소리가 주요 캐릭터들에게만 주어졌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정글북>은 말하는 동물을 선뜻 내보이며 굳이 이것이 만들어진 세계라는 걸 감추지 않는다. 내가 ‘CG영화’라고 부르고 싶은 대상들은 그래픽으로 움직임의 순수한 물성을 부여하되, 목소리로 허구임을 감각하도록 돕는 영화들이다. 애니메이션도 실사도 아닌 어떤 것. 가상으로서 존재하고 그 세계에서 온전히 즐거움을 선사할 수 있을 것. 그러면서도 가짜가 아니라 진짜 움직임을 감각할 수 있도록 유도된 것. <정글북>을 “포토그래픽한 세계에 작별을 고하는”(<씨네21> 715호 허문영의 전영객잔, ‘사진적 기억을 버리고 그래픽 세계의 비행선을 찾은 3D애니메이션 <업>’)영화가 아니라 첫 번째 ‘CG영화’(임의로 그렇게 이름 붙일 수 있다면)로 받아들이고 싶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허문영 평론가는 <업>을 "사진적 기억에 새겨진 집을 버리고 그래픽 세계의 비행선 찾기"에 관한 애니메이션이라고 정의했다. 누가 봐도 애니메이션인 <업>에서 사진적 재현과 기억의 문제를 끄집어낸 통찰이 놀랍다.

다만 이 통찰을 CG로 ‘그린’ <정글북>에 고스란히 적용하기엔 무리가 있다. <업>이 "그래픽 시네마로 빚어낸 포토그래픽 시네마에의 향수"라면 <정글북>은 한없이 포토그래픽 시네마에 가깝게 수렴하지만 결코 겹칠 수 없는 그래픽 시네마라 해야 할 것이다. CG라는 걸 굳이 감추지 않지만 충분히 현실 같고, 장면의 진실에 매달리기보다 인지와 감각을 자극해 (가상의) 현실을 만드는 영화들. 정보로 구축된 결과가 있고 이를 지각하는 내(관객)가 맞은 편에 있을 때 관객의 반응을 허상이라 할 수 있는지의 문제. 비유하자면 우리는 ‘매트릭스’를 사실이 아니라 단언할 수 있는가. 정보는 그 자체로 물질이 될 수 없는 것인가. ‘현실’이 있고, 그것을 카메라로 재현한 ‘영화적 현실’이 존재해왔다면, 이제는 CG로 구현된 세계를 마주하는 또 다른 인지방식을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CG영화’가 구현한 리얼리티에 관한 새로운 스키마(기억, 지각을 받아들이는 인식의 구조, 혹은 논리 틀)의 도래. 감히 미래의 영화를 아직 말하긴 섣부르지만 애니메이션과 극영화 등 과거의 구분과 경계가 점차 옅어져가는 가운데 새로운 개념이 필요하다면 이 영화가 그 개념의 한 조각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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