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영향으로- 유전적인 것과 환경적인 것 모두- 책뿐만 아니라 만화, 애니메이션 그리고 영화를 아주 좋아했고 자주 보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 삶과 가치관에 여러 형태로 영향을 미치는 영화와 애니메이션들이 있다. 신선한 충격과 생각을 하게 만든 애니메이션에는 <아키라> <공각기동대> <신세기 에반게리온> 등이 있고, 사람과 사랑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 영화에는 <죽은 시인의 사회> <글루미 썬데이> <클로저>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레옹> <위대한 유산> <아메리칸 뷰티> 등이 있다. 그중 하나를 얘기하자면, 20여년 전에 개봉했던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이다. 원래 ‘상’을 받은 영화는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당시만 하더라도 상 받은 영화는 예술성을 강조하다보니 재미가 없을 것이라는 편견과 꼰대 느낌이 나는 심사위원들의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좁은 시각이 싫었던 것 같다. 예술은 그것을 소비하는 대중의 환호가 따라야만 예술로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땐 참 반골 기질이 넘쳐흘렀던 것 같다.
포스터와 주연배우들의 이름만으로 끌렸던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도 역시 몇년은 묵혀두었다. 잦은 시험과 엄청난 학습량으로 지쳐 있던 본과의 어느 일요일, 영혼을 쉬게 하고 싶다는 생각에 침대에 누워서 아무 생각 없이 TV를 틀었는데 이 영화를 시작하기 직전의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마침 잘됐다는 생각에 부담 없이 영화를 보기 시작했는데, 영화를 보는 내내 그리고 끝난 후 머리를 한대 맞은 듯 멍했다. 가슴 한켠이 따뜻하면서도 다른 한켠은 쓰리고 아련하게 아파왔다. 인생 막장에서 죽기 위해 라스베이거스로 간 남자와 막장 인생이지만 악착같이 라스베이거스에서 살아가는 여자의 만남. 가진 것이 없기에 잃을 것도 없어 보이는 두 남녀의 만남과 그들 나름의 사랑 방식, 잃을 것이 없어 보였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그 사랑을 가졌었기에 그것을 잃어가는 그들을 바라보며 참 많은 생각이 들었었다. 알코올의존증으로 죽어가는 남자를 위해 휴대용 술병을 선물하는 여자와 이제야 자신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여자를 만났다고 말하는 남자. 서로의 아픔을 공유하고 서로를 이해하면서 ‘있는 그대로 서로를 사랑하기’로 한 그들은 강렬한 사랑에 빠지지만, 알코올의존증이면서도 끊임없이 술을 마시며 죽어가는 남자와 매춘으로 번 돈을 빼앗고 폭력을 휘두르는 포주로부터 자유로워진 후 또다시 희망 없는 알코올의존증 남자를 사랑하게 된 여자, 그 둘의 반복되는 자기 파괴적인 행동으로 인해 그리고 사랑이 깊어지며 있는 그대로 사랑하자는 처음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는 그들의 관계는 결국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죽음을 앞둔 남자는 그래도 자신을 진정으로 이해했던, 그리고 대가 없이 자신을 사랑했던 여자에게 연락을 하고 남자를 찾아온 여자는 남자를 위해 자신이 유일하게 해줄 수 있는 방식으로 그의 마지막을 위로해준다. 이들의 사랑을 보면서 사랑의 정의에 대해, 사랑의 다양한 방식에 대해, 사랑의 범주에 대해, 그리고 사랑의 필요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사람과 사랑에 대한 나의 좁은 시각과 편견- 소위 일반적이라는- 에 대해 알게 되었으며 삶과 사랑의 질과 양, 깊이와 시간의 의미 없는 상관관계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되었다. 단 하루를 사랑해도 진심일 수 있는 것이고 진심이었다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일 것이며 나를 진심으로 사랑한 그 사람에게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