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치기들>의 스포일러가 6월4일 일기에 있습니다.
<아가씨 가까이>는, 영화 <아가씨>를 찍거나 <아가씨>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 박찬욱 감독이 찍은 이미지를 모은 사진집이다. 빛과 바람조차 인위와 선택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영화현장을, 셔터를 누르는 손가락 하나로 대뜸 낚아채며 감독이 느꼈을 해방감을 짐작할 수 있다. 독자마다 베스트 컷이 천차만별인 이 사진집에서 내 마음이 기우는 사진은 37쪽의 <아가씨, 촬영팀>이다. 히데코(김민희)의 방에 자리잡은 정정훈 촬영감독을 포함한 촬영부와 그립팀을 담은 스냅숏이다. 여섯 인물의 시선은 모두 어긋나 있으나, 같은 문제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그저 망연자실한 것일 수도!). 그들을 지배하는 것은 동일한 번민이라는 점 때문에,‘십자가 강하’나‘예수 재림’을 그린 서양 종교화를 보는 듯하다.
06/03
어제 저녁 무주산골영화제에 도착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숙소인 캠핑장을 산책한 다음 7km쯤 자동차를 달려 무주 읍내의 상영관 ‘산골영화관’에 도착했다. 각 극장은 반디관, 태권관 같은 귀여운 이름을 갖고 있다(무주는 머루, 천마, 반딧불이, 태권도가 명물이다). 관람이 무료인 대신 객석 수가 적어 늦으면 입장을 못하는 수가 있다. 설령 영화관에 들어가지 못해도 외지인에겐 극장 밖의 무성한 녹음이 훌륭한 스펙터클이다. 초록으로 눈을 쉬게 한 후 활짝 갠 시야로 다음 영화에 도전하면 된다. 여차하면 지하에 자리한 실내 풀 ‘수달수영장’에서 첨벙거리며 영화 사이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상영관 옆에는 고 정지용 건축가가 완성한 등나무 운동장이 있다. 개막식 참석을 위해 어제 해질녘 이곳에 처음 들어서는 순간, 나는 일본 학원물 애니메이션의 영원한 여름 속으로 입장하는 착각에 빠졌다. 영화제 이벤트를 위해 운동장 곳곳에 설치돼 전망을 훼방놓는 임시 시설물들이 잠시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이 운동장의 특징은 단상을 둘러싼 사방의 긴 관중석에 드리워진 두터운 등나무 차양에 있다. 행사의 주빈들만 천막의 그늘을 누리고, 관중은 초조하게 햇볕과 씨름하는 풍경을 보고 나온 아이디어라고 한다. 나무 그림자 안에서 멍하니 앉아서 방금 본 영화에 대해 낙서를 하다 깨달았다. 멀티플렉스이건, 야외상영관이건 극장 근처에는 혼자 가만히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팝콘 매점보다 수십배 더.
06/04
무주에서 본 첫 영화는 김진황 감독의 <양치기들>이었다. 지난해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모니터로 보면서 막연히 <파수꾼>과 <소셜포비아>의 맥을 잇는 흥미로운 이야기와 화법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스크린으로 확인했다. <양치기들>의 완주(박종환)는 한때 주목받았던 배우지만 지리멸렬한 커리어에 지쳐 심부름센터에서 생계를 유지한다. 더욱 쓰라린 점은 그의 아르바이트가 일종의 연기라는 사실에 있다. 완주는 의뢰인의 요청에 따라 친구나 애인 행세를 한다. 문제는 어느 날 법을 건드리는 의뢰가 들어오면서 시작된다. 아들을 잃었다는 피해자 어머니의 간청과 큰 사례금에 못 이겨 살인사건 목격자를 사칭하면서, 완주는 일생일대의 연기와 일생일대의 각성을 동시에 경험한다. 얼마 전 칸에서 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신작 <태풍이 지나가고>가 문득 떠올랐다. 이야기를 만들거나 타인인 척하는 직업을 가진 인물이 예술 세계 바깥에서 유사한 일- 흥신소, 심부름센터- 을 하다가 본인의 삶이 어떤 서사인지 깨닫게 된다는 설정이 두 영화의 공통점이다.
<양치기들>은 제목이 명시하는 대로 거짓말에 관한 드라마다. 완주를 포함해 사건에 연루된 여러 사람들은 본 것을 말하지 않거나 보지 못한 것을 보았다고 말한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각자의 거짓말은 타인을 결정적으로 해치지 않는, ‘좋은 게 좋은’ 처세술이었을 뿐이지만 작은 비겁 여럿이 맞물려 누명을 완성한다. 믿기 어려운 우연이 한두번 개입하긴 하지만 퍼즐의 디자이너로서 김진황 감독은 훌륭한 솜씨를 보인다. 어떻게 연결될지 짐작이 가지 않는 플롯의 씨앗을 차례대로 침착하게 뿌린 다음 하나씩 거둬들여간다. 무엇보다 이 과정에서 유머를 잃지 않는다. 특히 <양치기들>의 농담은 인물들이 가진 명백한 결함에도 불구하고 매번 비웃음을 비껴간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우리 모두의 내면에 있는 보편적인 비겁함과 그것들이 상호작용할 때 발생하는 우스꽝스러움을 영화에 그려냄에 있어 각본과 별개로 김진황 감독이 성공한 대목은, 배우 얼굴의 활용이다. 다시 말해 캐스팅과 그들의 얼굴을 카메라가 잡는 방식이 매우 효과적이다(굴곡이 복잡한 사건을 중심에 둔 영화치고 <양치기들>에는 바스트숏 이상의 클로즈업이 많다). 자책하는 동시에 당신은 달랐냐고 추궁하는 얼굴, 죄의식을 느끼면서도 뒷배를 믿는 얼굴, 안타까운 척 가십을 즐기는 얼굴 등등. 완주 역의 박종환을 포함해 아직 유명하지 않은 배우들의 마스크과 미세한 표정은, 스크린에 등장하는 시간의 길이를 막론하고 인물의 정황과 태도를 함축해서 전한다.
그런데 <양치기들>은 두 갈래의 서사로 이뤄져 있다. 하나는 위에 쓴 살인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완주가 하룻저녁 남자친구 역을 대신해준 의뢰인 미진(김예은)의 실종이다. 미진은 완주가 인기를 누렸던 짧은 호시절의 팬이었지만 과거의 스타가 자신을 몰라볼까봐, 혹은 자존심을 다칠까봐 두려워 추억을 상기시키지 않고, 완주는 그녀를 생면부지의 고객으로만 대한다. 장면과 장면을 매끄럽게 이어가던 <양치기들>은두 이야기를 합류시키는 데 실패한다. 문제의 살인사건과 미진의 케이스는 둘 다 ‘모르는 척’에서 빚어진 사태지만 전자는 윤리적인 엄격성과 관련돼 있고 후자는 체면 혹은 인간 사이의 예의에 관한 것이다. 완성되어 세상에 나온 많은 영화들은 실제로는 감독의 머릿속에 오랫동안 잠복해 있던 두개 이상의 영화가 종합된 결과다. 문제는 결과물이 이음새를 노출시키느냐일 테고 나아가 영화 스스로 구상 단계의 접합부 자체를 완전히 망각하는 경지에 이를 수 있느냐일 것이다. <양치기들>에서 “그럼 아저씨는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예요?” 라는, 영화에서 가장 주제와 밀착된 질문을 다른 인물이 던질 때 완주가 들려주는 대답은, 감독이 희망한 만큼 관객의 귀에 명쾌하지 않다. 물론 하나의 대사가 영화를 종합할 필요는 없고, 현실이 그렇듯 별개의 체험이 동일한 의미를 가리키는 것도 부자연스럽다. 그러나 최소한 관객이 줄곧 따라온 경험의 주체, 완주라는 인물의 여정 안에서는 두 사태가 종합되고, 그리하여 영화가 끝난 후 그가 살아갈 모습에 대해 관객에게 어떤 이미지를 남겨야 한다고 믿는다. 내가 완주를 제대로 전송하지 못하고 극장을 나선 이유다. <양치기들>은 너무 많이 이야기한 것일까, 덜 이야기할 것일까?
좋 아 요
평화의 바위
<정글북>의 세계는, 의인화된 다문화 국가 <주토피아>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르지만 엄격한 법에 따라 움직인다. 동물들이 정글의 법칙을 따르는 까닭은, 딱히 문명을 추구해서라기보다 생존과 생태계 지속을 위해서다. 이를테면 러디어드 키플링의 원작에서 모든 동물은 인간을 잡아먹을 수 없는데 그 첫째 이유는 인간을 사냥할 경우 숲 전체가 총을 든 인간들에게 보복받기 때문이다. 존 파브로 감독과 작가들은 원작에 없는 적절한 설정들도 보탰다. 심한 가뭄으로 강바닥의 특정 바위가 수면 위로 드러나면 그것을 신호로 휴전(water truce)이 선포되고 육식동물의 사냥이 금지된다는 특별법이 하나다. 짐작건대 열린 곳으로 맘껏 나아가 물을 구할 수 없는 약한 동물부터 개체 수가 줄어 생태계 전체가 연쇄적으로 붕괴되는 사태를 막으려는 당연한 자구책인 셈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인간은 가장 당연하고 단순한 것을 가장 힘들게 터득한다.
*위 기사에서 <정글북>의 가뭄 휴전(water truce)과 ‘평화의 바위’가 영화가 보탠 설정이라는 기술은 사실과 다르므로 바로 잡습니다. 러디야드 키플링의 원작 <세컨드 정글북>에서 묘사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