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이 보이지 않는 광장이 있다. 그 광장엔 처음 보는 사람들로 가득하고 그들 각자의 목소리로 떠들어대고 있다. 뭐가 들을 만한 얘기인지 가려 듣는 것도 일이다. 약장수 같은 자극적인 어조로 목소리를 높이고 그러다 싸움이 붙고 누군가는 사이비 같은 복음을 전파하고 또 누군가는 사람들이 보건 말건 부끄러움도 모른 채 배설을 하기도 한다. 광장에 들어온 이상 피할 도리는 없다. 이쯤 되면 이 광장에 피로감이 생길 만하다.
지난해에 본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에서 줄리엣 비노쉬의 대사는 이랬다. “인터넷을 혐오한다.” 본인이 투영된 여배우 역할이었기에 더 설득력 있게 들린 대사였는데 인터넷이 혐오스러운 게 비단 유명인에게 국한된 일일까 싶긴 하다. 익명으로 무장된 무책임한 댓글들은 부분이다. 클릭 수에 의지하는 기사들은 팩트보단 자극으로 일관돼 피로감에 무게를 더한다. 확실하지 않은 정보는 광장을 나와 내 삶에 영향을 준다.
거듭된 혐오와 피로감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사실 방법은 간단하다. 광장에 가지 않으면 그만이다. 실제로 영화에서 줄리엣 비노쉬가 택한 방법이기도 한데 때문에 21세기 인간이냐며 놀림을 받지만 어쨌든 꽤 훌륭한 방법일 수 있다. 문제는 두 가지인데 첫째는 광장으로 들어가는 문이 가까운 곳에 점점 더 많이 생긴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난 그처럼 절제력이 강하지 못한 인간이라는 거다. 특히나 요즘처럼 시나리오를 써야 할 시기에 이것은 확실히 문제가 된다. 고민이 필요한 순간 정신을 차려보면 스마트폰을 들고 어느새 낄낄거리고 있다. 그래, 차라리 낄낄대면 정신건강에라도 좋지. 앞서 말한 피로를 느끼고 고스란히 광장으로 도피한 스스로에 대한 환멸로 이어지며 의욕은 뚝 떨어지는 전개가 되는 게 보통이다. 나의 삶을 ‘수험생인생’이라고 부르곤 하는데 평소 시험공부하듯 앉아 있어야 결과물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수험생인생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이런 고민은 흔한 것인가보다. 동지 한명은 미약하나마 자신의 노하우를 전수해주었다. 스마트폰을 뚝딱 만지더니 창을 흑백으로 만들어놓은 것이다. 홈버튼 세번을 누르면 흑백으로 전환되는 설정 기능이 있다나. 확실히 컬러감이 없으니 광장의 악다구니는 재미가 없어져 손을 덜 타는 효과는 있었다.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해 그런 물리력을 동원해야 한다니 어쩌면 난 인터넷이라는 위대한 발명을 쓰기엔 아직 미성숙한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총을 소유하는 것도 총기소지 자격이 필요한데 인터넷은 아무 법적 규제 없이 대중이 사용해도 괜찮은 건가? 댓글 살인이 일어나는 마당에 광장의 질서를 오직 성범죄에 국한하여 유해차단 사이트를 운영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걸까?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인터넷 접속 자격 시험을 만들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 시험이 있다면 난 합격할 수 있을까.
광장의 소음 속에 있다보면 정작 내 사고는 정지되고 끝은 늘 이런 파쇼적 상념뿐이다. 나의 일을 하기에 이 시대는 축복받지 못한 환경일 수도 있다. 나의 게으름을 시대탓으로 돌리는 글이나 쓰다니, 나 역시 광장 안의 못난이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