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월간 참 살뜰히도 준비했다 싶다. 제20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이하 부천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 새로 임명된 최용배 청어람 대표 얘기다. 보통은 영화제가 끝나는 8월부터 다음해의 영화제를 준비하는 것이 정석인데 뒤늦게 임명된 최용배 신임 집행위원장은 올해 1월부터 임기를 시작했다. 어떤 때보다 촉박했을 일정이다. 동시에 그는 한국영화제작가협회(이하 제협) 부회장이자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로도 재직 중이다. “일주일에 이틀은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이틀은 (부천에 자리한) 영화제 사무국에서 일했다”고 한다. 그 와중에 틈틈이 해외 영화제와 마켓을 찾아다니며 “영화제 공부”도 했다. “공부”의 결과는 7월21일부터 31일까지 열리는 영화제에서 확인할 수 있을 터다. 최용배 집행위원장의 임기는 3년이다. 앞으로 3년간 부천영화제의 지속적인 변화를 기대해봄직하다.
-집행위원장 위촉 후 가장 처음으로 한 일이 뭔가.
=당일은 생각이 안 나고 그 주간에 한 일은 기억난다. 부천시 곳곳의 공간을 다녀봤다. 낯선 도시였다. 앞으로 내가 머무르며 일할 도시를 빨리 이해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장 먼저 했던 것 같다.
-김영빈 전 집행위원장의 뒤를 이어 영화제를 이끌게 됐다. 임명 과정이 궁금하다.
=전 집행위원장의 임기가 끝나는 대로 영화제가 새 사람을 찾은 거다. 제안을 받았을 때는 고민이 많았다. 부천과 깊은 인연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영화제를 이끌어본 적도 없는 내가 제대로 위원장직을 수행할 사람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주변 영화인들과 의논을 해봤다. 가령 내가 안 한다면 누구를 추천해야 할까. 그러다 영화제의 과거에 대해, 오늘날의 위상에 대해 얘기를 나누게 됐고 영화인들에게 부천영화제가 소중한 자산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부천영화제가 20주년을 맞은 올해는 더욱 책임이 막중한 상황이다.
=결국 부산의 위기가 다른 영화제들에도 영향을 많이 미친 것 같다.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들어가 ‘헤쳐 모여’를 다시 해볼 만한 상황이기에 조직위원회가 나를 추천한 거라 생각한다. 현장 경험이 많은 제작자가 잘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인력 구성이다. 영화를 한편 만드는 동안 스탭과 배우를 균형 있게 구성하고, 그들이 각자의 역할을 잘해낼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게 내가 하던 일이었다. 필요한 일을 가장 잘할 수 있는 전문가들을 활용해 그들이 최대한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내가 다른 사람보다 잘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싶었다.
-2004년 김홍준 전 집행위원장의 갑작스런 해촉 등 과거 영화제의 파행에 대해 십여년 만에 공식적으로 유감을 표명한 것도 여러모로 새 출발의 의지로 읽힌다.
=집행위원장으로서 내가 제일 처음으로 짚고 넘어가야 하는 일이었다. 과거의 일을 모른 척하거나 끌어안고 갈 수만은 없겠다는 생각이었다. 문제를 인정하고 당시의 파행으로 피해를 입은 분들에게 유감 표명을 하자고 의견을 냈다. 김홍준 감독님은 해촉 이후로는 한번도 부천영화제를 방문하신 적이 없다. 그래서 이메일로 총회에서 의결된 내용을 공식 전달했다. 사과를 받아주시고 영화제에 와주시면 좋겠다고 내가 정식으로 초청을 드렸고, 김홍준 감독님은 ‘배려해줘서 고맙다. 올해 영화제는 꼭 참석하겠다’고 답변을 해주셨다.
-지난해와 비교해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은 어떤 것인가.
=영화로 기억되는 영화제를 만들자는 것. 영화인들로부터 이번 영화제 훌륭했다, 내 영화도 가볼 만하겠다는 말을 듣는 게 목표다. 프로그램도 프로그램이고, 영화를 보기 편한 환경도 필요했다. 지난해엔 곳곳에 흩어진 상영관에서 영화제 상영작을 틀었지만 올해는 CGV부천 8개관 중 4DX관을 빼고 7개관을 임대해 관객의 동선을 줄였다. 물론 만화박물관 내 상영관, 시청 내 상영관, 송내 어울마당 상영관, 오정아트홀이나 소사구청 소향관 등에서도 영화를 볼 수 있도록 할 거다.
-프로그래머진의 변화도 눈에 띈다.
=프로그램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기에 두명의 역량 있는 프로그래머를 새로 데려왔다. 김영덕 프로그래머는 1회 영화제 때 자원활동가였고 5, 6, 7, 8회 때는 프로그래머로 근무하다 부산국제영화제로 가 프로그램 팀장을 역임한 사람이다. 김세윤 프로그래머는 수년간 영화기자, 영화프로그램 방송작가로 활동했다. 새 프로그래머들이 1월부터 합류한 뒤론 그들에게 프로그래밍 전권을 위임하고 세계 각지를 샅샅이 뒤져 영화를 보고 좋은 작품을 열심히 가져와달라고 했다. 아주 충실하게 역할을 해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중화권과 동남아시아영화 전문가인 객원 프로그래머도 세 사람을 더 모셨다.
-부천영화제 시네마테크인 ‘BiFan 무비센터’(가칭)와 영화제 사무국 전용 공간을 건립한다는 계획은 어떻게 돼가고 있나.
=부천 시청 내 아카이브 공간과 80석의 시네마테크가 6월 말에 완공된다. 또 상암 DMC 스튜디오처럼 건물 하나를 새로 꾸며서 영화인이 입주해 작업할 수 있도록 하는 계획도 마련 중이다. 5년 정도를 바라보고 영화제 전용관을 건립한다는 계획도 준비하고 있다. 부지도 정해졌다. 공연도 하고 대관도 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활용할 예정이다. 부천이 문화도시로서의 위상을 뽐낼 수 있도록 하려고 한다. (웃음)
-그렇다면 만화, 애니메이션 등의 콘텐츠와도 연계할 수 있겠다.
=보통의 콘텐츠진흥원이 문화체육관광부 예산으로 만들어지는 데 반해 부천의 만화영상진흥원은 문화체육관광부 예산 절반, 부천시 예산 절반으로 운영되는 곳이라 지자체가 주도적으로 산업을 이끌고 있어서 더 자유롭고 유연한 연계가 가능해질 거다. 올해는 7월27일부터 열리는 부천국제만화축제가 주말 동안만 영화제와 겹쳐서 진행되는 정도지만, 내년부터는 (올해 10월에 열릴) 제19회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이 영화제와 같은 기간에 열릴 수 있도록 논의 중이다. 영화, 만화, 애니메이션이 고루 어우러지는 복합적인 축제가 될 거다. 영화제부터 권위와 안정성이 확실해야 확장도 가능할 테니 잘해보려고 한다.
-프로그램의 성격도 뚜렷해졌다. 월드 판타스틱 섹션을 레드, 블루로 분류하고 패밀리 존을 신설했다.
=영화의 질과 양을 동시에 확장하려는 시도다. 장편영화만 50편이 늘어났다. 해외에서 우리 영화제에 어울릴 영화를 죄다 가져오되 ‘부천영화제’ 하면 떠오르는 영화들 있잖나. 자르고 썰고 튀기고 하는…. (웃음) 그런 영화를 레드 섹션에 모았고, 블루 섹션엔 판타스틱 멜로라든지 더 넓은 범주에 속할 수 있는 영화를 분류했다. 패밀리 존을 신설한 건, 우리 영화제의 미래를 길게 보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제 참여에 익숙한 미래의 관객을 키우기 위해서다. 부천의 어린이들에게만이라도 그런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다.
-산업 실무 경험이 풍부한 제작자여서인지 포럼 등 산업 프로그램도 굉장히 강화됐다.
=영화제가 국내외 영화인들을 연결하는 다리이기도 하기에 그 역할을 견고하게 만들려고 한다. 기존에 있던 아시아판타스틱영화제작네트워크(이하 NAFF)에 세 가지 프로그램을 추가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산업 프로그램(BIFAN Industry Gathering, B.I.G)을 새로 만들었다. NAFF와 코리아 나우, 메이드 인 아시아, 뉴미디어다. 코리아 나우는 한국시나리오작가조합, 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 등 국내 직군별 단체들과 연계한 프로그램이다. 제협의 한•중 공동제작 케이스스터디인 사랑방좌담회와 같은 한•중 공동제작 활성화 포럼도 준비하고 있다. 메이드 인 아시아의 베스트 오브 아시아 섹션에선 지난해 아시아 10개국 박스오피스에서 1, 2, 3위를 한 영화들을 전부 초청해 상영하고 제작자를 모셔 세미나도 진행할 생각이다. 10년쯤 연속해서 하면 각국 상업영화 트렌드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연구자료도 될 것 같고, 제작자간의 교류를 통해 네트워크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누적될수록 유의미한 데이터가 될 거다. 또 장르영화야말로 당대의 최신 기술을 지속적으로 반영해온 장르잖나. 부분적으로 살아남거나 사라지곤 하지만 어쨌건 현재 가장 뜨거운 화두가 VR이다. 영화인들에게 VR을 온전히 경험하게 해줄 필요가 있다고 봤다. 뉴미디어 프로그램으로는 부천 마루광장에 VR돔을 설치하고 최신 콘텐츠를 모아 선보일 예정이다.
-상반기에 해외 영화제를 다니며 “공부”를 했다고.
=주요한 영화제와 마켓은 네트워크를 위해서라도 꼭 가야 했다. 트렌드도 살펴보고, 실제로 우리가 협조를 구할 만한 분들과 만남도 갖고, 영화도 모아야 하고, 심사위원이나 환상영화학교 교수들도 초빙해야 했으니까.
-영화인으로서와 집행위원장으로서 영화제를 다닐 때 어떤 차이가 있었나.
=집행위원장이 되니 하루 종일 일만 하게 됐다! (웃음) 제작자로 갔을 땐 일정만 소화하면 그 뒤에 여가를 즐길 수 있었는데 집행위원장이 되니 미팅, 파티, 회의의 무한 반복이었다. (웃음) 우리 프로그래머들이 영화제 팟캐스트 ‘한여름의 판타지아’를 진행하고 있는데 어느 게스트 한분이 무슨 지역의 유명한 박물관이 훌륭하다고 하셨다. 그런데 우리 프로그래머들이 그 박물관의 존재를 아무도 모르더라. 거기 가서 일만 하고 왔으니까. (웃음) 아무튼 나도 처음이라 온갖 데서 많이 배웠다. 영화제마다의 특성을 이해하고 아이디어를 많이 얻어왔다. 그게 이렇게 저렇게 적용이 되고 있는 것 같다.
-6개월 동안 어떻게 그 많은 일들을 했나.
=어떨 땐 너무 힘들어서 후회도 하고…(웃음), 어떨 땐 스탭들과 즐겁게 일하며 잠시 행복하기도 했다. 집행위원장을 하면서 광의의 영화와 영화문화와 영화산업에 대해 내가 모르던 것들을 배운다는 보람이 느껴지더라. 제작자로 일할 땐 모르던 것들을 새로 배웠다. 나에게 무척 소중한 기회다.
-여러 일을 벌여놓았는데, 지금까지의 예산 규모로 그게 다 가능하던가.
=지난해 대비해 예산이 20% 정도 늘었다. 국비가 조금 늘었고, 시에서 지원하는 예산이 크게 늘었다. 지난해에 39억여원이었는데 올해는 47억여원이다. 20회 영화제라 배려받은 것도 있는 것 같다. 예산이 늘어난 좋은 환경이니 잘 활용해서 영화제를 재밌고 편안하게 꾸려볼 생각이다.
-조직위원장으로 정지영 감독이 위촉됐다. 조직위원장 교체로 인한 변화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나.
=지자체와 정부기관, 그리고 영화인들이 서로 소통을 하거나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 때 양쪽의 신뢰를 받는 사람이 꼭 필요하다. 정지영 감독님이 그런 상징적 통로가 돼주실 거다.
-함께 부천영화제의 미래에 대해 얘기한 바도 있나.
=모범적인 영화제 조직을 만들어가보자는 것. 내가 집행위원장을 하는 이유도, 정지영 감독님이 조직위원장을 맡아주신 이유도 오로지 그거다. 나 아닌 누가 집행위원장으로 오더라도 그 사람의 개성을 잘 반영할 수 있도록 기본적으로 견고한 영화제의 인프라를 만들어두는 게 중요할 것 같다.
-신임 집행위원장으로서 영화제 운영에 대한 어떤 비전을 갖고 있나.
=영화제를 숱하게 다녀보며 우리 영화제와 뭐가 다른지 계속 비교해봤다. 해외 관객은 자기 지역에서 영화제가 열리면 꼭 영화를 본다는 생각이 있더라. 영화제 안 할 땐 상업영화를 극장에서 보고, 영화제를 할 땐 영화제 상영작을 본다. 우리나라는 극장에서 거의 그 당시의 가장 상업적인 영화를 보잖나. 영화제에 영화가 설 자리가 없는 문화가 아닌가 싶었다. 영화제가 추구하는, 보석 같은 상영작들을 자연스레 찾는 관객을 만드는 것. 5년 뒤, 10년 뒤에 영화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관객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봤다. 최소한 부천시에서부터라도 영화제 문화를 바꾸어나가고 싶다.
-올해의 영화제 굿즈도 무척 궁금하다. 포스터를 보아하니 굿즈도 상당히 예쁠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머그컵을 추천한다. (웃음) 짙은 푸른색인데 색상이 상당히 예쁠 거다. 종류는 많지 않더라도 구매자들이 정말 갖고 싶어 하고 사용하고 싶어 할 만한 물건을 만들자고 독려했다. 여러 가지로 기대해도 좋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