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시들고 멍한 느낌으로 영화구경을 가고 양복점에 들른다. 독선과 주장의 틈바구니에서 시달리고 있는 덩치만 큰 백조처럼 이발소에서 담배를 피우며 피투성이 살인을 외친다. 인간으로 살기도 힘들다.” <일 포스티노>(1994)에서 평소 문학에 아무런 관심도 없던 우편배달부(마시모 트로이시)는 바로 그 마을로 망명생활을 오게 된, 그리하여 우편물을 갖다 주러 매일 얼굴을 마주하게 된 대시인 파블로 네루다(필립 누아레)의 시를 우연히 읽고는 그에게 완전히 빠져든다. 설명을 부탁하는 그에게 네루다는 “시는 설명하면 진부해져. 나는 내가 쓴 것 이상으로 내 작품을 더 설명할 수는 없어”라고 답한다. 여자들이 좋아하니까 시인이 되고 싶다는 그에게 이렇게도 덧붙인다. “그냥 우편배달부 일을 해. 많이 걸으니 살도 안 찌고 얼마나 좋아. 시인들은 나처럼 다 뚱뚱해.”
물론 시를 쓰고 싶다는 그를 완전히 모른 체한 것은 아니다. 어떻게 하면 시를 잘 쓸 수 있냐는 물음에 “해변을 따라 걸으면서 주위를 천천히 살펴보게”라며 집요하게 주변을 ‘관찰’할 것을 주문한다. 이창동 감독의 <시>(2010)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시를 가르치는 작품 속 김용탁(김용택) 시인은 시를 쓰기 위해서는 “잘 보아야 한다”고 되풀이해 말한다. 그래서 양미자(윤정희)는 식탁에 앉아 사과를 들어 유심히 쳐다본다. 눈에 들어와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진짜 관심을 기울여 집중해서 보려 한다. 하지만 이내 “사과는 역시 보는 것보다 깎아먹는 거야”라며 우두커니 앉아 사과를 깎아먹는다. 도무지 시상이 떠오르지 않아 그냥 사과를 깎아먹은 양미자의 답답한 마음처럼 시는 참 어렵다. <일 포스티노>의 우편배달부도 자신에게 문학적 재능이 없음을 깨닫고는, 마을을 떠난 네루다에게 편지가 아니라 그가 그리워할 법한 마을 해변의 파도 소리, 성당의 종소리 등을 녹음하여 테이프에 담아 보낸다. 스승에게 시인으로서 발전 없는 자신의 현재를 보여주기 싫었던 마음일지도 모른다.
<씨네21> 1062호 특집은 젊은 시인들과의 만남이다. 지난해의 젊은 소설가들과의 만남처럼, 영화의 친구들과의 만남이라고나 할까. 최근 주변에서 다시 시(詩)를 찾아 읽는 사람들이 늘었음을 느끼던 차에 <씨네21>의 프로감성러 이주현, 정지혜, 이예지 기자가 여덟명의 시인을 만났다. 이번에 만나지 못한 다른 시인들과도 언젠가 반드시 만남을 청하고 싶다. 아무튼 여덟 시인의 인터뷰를 보면서 느낀 건, 윤동주 시인이 <쉽게 씌여진 시>에서 “인생(人生)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詩)가 이렇게 쉽게 씌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얘기했던 것처럼, 하나같이 지금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했다는 점이다. 황인찬 시인은 “첫 시집이 나온 시점에 현 정권이 탄생했다”며 “‘잠깐 멈추고 바라보기’가 이 시대에 유용한 방법이 아니구나, 라는 게 첫 시집에 대한 가장 큰 불만이고 반성이었다. 첫 시집의 시들이 왠지 무력해 보였다”고 했고, 유희경 시인은 “요즘 같은 시대에 어떤 희망이 있겠나. 반항보다는 한없이 비애에 젖어 슬퍼하는 태도지만 적어도 비겁해지지는 않으려 노력한다”고 했다.
어쩌면 그렇기에 시의 은은한 파장력이 지금 더 우리 마음 깊숙이 들어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문득 서울 종로구 청운공원에 있는, 오래된 수도가압장과 물탱크를 개조해 만든 윤동주 문학관의 소개글이 떠올랐고, 일주일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가압장은 느려지는 물살에 압력을 가해 다시 힘차게 흐르도록 도와주는 곳이다. 세상사에 지쳐 타협하면서 비겁해지는 우리 영혼에 윤동주의 시는 아름다운 자극을 준다. 그리하여 윤동주의 시는 영혼의 물길을 정비해 새롭게 흐르도록 만든다. 윤동주 문학관은 우리 영혼의 가압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