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터/액트리스]
[액터/액트리스] 백발의 액션 히어로 - <사냥> 안성기
2016-07-05
글 : 장영엽 (편집장)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2015 <사냥> 2015 <필름시대사랑> 2014 <화장> 2014 <신의 한 수> 2012 <주리> 2012 <페이스 메이커> 2011 <부러진 화살> 2011 <제7광구> 2009 <페어 러브> 2007 <마이 뉴 파트너> 2007 <화려한 휴가> 2006 <라디오 스타> 2005 <형사 Duelist> 2003 <실미도> 2002 <피아노 치는 대통령> 2002 <취화선> 2001 <흑수선> 2000 <킬리만자로> 1999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선배님, 짐승돌입니다, 짐승돌.” <사냥>의 VIP 시사회가 끝난 뒤, 후배 배우 이정재는 안성기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야, 뭘 그렇게까지…’라고 말하긴 했는데. (웃음) 내가 영화에서 시종일관 액션을 한다는 데 정재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놀라는 것 같다. 다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고 하더라.”

그의 말대로다. 안성기가 액션을 선보이는 영화라고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사냥>은 ‘액션 배우’ 안성기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그가 연기하는 기성은 람보처럼 굵은 탄환을 어깨에 두르고 험한 숲속을 바람처럼 질주하는 노인이다. 지키고 싶은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탄광 사고로 동료들을 모두 잃고 침잠하던 그를 움직이게 한다. 그 존재는 마을 노파의 손녀이자 개인적으로 무척 아끼던 소녀 양순(한예리)이다. 산속에서 발견된 어마어마한 양의 금을 독차지하기 위해 금의 존재를 아는 모든 이들을 ‘사냥’하려는 엽사들에 맞서 노인은 소녀를 지켜야 한다. 흥미로운 점은 금세 끝날 줄 알았던 승부가 좀처럼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각종 사냥 장비로 무장한 혈기왕성한 엽사들은, 산을 누구보다 잘 아는 노인의 반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이토록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백발의 액션 히어로를 그동안 어떤 한국영화에서 볼 수 있었던가.

더불어 <사냥>은 배우 안성기의 얼굴이 아닌 몸의 움직임에 오롯이 주목했던 순간이 너무 오래전 일이었음을 새삼 깨닫게 만드는 영화다. 적지 않은 키에 운동으로 다져진 단단하고 날렵한 몸을 가진 그이지만, 안성기라는 이름 석자를 들을 때 우리는 늘 그의 몸보다 얼굴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세월의 흔적에 그 어떤 물리적인 제동도 걸지 않은, 깊이 있고 자연스러운 얼굴. 다양한 사연과 감정의 결을 담고 있는 그 풍부한 얼굴에 우리는 매료되었던 것 같다. <사냥>의 안성기는 조금 다르다. 그가 맡은 기성은 오랜 시간 동안 ‘산사람’으로 살아온 이만이 체득했을 생존본능과 동물적인 감각을 지닌 인물이다. 다시 말해 클로즈업만큼이나 몸의 움직임이 중요하게 표현되어야 하는 인물이 바로 <사냥>의 기성인 것이다. 대개 30, 40대 남자배우들을 위해 기획되곤 했던 이러한 액션 장르의 영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건 배우로서 연기 폭을 넓힐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고 안성기는 말한다.“ 언제부턴가 제대로 된 액션을 선보일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돌이켜보니 액션 장르의 영화에 출연했던 건 <실미도>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사냥>이 내게 왔을 때 무척이나 반가웠다. 이 나이대에 본격적인 액션영화에 출연할 수 있다는 게 정말 좋더라.” 그렇게 안성기는 장총을 들고,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테스토스테론 가득한 액션영화의 세계로 뚜벅뚜벅 걸어들어갔다.

안성기의 대역을 맡은 스턴트맨이 “밥만 축내서 죄송하다”고 말할 정도로, <사냥>을 촬영하는 동안 액션은 그에게 큰 장애물이 아니었다. 군에 복무하던 시절사단을 대표하는 사격 선수로 선발될 만큼 총을 다루는 데 자신이 있었거니와 지난 40여년간 매일 한 시간 이상 운동을 거르지 않으며 체력을 비축해왔기 때문이다. 영화의 초반부 촬영을 진행할 때에는 산에서 뛰어내려오는 그의 속도를 카메라가 따라오지 못해 NG가 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말하면 내 체력을 걱정했던 사람들에게는 조금 맥 풀리는 얘기일지도 모르지만, 도망다니거나 추격하는 장면은 전혀 부담이 없었다. (웃음) 다만 산속에서 조진웅씨와 맞붙는 장면만큼은 두 인물이 사력을 다해 싸우는 장면이다보니 신경을 많이 썼다.”

오히려 액션보다 그에게 고민을 안겨준 건 계속되는 추격전 속에서 기성이라는 캐릭터의 심리적 변화를 외적으로 어떻게 표현해낼 것인지였다. “이 캐릭터를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긴 머리를 올려 묶은 독특한 헤어스타일이다. <사냥>을 유심히 보면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그의 머리가 조금씩 풀려나가는걸 볼 수 있다. 마치 숲속에 사는 짐승처럼 말이다. 과거에 동료들을 잃은 상처로 세상과 고립되어 살아갔던 그가 양순이와의 관계를 통해 점차 마음의 문을 열고 보다 자유로워지는 모습을 기성의 외적 변화를 통해 표현하고 싶었다.” 넓은 어깨가 드러나는 민소매 셔츠를 입는다는 설정 또한 안성기의 아이디어였다(그가 영화에서 입는 민소매 셔츠는 그가 집에서 직접 가져온 의상이다). 머리가 허옇게 센 노인이지만 엽사들에게 밀리지 않을 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점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란다. “까무잡잡하고 건강해 보이는 몸”을 위해 지난 여름 선탠까지 시도했지만, 촬영이 예정보다 늦춰져 가을부터 시작했기에 준비된 몸을 생각만큼 선보이지 못한 건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그는 덧붙였다.

<사냥>은 영화배우로서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안성기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는 작품이다. “무엇이든 아직 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줄 수 있었던 영화이기 때문이다. 한국영화계의 명실상부한 대선배로 자리하고 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배우로서 선택할 수 있는 역할의 폭이 좁아지고 있다는 건 ‘대배우’에게도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선택의 폭이 좁아지고 있다고 처음 느꼈던 순간은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촬영할 당시였을 거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무조건 주인공 아니면 특별출연으로 영화에 출연했었다. 그런데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경우, 역할은 근사하고 좋은데 배역이 작더라고. (웃음) 그때가 50대 무렵이었는데, 이때부터 배우의 욕심대로 작품을 할 수 없다는 걸 본격적으로 깨닫게 됐다. 누구라도 마찬가지일 거다. 언젠가는 배우로서 맡게 되는 역할의 비중이 줄어들 수 있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어떤 인물을 연기하든 배우로서의 존재감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건 언제까지나 지켜내고자 하는 안성기의 원칙이다. 지금까지 거쳐온 수많은 역할이 그의 말을 방증한다. 쉰살이 넘도록 연애 한번 못해본 남자(<페어 러브>)와 한치의 타협도 없는 깐깐한 교수 (<부러진 화살>), 맹인 바둑기사(<신의 한 수>), 아내의 장례식에서 부하 여직원에 대한 욕망의 감정에 괴로워하는 중년의 남자(<화장>). 안성기의 필모그래피는 흥미롭게도 현실세계에서의 그가 선점한 다정다감하고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의 이미지와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 “누구나 짐작 가능한 인물을 연기하는 건 내가 가장 지양하려는 선택이다. 같은 나이대의 인물을 연기하더라도 그만의 에너지를 지닌, 그로부터 어떤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느낌을 주는 인물을 연기하고 싶다.”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먼저 걸어야 하는 사람은 외롭다. 대다수의 선배, 동료 배우들이 떠난 충무로 현장에서 여전히 작품 활동 중인 안성기는, 고령에도 여전히 어마어마한 에너지로 활동을 이어나가는 외국 배우들을 떠올리며 마음의 중심을 잡는다고 한다. “<인턴>(2015)의 로버트 드니로를 보라. 그 나이가 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얼마나 근사하게 보여주고 있나. 앤서니 홉킨스도 나이가 많지만 기가 대단하더라. 모건 프리먼은 <제7기사단>(2015)을 촬영하며 만났는데, 한장짜리 대사를 멈추지 않고 줄줄 외더라. 이 사람들을 보면, 결국 중요한 건 자기와의 싸움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그가 최근 준비하고 있는 작품은 <워낭소리>(2009)를 연출한 이충렬 감독의 신작 <매미소리>다. 상갓집에 가서 분위기를 띄워 슬픔을 잊게 하는 진도 다시래기꾼 역할이란다. 이들의 타령을 녹음해 생각날 때마다 흥얼거리며 조금씩 차기작과의 거리감을 좁히는 중인 안성기는 하루하루 쌓아 올린 습관과 노력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렇게 데뷔 59년차 배우의 발자취는 오늘도 새롭게 쓰인다.

<남부군>

혹독했을 그 겨울산의 정취

<사냥>의 몇몇 장면은 역시 자연을 배경으로 한 안성기의 출연작 <남부군>(1990)을 떠올리게 한다. 정지영 감독과 함께한 이 작품에서 안성기는 남에서 쫓기고 북에서 버림받는 빨치산들의 기구한 운명을 기록하다가 그들의 투쟁에 휘말리게 되는 종군기자로 출연했다. “그때는 1년 동안 계절이 바뀌기를 기다려가며 찍었다. 마치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촬영 분량이 길었다. 예를 들어 겨울에 촬영을 할 때에는 눈덮인 오대산 속에서 새벽 다섯시에 일어나 촬영 준비를 했다. 머리에 연탄재를 뿌려놓고 아침을 먹은 뒤 동이 트면 그때부터 촬영을 시작했다. 웃통을 벗고 얼음물 속에 들어가면 너무나 추운 나머지 쇼크가 와 30분간 말도 못할 정도였다. <사냥>에도 물속에 머리를 담그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때도 꽤 추웠지만 <남부군> 생각을 하며 버텼다. (웃음)” 관객의 입장에서 보기엔 장관이지만 배우에겐 말도 못하게 혹독했을 그 겨울산의 정취가 이 장면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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