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20여년간 지속 가능했던 외로움의 연대 <환상의 빛>
2016-07-06
글 : 김소희 (영화평론가)
<환상의 빛>

제작된 지 20여년 만에 처음으로 국내 개봉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장편 극영화 데뷔작이다. 유미코(에스미 마키코)에게 남편 이쿠오(아사노 다다노부)의 부고가 전해진다. 경찰은 이쿠오가 선로 위를 걷고 있었고, 달려오는 기차를 피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사실상 자살이다. 전조는 없었다. 둘은 어릴 때부터 한동네에서 자란 친구였다. 서로에 대해 잘 알았고, 여전히 사랑했다. 최근에는 3개월이 된 아들 유이치를 맡겨두고 단둘이 데이트도 했다. 그녀는 시신을 확인하려 했지만, 경찰은 알아볼 수 없을 것이라며 만류한다. 남편이 남긴 것은 그녀가 남편에게 줬던 방울 모양의 열쇠고리다. 그로부터 몇년의 시간이 흐른다. 유미코는 이웃의 소개로 만난 타미오(나이토 다카시)와 재혼을 결심하고 집을 떠난다.

영화의 도입부,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가방을 들고 큰 도로를 향해 걸어가는 뒷모습이 보인다. 할머니가 코너를 돌아 시야에서 사라진 뒤 굉음이 들려온다. 혹시 사고를 당한 걸까. 다행히도 다음 컷에서 할머니는 뒤따라간 어린 손녀 유미코와 마주한다. 손녀의 만류에도 할머니는 떠난다. 암전 속에서 목소리로만 진행되는 다음 컷에서, 유미코는 이쿠오에게 꿈을 꿨노라고 말한다. 환한 꿈과 검은 현실의 대비는 관객에게 삶과 죽음의 자리를 뒤바꾸어볼 것을 제안하는 듯하다. 남편의 죽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없었던 유미코에게 죽음이란 사라지는 것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도착한 것(열쇠고리)에 가깝다. 이는 감독이 왜 줄곧 죽음을 그려왔는지, 그러면서도 그것이 죽음으로 읽히는 것을 부정해왔는지를 보여준다.

공들인 흔적이 여실히 묻어나는 미장센과 사운드는 그것이 인물의 사연, 감정과 조응하는 방식으로 기능하기에 결코 공허하지 않다. 다큐멘터리스트에서 출발한 감독은 취재 중 알게 된 어느 미망인의 이야기와 미야모토 데루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이 작품을 만들었다. 영화의 이야기는 서사에서 동떨어진 것으로 보이는 인물을 품을 때 빛을 발한다. 이를테면 자신의 라디오 소리를 참아준 유미코 가족에게 작은 사탕을 작별 선물로 준 옆집 노인의 이야기 등이 마음에 박힌다. 외로움의 연대를 직조해온 감독의 작품 세계의 뿌리가 또렷이 느껴지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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