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영화]
[내 인생의 영화] 박찬일의 <시네마 천국> 토토 어딨니?
2016-07-13
글 : 박찬일
<시네마 천국>

그때는 입소문이란 게 인터넷을 타고 돌지 않았으니, 이른바 ‘진성’이었다. 문 닫고 댓글 조작단을 꾸려서 홍보 효과를 낼 수는 없었다. 스포일러도 극히 개인적이었으며( ‘글쎄 주인공이 다시 살아난대’ 하는 정도의), 고작 한다는 게 개봉날 가짜 손님을 줄세우는 정도였다. 단관 개봉이 대부분이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시네마 천국>이 입소문을 타기 전이었다. 나랑 내 친구. 의대 다니던 그 녀석은 유급 전문이었고 나는 원래 학교를 안 가는 버릇이 있던 때였다. 주제가의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극장을 나서다 나는 결심했다. “시칠리아에 가는 거야.”

영화는 원래 사기다. 사단장이 예고하고 시찰 나온 훈련장 같은 거다. 눈에 보이는 게 다 가짜다. 그런 줄 몰랐다. 시칠리아에 가서야 알았다. “토토는 어디 있는 거야, 도대체.”

<시네마 천국>은 이탈리아에 관한 환상극이다. 알면서도 속는다. 영화를 본지 몇년 후의 일이다. 한창 잡지사 기자로 일할 때였다. 비슷비슷한 영화가 자주 극장에 걸렸다. <시네마 천국>과 비슷한 영화들이었다. <일 포스티노> <그랑블루> <지중해>…. 다니던 잡지사를 때려치웠다. <시네마 천국>의 땅으로 가고 싶었다. 지중해=푸른 바다=미인=스파게티. 푸른 바다에서 미인과 놀 팔자는 아니니 지중해=스파게티로 압축했다. 그걸 배워서 먹고살자, 평생 특종 한번 못 잡았으니 잡지 기자 할 팔자가 아니었다. 남의 점심 먹는 자리에 끼어 재벌의 결혼 뒷얘기를 기사로 쓰는 몰염치가 없었던 것일까. 집사람에게 말했다. 전세금 빼서 다오, 평생 먹고살 기술을 배워오마. 이탈리아 북부에 요리학교가 있었다. 카르보나라나 상하이 스파게티는 안 가르쳐줬다. 슈림프 크림 밀키 크러스트 치킨 피자도 수업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렇게 학교를 때우고 지중해 저 밑의 시칠리아로 실습을 갔다. 전생에 나는 시칠리아 사람이었어, 하고 최면을 걸었다. 학교 안 가고 호암아트홀에서 그 영화를 본 것도, 막 한국에 스파게티 문화가 생기던 것도, 하필 어느 날 펼친 잡지에서 ‘이탈리아 요리 유학생 모집’ 광고를 본 것도, 아내가 용감하게 전세금을 빼준 것도(아직도 그 전세금을 복구하지 못했다) 운명이라 우겼다.

나는 토토급은 아니었어도 시네마 키드이긴 했다. 토토는 영사실에 드나들지만 한국에서는 아무나 영사실에 갈 수 없었다. 극장 주인 아들이라면 모를까, 대신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 일본 군복을 닮은 가쿠란 교복을 입고 학교 대신 이대 앞 대흥극장에 다녔다. 동시상영의 골수팬이었다. 칼을 맞으면 분홍색 페인트를 뿌리던 엉터리 무협영화를 도시락 까먹으면서 봤다(엄마, 미안해요, 정독도서관에 간 게 아니었어요). <시네마 천국>에서는 할 일 없는 이탈리아인들이 극장을 가득 메운다. 우리도 그랬다. 그들보다 더했다. 스크린에 줄이 죽죽 가면서 필름이 끊어지면 영사실의 ‘흥행사’인 한국인 알프레도에게 야유를 보냈다. 담배를 피우며 목판에 오징어와 땅콩을 담아 파는 소년들이 지나가면 욕설을 퍼부으면서 소리쳤다. “야 이 새끼야, 빨리 지나가!”

YMCA 옆에 있던 우미관을 내 집 드나들 듯했다. 옥상에 기어 올라가 문을 따고 객석으로 침투했다. 김추련(명복을 빈다)의 터프한 가죽점퍼를 입어보는 게 소원이었고, 원미경 누나의 누드신이 대역이 아니길 빌었다. 시네마 키드, 아니 공짜 침입자로 영화를 보았다. 그 공덕이 쌓여 <시네마 천국>을 보았다. 기어이 이탈리아에 갔고, 되도 않는 파스타로 먹고산다. 영화에서 토토는 성장한 후 옛 극장에 들러 회상에 잠긴다. 인생은 그런 거라고, 사라지고 없어지는 것을 그리워하는 것이라고. 딱 한번만 <시네마 천국>을, 그 넓은 호암 아트홀 같은 데서, 조조를 끊어 친구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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