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분야든 내가 좋아하는 수많은 어떤 것 중 굳이 우선순위를 가리거나 하나를 선택하는 상황 자체를 힘겨워하는 나같은 사람에게 ‘내 인생의 영화’를 소개해달라니 정말이지 어려운 미션이 아닐 수 없다.
동네에서 ‘비디오 가게 아들’로 불리며 반 친구들의 부러움 속에 신작 비디오를 가장 먼저 보던 초등(국민)학교 시절부터 어쩌다 보니 (아마도 최후의 물리 매체로 예상되는) 블루레이를 직접 만드는 ‘비디오 제작 업자’로 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까지 셀 수 없이 많은 영화를 보았을 것이다.
당시를 살아온 시대의 풍경과 함께 박제된 듯 아직도 내 기억에 선명히 남아있는 이른바 ‘인생 영화’를 꼽는다면 대부분의 할리우드 키드가 그렇듯 스티븐 스필버그와 로버트 저메키스의 영화들로 리스트가 채워지는 것 같긴 하다. 하지만 굳이 ‘인생’을 거론하면서까지 내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영화로 더 집요하게 범위를 좁혀보자면 역시 <멜랑콜리아>(감독 라스 폰 트리에, 2011)라는 작품이 영화 속 두개의 달처럼 선연하게 떠오른다.
기묘한 악취미를 느끼게 하면서도 북유럽 정서 특유의 묘한 아름다움이 혼재하는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를 오랫동안 즐겨왔기에 그해 칸국제영화제에서 여러모로 화제가 된 <멜랑콜리아>에 대한 기대감 역시 남달랐음에도, 당시 연일 마감 업무에 치여 살던 때라 영화의 한줄 기본 설정 외에는 일체의 리뷰나 감상평을 읽지 않은 채로 (종영 직전에야) 심야 상영관을 찾았다. (참, 감독이 칸국제영화제 기자회견에서 쓸데없지만 왜인지 그다운 발언으로 영화제를 발칵 뒤집었다는 소식을 듣긴 들었다.)
영화가 시작되고 나를 포함해 단 3명의 관객만이 상영관에 앉아 있음을 눈치채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가 매번 그랬듯 이번 영화도 흥행은 틀렸구나 싶은 생각을 하는 것도 잠시, ‘아니 이 양반이 지금 무슨 영화를 만든 거야?’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바그너의 장중한 오페라곡을 배경으로 마치 주술에 휩싸인 듯한 회화적이고 몽환적인 영상미로 혼을 빼놓는 압도적인 도입부는 이 ‘유서 깊은’ 괴짜 감독이 자신이 가진 재능으로 표현할 수 있는 ‘위압미’(威壓美)의 절정처럼 보였다.
거의 정지 화면에 가까운 극단적인 슬로모션 기법임에도 8초 같은 8분의 도입부가 지나가고, 지독한 우울증에 걸린 라스 폰 트리에식의 인간 군상을 나열하는 조금은 지루한 1부의 드라마가 계속되는 와중에도, 도입부의 감흥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어서 블루레이로 그 장면을 다시 보고 싶긴 한데, 과연 이런 영화가 블루레이로 한국에 출시 될까 하는 따위의 관객의 본분을 잊은 잡생각이 머릿속을 오가기도 잠시, 숨도 쉬기 힘들 만큼 시한폭탄 같은 서스펜스로 점철되는 2부의 느린 듯 빠른 전개와 상상을 넘어선 (역시 라스 폰 트리에다운) 충격적인 엔딩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즉시 중대한 결심을 하게했다.
고사 직전의 2차 물리 매체 시장에서 이 끝내주는 (다양성) 영화를 블루레이로 내줄 회사가 있을 리 만무했다. 안타깝고 분했다. 아니지, 그냥 내가 만들면 되잖아! 다음날 해가 뜨자마자 무작정 수입사를 수소문해 전화를 했고, 다시 이틀 후 ‘아니, 이 영화를 왜 굳이 블루레이까지?’라는 반응을 보이는 수입사를 직접 찾아갔고, 그다음 날 블루레이 판권 구입 계약서를 썼다. 과열된 경쟁으로 영화 수입사들과 마찬가지로 화제의 신작은 영화가 완성되지도 않은 시점에서 선급금 계약으로 DVD, BD 판권 계약을 하기도 하는 지금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누구도 원하지 않았기에 경쟁 없이 일사천리, 속전속결로 진행된 판권 구매였다. 그렇게 영화 <멜랑콜리아>는 블루레이 전문 브랜드 ‘플레인아카이브’ 역사의 잊을 수 없는 오프닝 신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