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너브러더스가 폭스에 이어 한국 로컬 프로덕션을 세워 본격적으로 한국영화 투자·제작에 나섰다. 9월 개봉예정인 김지운 감독의 <밀정>은 워너브러더스코리아가 제작한 첫 작품이다. 아이픽쳐스, 바른손, NEW, 위더스필름의 대표로 있는 동안 <결혼은, 미친 짓이다>(2001),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 <변호인>(2013) 등을 제작한 최재원 대표는 지난해부터 워너브러더스코리아 대표로 업무를 시작했다. 그는 워너브러더스가 “현지 프로덕션에 거의 모든 권한을 쥐여줬다”며 “좋은 영화 발굴, 재능 있는 신인 발굴이 가능한 구조”에 대해 강조했다. 모니크 에스크라비삿, 마크 가레통 워너브러더스 인터내셔널 프로덕션 부문 사장단도 한국을 찾았다. 이들은 거듭 “한국영화계와 장기적으로 상생”하고자 하는 뜻을 내비쳤다. 지난 7월27일 세 사람을 만났다.
-워너브러더스의 한국 로컬 프로덕션은 지난해 설립했지만 8년 전부터 한국영화 투자·제작을 검토해온 것으로 안다.
=모니크 에스크라비삿_ 한국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시장이다. 워너브러더스에서 제작하는 영화의 전세계 박스오피스를 살펴보면 언제나 한국은 흥행국 톱5 안에 들어 있다. 또한 자국 영화가 많은 사랑을 받는 나라다. 자국 영화의 시장점유율이 50% 이상 유지되는 나라는 흔치 않다. 한국처럼 중요한 시장에 진출할 계획은 진작 갖고 있었고, 단지 언제가 되느냐 하는 시기의 문제였다. 현지 프로덕션을 잘 꾸려나갈 사람들을 찾는 데 신경을 많이 썼다.
=마크 가레통_ 한국은 뛰어난 영화 전문인력이 많아 현지 프로덕션을 진행했을 때 긍정적인 결과를 이끌어낼 것으로 판단했다.
-한국 진출 시 발생할 수 있는 위험 요소도 따져봤을 것 같다.
=모니크 에스크라비삿 영화 비즈니스는 늘 위험 요소로 가득하다. 매번 위험 요소를 최대한 제거해 영화를 만드는데도 성공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래서 매번 배우면서 일한다. 동시에 영화는 흥미로운 비즈니스다. 열심히 만든 영화를 사람들이 좋아하면 큰 보람을 느낀다. 관객에게 사랑받는 영화를 만드는 꿈, 그런 꿈을 계속해서 좇고 있다. 지금은 한국에서 그 꿈을 좇으려 한다.
=최재원_ 관객이 좋아하는 영화를 만드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예전엔 영화 만드는 것 자체가 자랑스럽고 보람찬 일이었다.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더라. 내가 만든 영화를 많은 관객이 볼 수 있도록 만드는 작업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할리우드 스튜디오와 함께 일하며 많이 하게 됐다.
-영화를 기획, 제작하고 투자받는 과정 혹은 의사결정 방식이 워너브러더스코리아에선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궁금하다. 한국의 제작사·투자사에서 일할 때와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로컬 프로덕션에서 일하는 지금 어떤 차이가 있나.
=최재원 한국의 일반적 투자자, 제작자였다면 신인들의 작품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분명 많은 명분이 필요했을 거다. 책(시나리오)도 재밌어야 하고 그외에 다른 무언가도 있어야 하고…. 워너브러더스에선 시나리오가 가진 장점을 많이 본다. 영화의 본질에 더 접근한다고 해야 할까. 영화 이외의 것에 눈치를 좀 덜 본다고도 할 수 있겠다. 또 한국영화계에 개발비는 더이상 없다고 얘기하는데, 여기선 기획 및 개발 과정에 여유를 많이 준다. 그런 것이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이다. 그래서 다양한 성향의 작품으로 라인업할 수 있는 것 같다. 김지운 감독의 <밀정>처럼 큰 프로젝트도 있고, <싱글라이더>(감독 이주영·출연 이병헌, 공효진)처럼 신인감독의 작은 작품도 있고. 제작사에 있을 때 꿈꾼 건데, 루키들을 키워내는 게 가능한 구조다. 제작 관리 측면에서도 도움을 많이 받았다. 나름대로 이쪽에서 전문가 소리 듣던 사람인데(웃음) 워너브러더스 본사가 가진 제작과정의 노하우, 예산 관리나 스케줄 운용 시스템에 관해 많은 것을 배웠다.
-<밀정>은 어떤 점에서 매력적인 프로젝트라 판단했나.
=모니크 에스크라비삿 우선 최재원 대표의 안목을 믿었다. 김지운 감독은 이미 해외에서도 잘 알려진 감독인 데다 최 대표가 <장화, 홍련>(2003),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으로 김지운 감독과 작업한 경험이 있다. 시나리오도 좋았다. 흥미로운 이야기, 흥미로운 액션으로 가득한 영화였다.
=마크 가레통 한국영화는 대체로 구조가 잘 짜여 있는 것 같다. <밀정>도 제작 가치가 높은 영화였다. 시나리오도 탄탄하고 김지운 감독과 송강호, 공유 배우 등 재능 있는 영화인이 모여 만든 영화라 해외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지 않을까 기대한다.
=최재원 1920, 30년대는 현대도 아니고 근대도 아닌 모호한 시대다. 상하이라는 국제도시의 특성도 흥미롭고. 김지운 감독은 그걸 ‘콜드 누아르’라고 표현하기도 했는데, 이런 배경을 활용해 긴장감 있는 스파이 드라마 장르를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이후 8년 만에 김지운 감독, 송강호 배우와 다시 만나 찍은 영화라 그때의 추억을 되새기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다행히 토론토국제영화제에도 초청되고, 본사 분들도 좋게 봐줘서 기쁘다.
-제작과정에서 본사의 의견은 어느 정도 반영되나.
=최재원 다행히 현재까지는 본사에서 관여한 적이 없다. 현재까지는! (웃음) 전적으로 현지 프로덕션을 믿어주고 지원해주고 있다.
=모니크 에스크라비삿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중요한 건 장기적으로 관계를 발전시켜나가는 거다. 그러다보면 제작과정 역시 더 매끄러워지지 않겠나.
-이십세기폭스는 2010년 이십세기폭스코리아를 설립해<런닝맨>(2012), <슬로우 비디오>(2014), <나의 절친 악당들>(2015), <곡성>(2016)을 제작했다. <곡성> 전까지는 흥행작이 없었는데, 경쟁 스튜디오로서 그 실패의 원인을 들여다봤을 것 같다.
=최재원 굳이 다른 회사 얘기를 꺼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곡성> 이전의 과정이 과연 실패일까 하는 생각은 든다. 그 또한 성공으로 가기 위한 하나의 과정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섣불리 실패다, 성공이다 판단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관점의 차이, 접근 방식의 차이인 것 같다. 이십세기폭스는 그 과정에서 나름대로 소중한 경험을 쌓았을 것이다.
-할리우드 대형 스튜디오의 한국영화 진출을 양날의 검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있다.
=최재원 처음 워너브러더스코리아에 합류할 때 고민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편으론 그런 시선 자체가 편협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해외에 진출하는 건 정당하고 장려할 일이고 그 반대는 안 될 일인가 싶더라.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의 한국 시장 진출이 분명 한국 영화인들에겐 또 다른 기회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인들에겐 선택지가 하나 더 생긴 셈이다. 한국영화 시장에 건강한 긴장을 불어넣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마크 가레통 선택의 여지가 많다는 건 선택의 여지가 적은 것보다는 좋은 일이라 생각한다. 참고로 워너브러더스의 역사가 90년이 넘는데, 우리는 영화인들에게 인기가 좋은 스튜디오다. (웃음)
=모니크 에스크라비삿 젊고 재능 있는 신인 영화인들에겐 분명 좋은 기회일 수 있다.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의 진출에 국내 투자·배급사들도 은근히 긴장할 것 같은데, 업계 사람들에게 전해듣는 얘기는 없나.
=최재원 <밀정>이 잘되면 긴장하지 않을까. (웃음) 국내 메이저 투자·배급사로선 자신들에게 올 수 있었던 작품이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있게 된 셈이니 긴장되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글쎄, 아직은 시작 단계이고 충분한 경쟁력을 입증한 것이 아니라서 그들의 반응은 잘 모르겠다.
-워너브러더스코리아가 앞으로 꾸려갈 라인업의 특색은 뭔가.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영화만의 색깔이 있다면.
=최재원 그런 건 없다. 한국 관객이 좋아할 영화를 계속 만들어가려고 노력할 뿐이다.
=모니크 에스크라비삿 ‘이건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영화야’ 그런 걸 생각하고 영화를 제작하진 않는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현지 프로덕션과 장기적으로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이다. 한국에 진출한 만큼 오래도록 좋은 관계를 유지할 생각이다.
=마크 가레통 워너브러더스코리아 고유의 장르나 영화적 색깔보다는 워너브러더스코리아만의 제작과정, 시그니처 프로세스를 만들어가고 싶다. 본사에선 결과물을 ‘빨리’ 내라고 재촉하지 않는다. 그보다 현지 프로덕션이 일을 문제 없이 진행할 수 있도록 도우려고 신경을 많이 쓴다. 그래서 워너브러더스는 늘 감독이나 제작자들과 장기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한해에 몇편 정도 제작할 계획인가.
=최재원 우선 올해는 <밀정>과 <싱글라이더> 두편이 개봉할 것 같다. 내년 라인업으로는 박훈정 감독의 <VIP>, <아저씨>(2010)를 만든 이정범 감독의 신작 <악질경찰>이 있다. 이외에 루키들의 작품도 개발 중이다. 내부 계약 완료된 작품이 서너편 있다. 1년에 제작 편수 몇편, 그렇게 못 박아둔 목표는 없다.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진행할 생각이다.
-워너브러더스코리아의 장기적 비전은 무엇인가.
=모니크 에스크라비삿 크고 성공적이며 대단한 영화를 만드는 것? (웃음) 그리고 재능 있는 감독들과 장기적으로 좋은 관계를 맺고 젊은 감독들에게 좋은 기회를 주는 것이다.
=최재원 본사에선 장기적 파트너십이란 말을 많이 하는데, 한번 관계 맺은 사람들과 지속적이고 발전적으로 관계를 이어가겠다는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 ‘돈 벌고 철수하는 거 아냐?’ 하는 우려의 시선도 있는 것 같은데 그러지 않을 것이란 걸 증명해야 할 것 같다. 좋은 시선으로 지켜봐주기 바란다.
=모니크 에스크라비삿 사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사람들이 계속해서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가도록 만드는 것이다.
-최재원 대표는 미국 본사로 출장을 자주 가나.
=최재원 나는 오직 한국 담당이다. (웃음) 워너브러더스 코리아에 합류하기 전엔 LA에 자주 갔는데, 워너브러더스코리아에 합류한 이후엔 한번도 못 갔다.
=모니크 에스크라비삿 최 대표는 무척 바쁜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가 한국에 오지 않았나. (일동 웃음)
=최재원 한 가지 재밌는 일화를 들려주자면 워너브러더스코리아에 입사할 때 회사에서 나에게 바라는 조건이 있었을 텐데, 여러 항목 중에 영어를 잘해야 한다는 항목은 없었다. 워너브러더스에선 한국말을 잘하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한국에서 현지 영화를 제작할 사람을 뽑는 거니까 영어를 못해도 된다는 거 였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관점이 신선했다. 워너브러더스코리아 대표로 있는 1년 반 동안 영어를 쓸 일이 별로 없어서 영어가 안 늘었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