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듀나의 영화비평] 제임스 본드의 비정상적인 장수와 제이슨 본의 이유 모를 귀환
2016-08-10
글 : 듀나 (영화평론가·SF소설가)
<제이슨 본>

숀 코너리의 제임스 본드를 좋아한 적이 없었는데, 아무래도 영화보다 책을 먼저 읽었기 때문인 것 같다. 책에 나오는 본드도 그렇게까지 맘에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그에게는 그만의 역사가 있었고 각각의 책에서 겪은 모험은 그의 몸과 정신에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겼다. 여전히 개망나니 같은 놈이었지만 그래도 죽은 여자친구와 아내에 대한 슬픈 기억을 지우지는 않는 그런 개망나니였다.

그런데 숀 코너리의 본드는 영화가 나올 때마다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당연히 그는 소설 속 본드보다 얄팍했고 나에겐 전혀 매력이 없었다. 남는 건 정부 돈으로 여자를 후리고 다니는 영국인 중년 남자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이었는데, 그건 내 관심 밖이었다. 뒤늦게 대니얼 크레이그의 본드에 관심을 가졌던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숀 코너리, 로저 무어, 피어스 브로스넌의 본드와 달리 크레이그의 본드에겐 출생연도와 지울 수 없는 역사가 있었고 그 역사는 심지어 이언 플레밍이 자신의 본드에 부여했던 역사와 썩 비슷했다.

하나의 사건을 다룬 하나의 이야기 ‘본 시리즈’

하지만 이런 기억상실이 본드 시리즈의 장수화에 기여했다는 건 분명하다. 만약에 제임스 본드의 역사를 충실하게 따랐다면 그는 늦어도 로저 무어와 함께 은퇴를 했어야 했다. 2차대전 참전군인이 그 뒤에도 현역에서 뛰는 건 누가 봐도 무리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역사가 없는 영화 속 본드와 같은 남자에겐 그건 핸디캡이 되지 않는다. 그는 미드 <닥터 후>의 닥터처럼 끊임없이 얼굴을 바꾸어가며 재생될 수 있다. 아니, 있었다. 크레이그의 본드가 역사가 있는 본드 캐릭터의 선례를 만들어놨으니 이제 이 시리즈를 만드는 사람들도 이를 무시할 수는 없을 거다.

그렇다면 제이슨 본의 경우는 어떨까? 로버트 러들럼이 창조한 이 인물 역시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처럼 자기만의 역사가 있다. 그는 20세기 중·후반의 특별한 시기에 묶여 있고 매번 모험을 겪을 때마다 그 모험의 흔적을 삶에 남긴다. 적어도 러들럼이 직접 쓴 3부작에서는 그렇다. 그 시대성과 캐릭터는 원작을 훨씬 충실하게 옮긴 리처드 체임벌린 주연의 미니 시리즈 <본 아이덴티티>에 비교적 잘 반영되어 있다.

원작이나 미니 시리즈를 먼저 접한 관객이라면 맷 데이먼 주연의 영화 <본 아이덴티티>(2002)가 좀 싱겁게 느껴질 것이다. 이야기의 단순성과 액션 묘사를 위해 영화는 원래 있었던 캐릭터와 스토리의 재미를 많이 날려버렸다. 원래의 제이슨 본과 비교한다면 맷 데이먼의 제이슨 본은 극도로 단순하고 절제된 인물이다. 종종 원본의 실루엣 초상화처럼 보일 정도다.

<본 아이덴티티>부터 나온 영화 3부작의 가장 큰 장점이자 매력은 영화판 <제이슨 본>의 단순함을 많이 버리지 않으면서 설정과 캐릭터에 입체감과 레이어를 부여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영화는 제임스 본드와 전혀 다른 길을 간다. 매편 기억을 지우는 대신 끈질기게 연속적인 스토리에 집착하는 것이다. 이 길은 러들럼이 닦아놓은 길과 또 다른 길이다. 러들럼의 본은 맷 데이먼이 연기한 본보다 훨씬 안정적인 삶을 사는 인물이다. 종종 그 때문에 발목을 잡히긴 하지만, 그는 결혼도 했고 안정된 직장도 있고 아이들도 있다. 영화판 본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제이슨 본이 직접 출연하지 않는 <본 레거시>(2012)를 포함한 네편의 본 영화들은 모두 치밀하게 압축되어 있는 세계에서 벌어진다. <본 아이덴티티>와 <본 슈프리머시>(2004) 사이의 간격은 겨우 2년 정도이고 <본 슈프리머시>부터 <본 레거시>까지 일들은 겨우 며칠 사이에 벌어진다. 그 때문에 유튜브도 없었고 모바일 인터넷도 어려웠으며 대부분 컴퓨터가 브라운관 모니터를 달고 있던 시대의 사람들이 갑자기 시리즈 중간부터 근미래 테크놀로지를 구사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고증이 아니라 이 영화들이 압축된 하나의 사건을 다룬 하나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심지어 굳이 만들 필요도 없었던 영화 <본 레거시>도 그렇다. 본은 비밀을 폭로하려고 하고 미 정부기관은 이를 막으려 하며 이 갈등의 한가운데엔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본의 기억이 놓여 있다. 당연히 과거의 기억은 끊임없이 소환되고 전편의 사건은 재활용된다. 이 겹치고 중복된 시간 속에서 본의 갈등은 증폭되고 캐릭터는 의미를 갖게 된다. 그리고 그 의미는 <본 얼티메이텀>(2007)에서 본이 임무를 완수하는 순간 완벽하게 종결된다. 이 3부작은 한 흐름으로 이어지는 가톨릭 성인담과 닮았다. 영화마다 제이슨 본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죄를 고백하고, 마지막에 스스로를 희생하며 속죄한다.

자,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본’ 시리즈를 3부작으로 끊었다면 모두가 행복했을 것이다. 러들럼의 본이 그랬던 것처럼 영화 속 본이 원래부터 안정된 삶의 기반을 갖추었다면 언제든 새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데에 무리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본’ 3부작의 성격을 그대로 유지한 채 시리즈를 이어가기를 바랐다. 이건 누가 봐도 무리한 요구다.

<본 레거시>와 <제이슨 본>은 이 무리한 요구에 대한 반쯤 실패한 답변이다. 물론 이유는 조금씩 복잡하다. <본 레거시>에 제이슨 본이 등장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맷 데이먼이 출연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니까. 하지만 완성된 영화가 제이슨 본의 자리에 애론 크로스(제레미 레너)라는 새 캐릭터를 넣고 일단 결말을 본 본 대신 그를 통해 시리즈의 돌파구를 열려 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물론 이 시도는 먹히지 않는다. 사람들이 원하는 건 제이슨 본이고, 애론 크로스에겐 제이슨 본의 고결한 의도가 없다. 그의 동기는 이해할 만하지만 본과 비교 대상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유효기간이 지나버린 트릭들

<제이슨 본>엔 애론 크로스 대신 제이슨 본이 다시 돌아온다. 하지만 핸디캡은 여전히 남는다. 3부작의 제이슨 본과 <제이슨 본>의 제이슨 본은 생물학적으로 같은 인물이지만, 캐릭터의 기능을 본다면 사정이 다르다. 애론 크로스와 마찬가지로 <제이슨 본>의 제이슨 본은 3부작의 제이슨 본과 비교 대상이 된다. 이 영화의 제이슨 본은 그를 제이슨 본으로 있게 했던 동기와 의도를 갖고 있지 않다. 이 영화에서 그를 움직이게 하는 동기는 그의 죽은 아버지와 관계 있는 사적인 비밀로, 결국 영화는 복수담의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데, 이 방향은 어쩔 수 없이 3부작에 비해 하찮아 보인다.

더 큰 문제는 이 영화가 3부작, 정확히 말해 3부작의 2, 3편과 같은 트릭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미 그 트릭의 유효기간이 지났다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해 영화는 제이슨 본을 움직이기 위해 과거를 만들어낸다. 트레드스톤에 들어온 뒤의 과거는 이미 다 써먹었기 때문에 그들은 새로 만든 과거를 그보다 앞에 심는다. 이는 당연히 먹히지 않는데, 일단 동기가 상대적으로 가볍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야기가 완결된 3부작 뒤에 이걸 다시 심으면 3부작의 패러디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제이슨 본의 매력이 그 유머 없는 직설적인 진지함에 있는데, 그 진지한 표정과 진지함 모두를 고수하려 하면서 이런 패러디스러운 장면들을 넣으면 관객은 영화와 캐릭터 모두를 심각하게 보지 못하게 된다. 아무리 현란한 액션을 넣어도 영화가 비어 보이는 건 당연하다. 맷 데이먼이 현란한 액션을 보여주어도 이 영화는 어느 정도 가짜이기 때문이다.

결국 제임스 본드의 비정상적인 장수를 당연시하며 따라가지 않는 것이 답인 것 같다. 그래도 미련이 남아 제이슨 본의 모험을 연장하고 싶다면 과거를 파는 대신 그에게 새로운 미래를 주는 것이 답인 것 같고. 그런데 과연 그럴 필요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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