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스페셜] 재즈평론가 황덕호, 영화 <마일스>와 마일스 데이비스에 대하여 말하다
2016-08-17
글 : 황덕호 (재즈 칼럼니스트)
<마일스>

영화가 시작되자 깜깜한 암전 위로 한 사람의 목소리만이 들린다. 그러다가 그 목소리의 한 문장은 곧바로 암전 위에 활자를 찍어댄다.

“너만의 뭔가를 만들 땐 하늘도 한계가 될 수는 없다.”

-마일스 데이비스

보컬리스트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재즈 역사상 가장 유명한 목소리 중 하나는 이렇게 금언을 통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다. 그렇다. 그는 스타이며 명사이고, 전설적인 존재다.

잠시 후 카메라가 <마일스>(2015)의 주연이자 감독인 돈 치들(마일스 데이비스 역)을 비췄을 때 그 모습은 생전의 마일스의 이미지를 단번에 살려낸다. 쉰 목소리에 나지막이 읊조리는 입술은 연신 담배를 피워대고 얼굴의 1/3을 가린 검은 선글라스는 그의 신비적 권위를 상징한다. 그는 그의 별명대로 ‘암흑의 왕자’다.

<마일스>

사실에 기반한 <마일스> 속 인물들

분명히 돈 치들은 마일스와 그리 닮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글라스를 끼고 트럼펫을 들고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마일스 데이비스다. 동시에 그 순간 돈 치들의 내심은 바로 관객에게 읽힌다. 그는 마일스 데이비스의 이 모습을 자신을 통해 꼭 구현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한 느낌은 레이 찰스의 모습을 완벽하게 연기해낸 제이미 폭스에게서도 결코 느낄 수 없는 것이었다.

전기영화에서 실존 인물에 대한 애정은 필수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 애정에는 무수히 많은 종류가 있다. 그 인물의 이면, 기이함, 그 인물이 갖고 있는 허상, 그 인물에 대한 연민…. 돈 치들은 마일스 데이비스의 어떤 면을 영화에 담으려 한 것일까? 나는 그 점을 계속 궁금해하며 영화를 따라갔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두개의 구조를 갖고 있다. 하나는 영화의 현재 시점으로 1970년대 말 음악계를 떠나 은둔하고 있는 마일스 데이비스의 이야기다. 50대에 들어선 그의 몸은 이미 병들어 있고 그럼에도 그는 계속 코카인을 복용하면서 매스컴은 물론이고 사람들을 피해 뉴욕에 있는 그의 어두운 집에 칩거하고 있다. 활동을 하지 않은 탓에 그는 경제적 곤궁에 처해 있어서 그와 음반 계약을 맺고 있는 컬럼비아 레코드에 수시로 전화를 걸어 인세를 먼저 지급해 달라고 요구해야 하는 처지다.

이때 마일스 데이비스는 인생에서 가장 암울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 현재의 고통은 영화의 또 다른 한 층위인 과거의 이야기로 플래시백되어 이어진다. 과거 이야기는 1953년에서부터 1965년 무렵까지 10여년의 시간으로, 그 이야기의 중심은 마일스의 첫 아내였다가 이제는 헤어진 프랜시스 데이비스다. 마일스는 이제 곁에 없는 그녀를 그리워하며 동시에 그녀에 대한 학대를 후회한다.

이 이야기들은 대부분 사실에 기반한 것이다. 마일스는 1953년 프랜시스 데이비스(결혼 전에 그녀의 성은 테일러였다)와 첫 만남을 가진 뒤 1958년부터 본격적인 교제를 시작해 1960년에 결혼했고, 하지만 8년 뒤에 이혼을 하는데, 영화에서 등장하는 두 사람의 첫 만남, 사랑, 갈등은 마일스가 자서전에서 밝힌 내용을 충실히 옮겨놓은 것이다(마일스의 자서전은 우리 글로도 옮겨졌다. <마일스 데이비스>, 성기완 옮김, 집사재 펴냄. 아울러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가장 상세히 다룬 존 스웨드의 전기도 국내 출간되었다. <마일즈 데이비스>, 김현준 옮김. 그책 펴냄). 마일스가 고백한 대로 프랜시스는 그의 생애에서 최고의 여인이었다. 영화에서 프랜시스가 춤을 추는 모습에 영감을 받아 마일스가 연주한 곡은 실제 마일스가 아내에게 헌정한 <Fran Dance>였으며, 이 곡을 수록한 앨범은 프랜시스의 얼굴을 표지에 담은 1961년작 《Someday My Prince Will Come》이었다(영화에서 이 앨범의 표지는 여러 차례 클로즈업된다). 하지만 한편으로 마일스는 그녀가 무용 활동을 계속하는 것을 막았고 이후에는 심한 의처증에 시달렸으며 그녀에게 폭력마저 휘둘렀다.

마일스는 영화에서처럼 1975년부터 1980년까지 5년간 활동을 중단하고 은둔했다. 이때 그는 겸형 적혈구 빈혈증으로 엉덩이 부근의 뼈와 살이 괴사되어 영화에서처럼 다리를 심하게 절룩였고 활동 중단에 따른 경제적 문제로 컬럼비아 레코드의 부사장이자 재즈 음반 책임 프로듀서였던 조지 버틀러에게 여러 차례 선인세 지급을 요구했다. 하지만 조지는 음악 활동을 전혀 하지 않고 있던 마일스를 신뢰할 수 없어서 먼저 녹음테이프를 건네라며 마일스의 요구를 회피했다. 마일스는 음악계 사람들을 피하면서도 엉뚱하게 주변 친구들에게 자신의 집을 파티 장소로 제공하곤 했고 24시간 두꺼운 커튼으로 가려진 실내는 청소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아 그의 거실은 쥐와 바퀴벌레들로 바글거렸다는 것이 프로듀서 티오 마세로의 전언이다. 이러한 상황은 영화에서 일정 정도 표현되고 있다.

하지만 돈 치들은 이러한 사실들만으로 영화를 끌고 가기에는 힘이 부쳤던 것 같다. 그래서 그가 만들어낸 것이 <롤링스톤>의 기자 데이브 브레이든(이완 맥그리거), 신인 트럼펫 주자 주니어(키스 스탠필드) 그리고 그의 매니저 하퍼 해밀턴(마이클 스털버그)이라는 허구의 인물들이다. 하퍼는 마일스가 은둔기간에 녹음한 보물과도 같은 테이프를 그의 집에서 훔쳐갔고 이를 되찾기 위해 이 영화는 마일스 전기영화로서는 ‘뜻밖에도’ 자동차 추격 장면, 총알과 주먹이 오가는 액션 장면을 등장시킨다. 동시에 범인들을 뒤쫓는 마일스와 데이브의 역할은 전형적인 버디무비의 모습마저 연출한다.

돈 치들이 이러한 허구를 보탠 것은 물론 관객의 흥미를 좀더 끌어내 고 싶어서였겠지만 한편으로 전기영화의 상투성을 벗어나고 싶은 계산도 있었을 것이다. 전기영화의 상투성이란 한마디로 한 인물을 평면적으로, 위대한 인물로 그리면서 그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는 것이다. 그 존경심이 순진하게 드러났을 때 영화는 그냥 ‘위인전’이 되고 만다. 이때 그 인물과 영화는 모든 매력을 공중에 증발시켜버리고 만다. 이를 피하기 위해 돈 치들은 허구의 내용을 더할 것이 아니라 실은 더 많은 사실들을 영화에 담았어야 했다. 1975년, 어느덧 50대의 문턱에서 자신을 완전히 소진시키고 나가떨어진 마일스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1940년대 비밥 시대에 활동을 시작한 한 재즈 연주자가 1960, 70년대의 록과 솔의 거대한 파도를 가까스로 그리고 유일하게 돌파하면서 남긴 모습을 흥미롭게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일스>

마일스의 퓨전이 독보적이었던 이유

새삼스럽지만 마일스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다. 그는 미국이라는 인종차별 국가에서 평생을 살았고 자서전의 많은 부분에서 자신의 울분을 토해냈다. 영화에 등장하는 백인 경찰의 부당한 구타 역시 마일스가 실제 당했던 1959년의 유명한 사건이었다. 그의 자존심은 미국 음악계를 좌지우지하는 백인들에게 무릎 꿇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으며 동시에 1926년에 태어나 20대에 숙명적으로 비밥 연주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이 6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다른 음악에 밀려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되는 것도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 그와 비슷한 연배의 재즈 음악인 중 그와 같은 태도의 인물은 마일스가 유일했다.

그러므로 그는 1960년대 후반의 록과 솔 음악을 진지하게 관찰한 유일한 재즈 연주자였다. 비슷한 시기에 소위 퓨전재즈를 구사하기 시작한 연주자들은 몇몇 있었지만(실은 그것은 연주자의 생각이라기보다 는 프로듀서의 아이디어였다) 자신이 견지해오던 즉흥연주와 록과 솔을 진정으로 결합시켰던 것은 마일스가 유일했다. 한마디로 그의 퓨전은 독보적이었다. 그 점을 인정했던 것은 누구보다도 록과 솔에 열광했던 60년대 말의 젊은 음악팬들이었다. 그들의 지지로, 당시 마일스의 성공은 자신의 생애에서는 물론이고 재즈 역사상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오늘날에도 마일스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Kind of Blue》가 발매되었던 1959년에 미국 음반 시장의 규모는 연간 600만달러였다(이 수치도 실은 이미 엘비스 프레슬리의 등장으로 폭발적인 증가세에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시장이 1천만달러를 돌파한 것은 7년 뒤인 1966년이었고, 2천만달러가 된 것은 6년 뒤인 1972년이었다. 그 추이를 놓고 보면 이 시기 10년 사이에 미국 음반 시장의 규모는 약 세배로 급성장했는데 그것은 오로지 록의 거대한 물결 때문이었다.

마일스는 1970년 영국의 아일 오브 와이트 록페스티벌에 출연해 60만 청중 앞에서 연주했으며(마일스가 생애 처음이었다고 말한 이 대규모 관중은 재즈 무대로서는 상상도 못할 숫자다) 그 무렵 발매된 음반 《Bitches Brew》는 당장 골든디스크(판매 50만장)를 기록했다. 그보다 11년 전에 발매된 걸작 《Kind of Blue》도 당시엔 아직 골든디스크가 되지 못했는데 그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마일스가 록과 솔 일렉트릭 사운드로 전환하기 전에 그의 ‘정통’ 재즈 음반은 1년에 대략 6만장 정도가 팔렸기 때문이다. 재즈 음반치고는 많이 판매된 것이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재즈 동네 안에서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이러한 통계가 말해주는 것은 1970년대 마일스는 그 이전의 마일스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점이다. 그가 더이상 ‘재즈’란 단어를 싫어했던 것과 마찬가지로(영화에서 보여주듯이 그는 자신의 음악을 ‘소셜뮤직’ (Social Music), 즉 교감을 통해 집단적으로 창작하는 음악이라고 불렀다) 그는 더이상 재즈 음악인이 아니었으며 오로지 예술가였고 동시에 스타였다. 스타가 된 예술가. 그것은 ‘스튜디오 54’의 앤디 워홀이 보여주듯이 전형적인 70년대의 풍경이었다.

<마일스>

진화 혹은 생존 전략

자본주의의 산물인 스타란 막대한 부를 거머쥔다는 점에서 이름을 널리 알린 명사(名士)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동시에 스타는 그 돈을 화려하게, 과시적으로 소비한다는 점에서 금욕적인 자본가와도 완전히 다르다. 마일스 본인에 의하면 60년대 말, 70년대 초 그는 대략 1년에 3억~4억원의 수익을 올렸고 그 돈으로 유명 인테리어 미술가를 불러 자신의 집을 개조하는 한편 페라리와 람보르기니를 몰고 다녔다. 이러한 전형적인 스타의 삶은 자신의 숨통을 조였음에도 그는 이러한 라이프 스타일을 결코 바꾸지 못했다. 그래서 훗날 그의 기타리스트인 존 스코필드는 그를 곁에서 지켜보며 그의 삶의 양식은 재즈 연주자라기보다는 연예인에 가까웠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는 이러한 부가 폭발적인 인구 증가를 보인 베이비부머 세대의 젊은 음악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경쟁사 RCA를 통해 등장했던 50년대만 하더라도 로큰롤을 쓰레기 취급했던 컬럼비아 레코드는 60년대에 이르러 자신들의 기조를 록으로 정했고 60년대가 끝나갈 무렵 컬럼비아 레코드의 간판 재즈 연주자였던 셀로니어스 멍크, 데이브 브루벡 등 그 누구도 컬럼비아와 계약을 연장할 수 없었다. 오로지 살아남은 것은 마일스뿐이었다. 그가 40대의 나이에 20대 젊은이들과 적극적으로 어울리며, 그들의 패션을 좇아가고 그들의 음악을 흡수한 것은 음악의 진화인 동시에 처절한 생존 전략이었다.

영화 <마일스>에서는 이 부분이 빠져 있다. 영화에서 보이는 마일스의 마지막 밴드는 1967년까지 함께했던 그의 5중주단뿐이다. 이후에 마일스와 함께 연주하는 칙 코리아, 키스 재럿, 존 매클러플린, 데이브 홀랜드, 잭 드조넷 등 70년대 초반 인물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더욱이 이 시기 프랜시스와 이혼한 직후 곧 결혼하게 되는 파격적인 패션모델이자 솔 가수였던 베티 매브리, 이후의 연인이었던 마거릿 에스크리지, 재키 배틀 등 그 당시의 젊은 여인들이 보이지 않고 오로지 프랜시스만이 홀로 존재했던 것은 은퇴 시기 마일스의 고통을 상투적이고 모호한 것으로 만든다. 70년대 마일스의 고통은 한 여인에 대한 단순한 죄책감과 그리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해 마일스는 60, 70년대 청년 문화, 팝 컬처에 몸을 던지면서 그 시대의 끝을 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더이상의 음악적 출구는 보이지 않았고 남은 것은 술과 약물로 만신창이가 된 자신의 육체였다. 그것은 70년대 미국적 우울의 한 전형이었다. 하물며 출발점에서 너무나 멀리 떠나와버린 자신을 발견했을 때 50대의 마일스가 느꼈을 공허와 고독은 젊은 세대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젊음과 함께 보낸 시간 끝에 만난 늙음. 그 공허함. 돈 치들은 왜 이 점을 다루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이 영화에서 기이하게도 비중 있게 다룬 은퇴 시기의 마일스 녹음테이프는 매우 훌륭한 소재가 될 수 있었다. 정작 그 테이프를 들어보니 내용은 함량 미달이었다는 사실은 당시 마일스의 무력함을 잘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그리고 이 내용 또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음악의 빈약함이 젊은 트럼펫 주자 주니어와의 우연한 만남을 통해 피가 돌고 살이 입혀졌다는 점을 이 영화가 더욱 부각시켰다면 돈 치들이 표현하고 싶었던 마일스에 대한 존경심은, 그의 인간적 그늘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것 때문에- 더욱 생생하게 전달될 수 있었을 것이다. 마일스에 대한 그와 우리의 존경심은 결코 되돌아가지 않았던 그의 음악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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