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나호원의 영화비평] 애니메이션에서 즐거움의 원천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 <마이펫의 이중생활>
2016-08-23
글 : 나호원 (런던 통신원)
<마이펫의 이중생활>

애니메이션에는 두 부류의 동물이 살고 있다. 하나는 두발로 걷는 동물, 다른 하나는 네발로 걷는 동물이다. 전자는 인간을 닮고자 하고 후자는 실제 동물에 다가가 있다. 이러한 구분을 난감하게 하는 작품도 있다. 미키마우스와 플루토의 관계가 대표적이다. 초기의 미키마우스와는 달리 시간이 지나면서 미키는 점차 ‘사람-소년’으로 진화해왔다. 바지에 윗옷을 걸치고, 장갑을 끼고, 밤에는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 자고, 마침내 반려견으로 플루토를 거느리기에 이른다. 주인인 미키는 사람의 말로 명령을 내리고, 반려견 플루토는 멍멍거리며 따른다.

디즈니가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1937)에 이어, 두 번째로 준비한 장편애니메이션은 <밤비>(1942)였다. 라이브 액션의 배우처럼 인간 백설공주를 다루었듯이, 이제 <밤비>에서 동물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자 하였다. 애석하게도 <밤비>는 중간에 치고 들어온 <피노키오>와 <판타지아> <덤보> 때문에 우선순위에서 밀렸고, 제작 스탭도 일종의 리저브팀으로 꾸려졌다. 사실적인 동물의 재현은 미적 목표이기는 했지만 상업적 판단에서는 그리 매력적이지는 않았다. 사족보행 동물 캐릭터의 수난사의 시작이리라. <마이펫의 이중생활>(이하 <마이펫>)은 네발 동물을 위한 새로운 시험 무대이기도 하다.

<주토피아> 따위는 잊어버려

얼핏 <마이펫>은 <주토피아>(2016)를 연상시킨다. 동물들은 사회적 생활을 하기 위해서 본성(야생성)을 길들이는 사회화 과정을 따라야 하고, 이를 통해 자신이 속한 집단을 개선하고자 한다

<주토피아>는 의인화의 전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동물이 사람 흉내를 내지만, 사람들이 꿈꾸는 세상을 동물의 모습을 통해 에둘러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주토피아’라는 동물 세상 바깥에 인간의 세상이 따로 있지 않다. 작품 전체에 계몽의 메시지가 넘쳐난다.

이에 견주어, 원제목이 <Secret Life of the Pets>인 <마이펫>은 ‘이중/secret’이 지시하듯 은밀하다. 동물은 인간의 세계에 들어와 있다. ‘반려’라는 이름 아래에서 인간과 함께 지낸다. 그 공간에서 사람이 사라지는 순간, 동물의 세계가 드러난다. 집에서 벗어나 거리로 나오면 다시 인간의 세계가 지배하고, 모퉁이를 돌아 뒷골목으로 가거나 하수도 속으로 들어가면 다시 동물의 세계가 등장한다. 동물끼리는 말을 주고받을 수 있지만, 인간과 걸쳐져 있으면 ‘짖는 소리’로 바뀐다. 이 영화를 즐기는 변칙적인 방법은 소리를 아예 없애고 보는 거다. 그러면 마치 일상 속 반려동물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실제로 <마이펫>에서도 고양이의 해프닝을 다른 동물들이 촬영해 동영상 사이트에 올려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설정이 나온다). 스크린 속 동물들은 의인화된 연기가 아니라 ‘반려동물’로서의 움직임을 고스란히 구현해내고 있다.

<마이펫>에서 정체성의 고민은 그렇게 깊지 않다. ‘반려동물로 살 것인가, 야생으로 돌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은 갈등의 요소이기는 하지만, 작품의 메시지로 전체를 지배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등장인물 사이의 대립과 갈등, 반목, 위협은 너무나 쉽게 해결되고, 유예되고, 타협이 이루어지고, 도움을 주고받는다. 진지함 따위는 디즈니에나 던져줘버리라는 듯 말이다.

일루미네이션이 잘하는 것 중 하나는 도시 풍경을 보여주는 것이다. <슈퍼배드> 시리즈에서도 간간이 등장했지만, 본격적인 실력 발휘는 <미니언즈>(2015)부터였다. 여왕의 왕관을 손에 넣기 위한 난리 북새통 속에서 런던을 휘젓고 다녔다. <미니언즈>에서 잠깐 들렀던 뉴욕은 <마이펫>에서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일루미네이션식 도시 풍경은 한편으로는 꽤 사실적이다. 뉴욕이나 런던에 사는 사람이라면 방금 등장한 골목이 어느 구역인지 정확한 주소를 알아낼 수도 있을 테다. 타 지역에 사는 사람으로서는 마치 시티투어 버스를 타고 대도시를 둘러보는 기분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사실적인 풍경은 하이퍼리얼리즘의 덫에 걸려버리지는 않는다. <미니언즈>의 런던과 <마이펫>의 뉴욕은 다른 한편으로는 미니어처로 축소된 느낌으로 다가온다. 실물을 정교하게 축소했으되 그 안에서는 현실 세계의 지배 법칙 대신 ‘인형의 집’과 같은 환상이 허용된다. 이는 시각적 스타일과 색감을 적용해서 생긴 효과이기도 하지만 주요 캐릭터의 눈높이를 따라가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니언즈와 반려동물에 맞춰진 카메라의 위치는 인간-어른보다 낮으며, 어린아이의 시선에 가깝다.

하지만 도시가 그저 눈요기로서의 풍광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거대한 도시를 만들고 굴러가게 하는 작동 메커니즘이 개입한다. 도시는 욕망으로 돌아가며, 기계의 모습을 닮아 있다. <슈퍼배드> 이후로 꾸준히 일루미네이션의 작품 속에는 기계 장치가 등장한다. 그것은 바로크 무대 장치와도 닮았고, 거대한 공장을 떠올리게도 한다. 정교한 기계를 움직이는 건 욕망이다. 그래서 기계는 세상을 정복할 무기를 만들기도 하고, 반대자를 고문하는 데 쓰이기도 하며, 폭주하고, 폭발한다. 욕망과 기계는 도시의 건축물 아래에 숨겨져 있기도 하고, 일상적인 사물의 형태를 띠기도 한다. 대부분 지하실이나 하수도, 뒷골목 같은 도시의 이면에서 본색을 드러낸다. 그리고 인간-주인이 (거대한 도시 기계를 돌리기 위해서) 일터로 출근하면서 비운 ‘집’을 반려동물이 차지하면서, 인간-도시는 또 다른 본모습으로 탈바꿈한다.

<마이펫의 이중생활>

그래, 어쨌든 즐기는 거야~

일루미네이션이 등장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애니메이션 산업은 일종의 정체기에 머물렀다. 2D애니메이션은 이미 한물간 것으로 취급받았고, 3D애니메이션도 더이상 신기한 것들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작품들은 점점 더 속사포 대화 속에서 시트콤으로 변해가는 식이었다. <슈퍼배드>부터 <마이펫>에 이르기까지, 일루미네이션이 선보인 장편들의 제작비는 7천만달러 안팎이다. 같은 기간 픽사 평균 제작비의 1/3, 드림웍스 제작비의 1/2 정도 규모이다. 테크놀로지가 제작비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3D애니메이션 분야에서, 한정된 예산은 새로운 테크놀로지적 시도에 제약을 가한다. 이런 여건에서 일루미네이션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기존의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들이 보여주지 않은 것이다. 그리 거창한 것은 아니다. 일종의 개그 드립이다. 물론 이는 기존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들이 이야기 속에 양념으로 투입하는 개그와는 다르다. 일루미네이션의 개그는 그 자체를 위한 것이다. 어설프게 썼다가는 알맹이 없이 드립만 치다 끝난다고 욕먹기 쉽다. 하지만 우리는 과거에도 이러한 전략이 애니메이션에서는 제법 먹혔다는 것을 기억해낼 수 있다. 예컨대 디즈니와 플라이셔 스튜디오가 치열한 경쟁을 벌였을 때, 워너와 MGM 같은 제3의 스튜디오들은 슬랩스틱 추격전으로 즐거움을 선사하였다.

개그 드립은 이야기의 빈곤이라는 지적 말고도 또 하나의 장애물을 돌파해야 한다. 바로 ‘금기’에 대한 위반. 미키마우스도 처음에는 양아치처럼 침을 뱉고, 주먹을 휘두르고, 미니마우스에게 희롱을 걸었다. 미키가 소년이 된 것은 ‘자정 노력’의 일환이었다. 톰과 제리나 벅스 버니 같은 캐릭터들이 순화되고, 영향력을 잃은 것도 슬랩스틱의 폭력성에 대한 비판과 규제에 기인한다. 그런 점에서 일루미네이션의 애니메이션에는 잠시 잠깐이지만 그동안 애니메이션 작품에서 사라졌던 일탈들이 툭툭 튀어나온다. 아이의 풍선을 터뜨리고, 장난감을 빼앗고, 엉덩이를 흔들어대고, 탄산음료를 마시고, 뒷골목의 패싸움을 보여주는 건 꽤나 ‘막가파식’ 일탈이다. 결국 악당은 없다가 아니라 악당의 과대망상과 자가당착도 애니메이션에서는 즐거움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재발견한 것, 이 점이 현재까지 일루미네이션이 이루어낸 가장 큰 성과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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