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엔 아직 ‘왕따’라는 어휘가 존재하진 않았지만, 12살의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은 그 단어의 정의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새로 전학 온 아이는 당분간 또래들의 테스트 대상이 되기 마련이었고, 나는 그 테스트에 완벽하게 걸려들었다. 아직 외국어와 그곳의 사고방식에 익숙하지 않은 나에게 학교 가는 일은 하루하루 도망치고 싶은 싸움이었다. 그래도 몇 개월이 지나자 괴롭힘은 시들해지기 시작했고 비슷한 ‘지질한’ 처지의 친구들도 생겼다. 일본에서 온 지 얼마 안 된 친구와 인도계 친구 등 메인스트림에는 절대 들지 못할 우리는 몰려다녔다. 주로 함께 비디오를 시청하거나 만화를 그리며 시간을 보냈고, 그렇게 보게 된 영화 중 하나가 <스탠 바이 미>(1986)였다.
아마도 ‘네명의 친구들이 시체를 찾아 떠난다’는 스토리에 낚였던 것 같다. <스탠 바이 미>는 기대했던 액션이 충만한 어드벤처와는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주인공들도 나와 같은 12살이었고, 무엇보다도 지질한 면모들을 하나씩 가진 친구들이 함께 모험을 떠난다는 설정이 마음에 급격히 와닿았다. 지금까지의 비디오 시청이 람보나 코만도 같은 히어로들의 스펙터클을 멀찌감치 떨어진 자리에서 감상하는 것이었다면, 이 영화에는 바로 나와 우리의 이야기가 무방비 상태인 소년들 앞에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스탠 바이 미>는 ‘람보와 코만도의 세계’ 너머의 첫 영화였다.
<스탠 바이 미>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개봉 당시 유행했던 1950년대 복고 스타일이다. 소리를 들어보면 테마곡인 벤 E. 킹의 <Stand By Me>는 물론이고, 중간중간 삽입되는 50년대 팝의 멜로디들이 선명하다. 시각적으로는 리버 피닉스의 청바지 핏과 컨버스 운동화가 인상적이었고, 내 몸으로는 그런 맵시가 나올 수 없음을 좌절하게 만든 비주얼이기도 했다. 그러나 12살이었던 나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이야기의 결말이었다. 모든 갈등이 시원하게 해소되는 ‘람보와 코만도의 세계’와 달리 소년들의 모험은 성공을 거두지 못한 채로 애매하게 끝난다. 뿐만 아니라 평생 이어질 것 같았던 네 친구의 우정은, 그 모험을 정점으로 희미해져갔음을 확인시켜준다(심지어 한 친구는 요절한다). 이 영화의 현실감 있는 결말은 우정과 미래에 대한 슬픈 예언처럼 보였다. 영원할 것 같은 우정도 언젠가는 시들해질 수밖에 없고 우리의 삶 자체도 언젠가는 끝날 수밖에 없다는 현실. 한국으로 돌아갈 시간이 겨우 한달 남짓 남아 친구들과 곧 이별할 수밖에 없는 나의 상황과 겹치며 더욱 강렬하게 다가온 현실이었다. 몇주 뒤, 이사 준비하느라 짐이 얼마 남지 않은 집에서 혼자 이 영화를 다시 보며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난다.
애지중지하던 VHS 테이프도 어디론가 사라진 지 오래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컴퓨터를 켜놓고 유튜브에서 결말 부분을 다시 찾아보았다. <스탠 바이 미>의 마지막 시퀀스는, 30여년이 지나 중년의 작가가 된 주인공이 옛일을 추억하며 컴퓨터 스크린에 원고를 작성하고 있는 장면이다. 지금은 그 친구들의 행방을 알지 못하는 터라 더욱 아련하다. 컴퓨터 스크린에 떠 있는 원고의 결말은 다음과 같다. “나는 12살 때 친구들 같은 친구를 평생 다시 만난 적이 없다. 12살 때의 우정보다 나은 우정을 만나본 사람이 과연 있을까?”
<스탠 바이 미>의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중년이 된 나 역시 컴퓨터 앞에 앉아 원고를 작성하며 30년 전의 일을 생각한다. 파편으로 남은 사실들을 재조직하느라 힘겨워하는 머리를 식히기 위해 인터넷 탭을 하나 더 열어 잠시 타임라인을 훑는다. 스크롤을 조금 내리다보니, 12살 때의 그 친구 중 한명이 오늘 저녁으로 먹은 음식 사진이 올라온다. 그의 아내와 아이들도 사진에 태그되어 있다. 반쯤은 의무감으로 그 페퍼로니 피자에 ‘좋아요’를 클릭한다.
이태웅 KBS 스포츠국 프로듀서. <풋볼매니저>라는 축구 게임 중독으로 대학 생활을 보낸 덕에 2002 한•일월드컵의 바람을 타고 이듬해 KBS에 입사할 수 있었다. 수년간 각종 스포츠 중계 현장을 전전하다가 우연히 다큐멘터리 제작에 매력을 느끼게 되어 <천하장사 만만세> <공간과 압박> <숫자의 게임> 등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