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라 소렌토로>는 <오 솔레 미오>와 더불어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가곡이다. 두곡 모두 남부 이탈리아의 노래다. 태양을 찬양하는 <오 솔레 미오>는 나폴리의 노래이고, <돌아오라 소렌토로>는 나폴리 바로 아래 있는 조그만 도시 소렌토의 노래다. <오 솔레 미오>는 밝고 힘찬 사랑의 찬가다. 반면에 <돌아오라 소렌토로>는 떠나가는 연인에게 호소하는 구슬픈 연가다. 노래의 첫 소절인 ‘바다를 보라, 얼마나 아름다운가!’에서부터 감정이 풍부한 사람은 눈물을 떨어뜨린다. 고향의 ‘바다’라는 단어에서 금방 애절한 감정이 느껴지기 때문일 테다. 산업화 과정에서 낙후된 남부의 가난한 사람들은 일을 찾아, 이탈리아의 북쪽으로, 또 외국으로 대거 떠났다. 떠난 연인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동원하는 단어가 고향의 바다, 공기, 오렌지 나무 같은 소렌토의 자연이다. 그만큼 소렌토의 자연은 사람의 마음을 뺏을 만큼 매력적이라는 방증일 테다.
아말피 해안을 알린 로맨틱 코미디들
소렌토(Sorrento)에서 남쪽 살레르노(Salerno)까지를 보통 ‘아말피 해안’이라고 부른다. 자동차로 넉넉잡아 1시간 거리다. 바다를 끼고 해안도로가 연결돼 있어서, 도로의 위로는 숲과 아름다운 저택들이, 그리고 도로의 아래로는 비취색 바다가 끝없이 펼쳐지는 곳이다. 북쪽 제노바 근처의 ‘친퀘테레’(Cinque Terre, 다섯개의 땅이란 뜻)와 더불어 이탈리아 최고의 해안 풍경을 자랑한다. 아말피 해안에서 가장 소문난 도시는 노래 덕분인지 소렌토일 것이다. 소렌토는 표준어이고, 이 지역에서는 ‘수리엔토’(Surriento)라고 불린다. 노래의 원래 제목도 ‘돌아오라 수리엔토로’(Torna a Surriento)이다. 2012년 덴마크 감독 수잔 비에르가 만든 <다시, 뜨겁게 사랑하라>는 소렌토의 명성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소렌토만큼은 아니지만 ‘아말피 해안’이라는 이름이 유래한 곳인 아말피(Amalfi)와 그 주변의 포지타노(Positano), 라벨로(Ravello) 등이 가장 유명하다. 각각 5천명, 4천명, 2500명 정도의 주민이 거주하는 소도시다. 아말피 해안의 도시를 좁혀 말하면, 대개 이 세 도시를 지칭한다.
아말피 해안이 유명해지는 데는 미국의 영향이 컸다. 2차대전 중에 나폴리가 미국의 군항으로 이용되면서 그 주변은 미군들, 미군 가족들의 주요 휴양지가 됐다. 나폴리는 물론이고 소렌토 같은 주변 도시들이 이때 외지인들의 주목을 받는다. 그리고 <분노의 포도>(1939)의 소설가이자 여행 에세이스트인 존 스타인벡이 당시는 무명이던 포지타노를 중심으로 이 지역을 소개하고, 이후 재클린 케네디가 가족의 여름 휴가지로 이곳을 자주 방문하면서, 아말피 해안은 급속하게 세계의 관광지로 알려졌다. 아말피 해안은 이제 너무 유명하여, 성수기 때 방문하면 풍광의 감상은 커녕 사람들에게 치이다 시간을 다 보낼 수 있다. 그만큼 남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최고의 관광지가 된 것이다.
도시들이 너무나 아름답기 때문일까? 이 지역 배경의 영화로는 꿈같은 사랑을 표현하는 로맨틱 코미디가 주로 발표됐다. 아말피 해안을 현대의 영화팬들에게 각인시킨 대표적인 로맨틱 코미디는 노먼 주이슨 감독의 <온리 유>(1994)일 것이다. 과거에 소피아 로렌이 주연한 <소렌토의 염문>(감독 디노 리지, 1955) 같은 이탈리아 고전들은 이미 있었지만, 외부인들에게까지 유명하지는 않았다. <온리 유>는 운명적인 남자와의 결혼이라는 낭만적인 꿈을 좇는 여성 페이스(마리사 토메이)의 모험담이다(이 영화는 2015년 탕웨이 주연의 <온리 유>로 리메이크됐는데, 배경은 다르다). 피츠버그 출신의 페이스가 ‘상상의 남자’를 좇아가는 곳이 이탈리아다. 그러면서 영화는 자연스럽게 이탈리아의 풍광을 이용하는 여행 코미디가 된다. 페이스는 결정적인 순간에 계속 ‘운명의 남자’를 놓치는데, 영화의 후반부에서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찾아간 곳이 아말피 해안의 소도시 포지타노이다. 로마에서 출발한 차는 아말피 해안도로를 달리고, 이때 펼쳐지는 풍경은 코미디의 내용을 잊어도 좋을 만큼 빼어나다. 푸른 바다, 흰색 빌라들, 도로 위의 양떼들이 어울려 이곳은 고대 그리스의 목가적인 풍경화와도 닮아 있다. 아말피 해안의 세 도시 가운데, 로마에서 출발하면 처음 만나게 되는 포지타노는 바닷가 바로 옆의 산기슭에 펼쳐진 어촌의 동화 같은 모습으로 유명하고, 바로 이곳에서 역설적으로 ‘페이스의 동화’는 꿈에서 깨어난다. 아마 포지타노의 풍경이 동화의 상상을 뛰어넘는 비현실의 매력을 갖고 있기 때문일 테다. 포지타노는 동화보다 더 동화 같은 공간인 것이다.
파졸리니의 ‘민중’ 데카메론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는 세 번째 장편인 <마태복음>(1964)의 성공 덕에 제법 안정적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마태복음>은 마르크스주의자가 그린 ‘성화’(聖畵)라는 이유 때문에 발표 당시 대단한 논란거리였다. 예상과 달리 파졸리니의 동료들인 좌파 가운데 다수가 이 영화는 ‘순응적’이라며 비판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럽 좌파의 리더라고 할 수 있는 장 폴 사르트르가 ‘민중적 매력’을 평가하면서 파졸리니를 옹호했고, 덩달아 영화는 더욱 유명해졌다. 결과적으로 <마태복음>은 비평과 흥행 모두에서 좋은 성과를 냈다(베네치아국제영화제 은사자상). 그런데 이 작품 이후 파졸리니는 리얼리즘과는 거리가 있는 <매와 참새>(1966), <테오레마>(1968), <돼지우리>(1969) 같은 알레고리 드라마들, 그리고 그리스 비극을 각색한 <오이디푸스 왕>(1967), <메데아>(1969) 등을 발표했는데, 약간 난해한 이런 작품들은 대중과 만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진지하고 사뭇 학문적인 작품들을 내놓던 이때는 소위 ‘파졸리니의 귀족시대’라고 불리는데, ‘68혁명’ 전후의 주관성이 강조된 이런 작품들로, 파졸리니는 대중 관객과는 멀어지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
파졸리니가 관객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발표한 작품이 <데카메론>(1971)이다. 조반니 보카치오의 원작에 실린 100개의 이야기 가운데 9편을 선택했다. 보카치오의 소설은 피렌체 인근이 주 무대이고, 이야기를 펼치는 인물들도 피렌체 출신의 신사 숙녀들이다.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도 교육받은 사람들이 쓰는 토스카나의 지역어이다. 당대의 토스카나 말은 단테, 페트라르카 등의 문학작품 속에 등장하듯, 사실상의 표준어와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파졸리니는 원작을 ‘민중적’으로 바꾸었다. 파졸리니는 원작에서 하층민이 주인공인 이야기를 선택했고, 그럼으로써 영화의 배경도 자연스럽게 이탈리아 남부의 나폴리와 그 주변이 됐다. 당연히 언어도 나폴리의 지역어이고, 그것도 별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쓰는 상스런 말을 이용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변화는 테마를 사랑, 아니 ‘섹스’로 압축한 점이다.
순진한 청년이 여성의 사기에 속아 똥통에 빠지는 첫 번째 에피소드부터 <데카메론>은 예사롭지 않을 것이란 예상을 하게 했지만, 두 번째 ‘수녀원 에피소드’부터 관객은 곧바로 경악하게 된다. 두 번째 이야기는 섹스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한 청년이 일부러 벙어리인 척하고 수녀원에 정원사로 들어가면서 시작한다. 아름다운 바다를 끼고 산기슭에 세워진 순결한 인상의 수녀원이 바로 아말피 해안의 라벨로에 있는 ‘성모 승천 교회’(Chiesa della Santissima Annunziata)다. 이 지역 특유의 흰색 건축물과 수녀들이 부르는 찬가, 그리고 종소리는 수녀원을 순결의 상징으로 표현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이곳에 건강한 청년이 등장하니, 긴장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한 수녀가 그와 사랑을 나누면서, ‘금지’는 순식간에 풀어지고 만다. 화면엔 곧바로 당시의 금기를 깨는 발칙한 위반들이 연속하여 등장한다. 남녀의 전신나체(특히 남성 나체의 강조), 남녀 성기의 클로즈업, 발기된 성기의 표현들이 잇따랐다. 이런 금기는 당시로선 이탈리아영화 최초의 것이었다. 그리고 갖가지 체위들이 이어졌다.
알다시피 이탈리아는 가톨릭의 본산이고, 성지 바티칸이 있는 곳이다. 파졸리니는 작심하고 반교회적인 위반을 적나라하게 펼쳤는데, 그럼으로써 <데카메론>은 민중을 위한 코미디일 뿐만 아니라, 제도의 권위에 도전하는 정치적 선언이 됐다. 성적 금지에 압축된 제도권의 권위주의에 분노하며, 이를 파괴하려던 파졸리니의 열정은 스크린 가득히 느껴질 정도이고, 이는 자신의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뜨거웠다. 소위 ‘생명 3부작’인 <데카메론>, <캔터베리 이야기>(1972), <천일야화>(1974)는 파졸리니의 탐미적인 형식이 절정에 이른 것이기도 하고, 동시에 반권위주의의 열정이 가장 뜨거울 때의 작품들이기도 하다. 마지막 작품인 <살로, 소돔의 120일>(1975)이 발표될 때까지, 1970년대의 파졸리니는 이탈리아 사회와 극심한 불화 속에 놓여 있었다. 그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것은 당시에 발표된 ‘민중적’ 드라마들의 도발과 관계없지 않을 것이다. 그 포문을 연 작품이 바로 <데카메론>이다(베를린국제영화제 은곰상). 그럼으로써 아말피 해안의 아름다운 소도시 라벨로는 절경과 더불어 ‘파졸리니의 위반’도 겹쳐 떠오르게 했다.
존 휴스턴과 험프리 보가트의 ‘이탈리아 기행’
아말피 해안에 숨어 있던 라벨로를 파졸리니보다 먼저 찾은 감독은 존 휴스턴이다. 존 휴스턴은 험프리 보가트와 오랜 술친구다. 보가트가 7살 위인데, 두 사람은 무명배우와 시나리오작가일 때 거의 매일 만나 술을 마시며 우정을 쌓았다. 두 남자 모두 헤밍웨이처럼 여행과 사냥을 좋아하는 남성적인 타입이었다(헤밍웨이는 휴스턴의 친구이기도 하다). 휴스턴은 작가 시절, 자신이 감독으로 데뷔하면 주연을 맡아달라고 보가트에게 부탁했고, 그 약속이 결실을 맺은 게 <말타의 매>(1941)이다. 두 사람은 이후에도 <시에라 마드레의 보물>(1948), <키 라르고>(1948), <아프리카의 여왕>(1951) 등에서 협업하며 자신들의 경력과 우정을 쌓았다.
이들은 정치적 성향도 비슷했는데, 미국에서 국수주의 매카시즘이 기세를 올릴 때, 그 반대쪽에 서서 영화인들의 입장을 대변하기도 했다. 매카시즘의 공격은 집요했고, 두 사람은 영화를 계속 만들기 위해, 또 그 공격을 피하기 위해 외국으로 ‘여행’을 떠나기 시작했다. <아프리카의 여왕>을 찍으려 우간다와 콩고로 갔고, 말 그대로 휴식을 갖기 위해 간 곳이 이탈리아의 아말피 해안이었는데, 여기서 만든 작품이 범죄물인 <비트 더 데블>(Beat the Devil, 1953)이다. 당시 시칠리아에 머물던 작가 트루먼 카포티가 각본을 마무리하기 위해 이곳에 합류했다. 이들이 주로 머문 곳이 바로 <데카메론>에서 수녀원 에피소드가 촬영된 라벨로이다.
미국인 부자 빌리(험프리 보가트)는 아내 마리아(지나 롤로브리지다)와 함께 시내의 호텔에 머물며, 비밀리에 음모를 꾸미고 있다. 무슨 약점이 잡혔는지, 빌리는 나치 잔당으로 보이는 ‘악당 4인방’의 통제를 받고 있다. 악당들은 아프리카로부터 은밀히 우라늄 광산을 취득하기 위해 작전을 짜는 중이다. 여기에 영국인 여성(제니퍼 존스)과 그의 귀족 남편까지 끼어든다. 정리하자면 일확천금을 보장하는 우라늄을 손에 넣기 위해 여러 사람들이 달려들었고, 최종적으로 우라늄은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의 손에 들어가는 범죄물이다. 휴스턴의 데뷔작 <말타의 매>의 이야기 구조와 비슷한 셈이다.
빌리든, 악당들이든, 또 영국인 부부이든 이들은 모두 자신들이 이미 부를 성취한 특별한 사람인 듯 허세를 떠는데, 그런 허세의 배경으로 아말피 해안의 아름다운 도시 라벨로가 이용되고 있다. 빌리는 허영기가 넘쳐 보이는 영국인 부인 제니퍼 존스(금발로 분장했다)를 데리고, 라벨로 해안을 장식하고 있는 화려한 빌라들을 마치 자기 집처럼 친근하게 소개한다. 빌라 장면의 절정은 험프리 보가트가 제니퍼 존스와 함께 해안의 바위 위에 지어진 ‘빌라 침브로네’(Villa Cimbrone)에 갔을 때다. 여기서 빌리는 작전을 위해 접근했던 영국인 여성에게 사적인 감정까지 느낀다. 빌라 침브로네는 11세기에 지어진 라벨로의 대표적인 별장인데, 특히 아말피 해안의 절경이 한눈에 보이는 ‘영원의 테라스’(Terrazza dell’Infinito)로 유명하다. 이곳에서 바라본 아말피의 바다가 가장 아름답다는 이유에서다. 2014년 영국의 마이클 윈터보텀은 <트립 투 이탈리아>에서 ‘영원의 테라스’를 방문하며, 휴스턴의 <비트 더 데블>에 오마주를 표현하기도 했다.
로만 폴란스키가 그린 ‘아말피의 휴일’
‘아말피 해안’이라는 이름이 유래한 도시인 아말피는 로만 폴란스키의 부조리극 <무엇?>(1972)의 덕을 봤다. 폴란스키는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악마의 씨>(1968)로 세계의 유명 감독으로 우뚝 섰는데, 알다시피 ‘유명한 불행’이 뒤따랐다. 당시 아내이자 배우인 샤론 테이트가 살해되는 끔찍한 사고가 났다. 당시까지 매년 한편씩 왕성하게 영화를 만들던 폴란스키는 사건의 충격 때문인지 다시 유럽으로 돌아갔고, 런던에 머물며 칩거에 들어갔다. 3년 만에 발표한 <맥베스>(1971)는 그가 여전히 아내의 불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짐작할 정도로 폭력적이고 잔인했다. 정신적 고통에 빠져 있던 그를 이탈리아의 아말피로 초대한 제작자가 카를로 폰티다. 소피아 로렌의 남편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가 폴란스키에게 제안한 것은 아말피를 배경으로, 휴양을 하듯, 조그만 코미디를 하나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 작품이 <무엇?>이다.
<무엇?>은 폴란스키의 경력 초반부인 런던 시절에 발표됐던 폐쇄공포증의 테마를 이용한 코미디다. 당시의 콤비인 프랑스 작가 제라르 브라흐가 각본을 썼다. 브라흐는 밀폐된, 혹은 고립된 하나의 공간에서 스릴 넘친 이야기를 펼치는 데 발군의 솜씨를 보인 작가다. <막다른 골목>(1966)의 농가, <박쥐성의 무도회>(1967)의 고립된 성, 그리고 <무엇?>에선 아말피의 빌라 하나가 영화의 전체 배경이다. 제작자 폰티가 아말피 해안에 소유한 빌라 한곳에서 주요한 이야기가 모두 촬영됐다.
미국인 관광객 낸시(시드니 롬)는 아말피 해안에서 길을 잃고, 지나가던 차를 얻어 탄다. 친절해 보이던 남자 세명은 갑자기 낸시를 폭행하려 하고, 낸시는 가까스로 차에서 빠져나와 길 옆의 거대한 빌라로 무작정 도망쳐 들어간다. 그런데 마치 루이스 캐럴의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낸시는 이 빌라에 들어간 뒤, 평생에 한번도 만날 것 같지 않은 괴상한 사람들을 계속 경험하는 것이다. 이상하기는 낸시도 마찬가지다. 도망치는 과정에서 옷이 거의 다 찢겨버려, 낸시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거의 반라(半裸)로 등장한다.
해안의 바위 위에 건축된 흰색 빌라에는 주인은 보이지 않고, 이탈리아 특유의 바람둥이 같은 남자 알렉스(마르첼로 마스트로이안니), 낸시의 방에 구멍을 뚫고 몰래 쳐다보려는 ‘변태들’, 하루 종일 탁구만 치는 남자 커플 등 괴상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이들은 갑자기 등장한 낸시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낸시가 알렉스와 복장도착과 마조히즘의 변태적 섹스를 나눈 뒤, 다른 사람들을 만나며 더욱 알 수 없는 세계 속으로 뒤죽박죽 빠져가는 게 <무엇?>의 주요 내용이다. 낸시는 앨리스처럼 현실이 아니라, 동화 같은 비현실의 공간을 헤매고 있는데, 지나치게 아름다운 아말피는 그런 비현실을 자연스럽게 느끼게 만든다.
말하자면 <무엇?>은 꿈과 비슷한 전개를 따른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낸시는 겨우 이상한 빌라를 빠져나가는데, 알렉스가 뒤따라오며 “지금 무엇하냐?”라고 묻자, “나도 몰라, 아마 영화일 거야”라고 답한다. 다시 말해 <무엇?>은 영화를 한편의 꿈으로 접근했고, 꿈은 곧 영화라는 ‘영화에 대한 영화’, 곧 메타시네마로서의 골격을 드러낸다. 그 꿈이 아말피의 꿈같은 해안에서 전개되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닐 테다. 제목 <무엇?>은 결국 영화를 의미하는 것이고, 우리는 한편의 꿈처럼 뒤죽박죽 얽혀 있는 이야기를 본 것이다.
다음엔 아말피 해안과 더불어 이탈리아 최고의 바다로 꼽히는 ‘친퀘테레’와 그 주변에 가겠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구름 저편에>(1995)가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