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스페셜] <아수라>에 대해 김성수 감독과 오승욱 감독이 긴 대화를 나누다
2016-10-12
진행 : 주성철
진행 : 윤혜지
사진 : 오계옥

<아수라>에 대해 좀더 이야기하고 싶었다. 지금껏 나온 여러 비평과 반응들을 보면서 어딘가 미진한 지점이 있다고 느꼈고, 그를 해소해줄 적임자가 오승욱 감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수라>의 김성수 감독이 지난해 5월 오승욱 감독의 <무뢰한> 개봉 당시 인터뷰어로 나서준 적 있기에(<씨네21> 1006호, 김성수 감독이 <무뢰한>의 오승욱 감독을 만나다), 그 자리를 바꿔 만나는 것도 무척 흥미로울 것 같았다. 당시 김성수 감독은 “오승욱 감독 영화에는 상처받고 외로운 인물들이 비슷한 처지의 인물을 만나 더 큰 실패담을 만들어낸다”며 “인물들을 그렇게 끝까지 몰아붙여서, 그래서 과연 행복한지?” 하고 물었다. 1년의 세월이 흘러 이번에는 오승욱 감독이 김성수 감독에게 <아수라>에 대해 꼼꼼하게 물었다. 대담을 준비하며 시나리오를 다시 읽고 이전 편집본까지 챙겨본 오승욱 감독은 <아수라>에 대해 “이건 김성수 감독님이 지금까지 만들어왔던, 뜻하지 않게 곤경에 빠진 남자들의 영화”라고 전제한 뒤, “지금까지 한국영화에 없던 방식으로 남성들의 얘기를 풀고 있다”며 세간의 올드한 영화, 자극적인 남자영화 같은 개념들을 ‘초월’하는 영화이자 전혀 올드하지 않은, 오히려 그 반대의 새로운 영화라고 말했다. 그렇게 두 사람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김성수_ 이 대담을 시작하는 지금의 내 마음이 <아수라>에서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한도경(정우성)의 마음이다. (일동 웃음) <무뢰한>(2015)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그 영화로부터 영향받은 부분이 분명히 있고, 또 그 <무뢰한>의 오승욱 감독이 <아수라>에 대해 어떻게 평할까 너무 조마조마했었다. 그런데 오다가다 만나도 영화 어떻게 되고 있냐고 전혀 물어보질 않더라고. 독한 인간이다. (웃음)

=오승욱_ 너무 궁금해서 그런 것일 뿐이다. 극장에서 완성된 결과물로 보기 전까지는 그 어떤 것도 예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VIP 시사 때 본 건데, 난 이 영화가 진짜 좋았다. 그리고 또 새로웠다. 그런데 <아수라>가 올드하다는 반응들도 있어서 그 올드함에 대해서 고민해봤다. 그게 나쁜 건 아니지 않나. 나는 <아수라>가 지금까지 한국영화에 없던 방식으로 남성들의 얘길 풀고 있다는 이유로 <아수라>를 올드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주인공 하나만 쭉 따르는 영화가 아니기에 관객에게 영화가 쉽게 다가가지 못한 거라 생각한다. 내가 워낙 불균질한 영화들을 좋아하지만, 뭔가 그와 다른 느낌이 있었다. 불균질한 영화들은 대개 감독이 어떤 이야길 하고 싶은 욕망 때문에 과잉이 되기도 하고 산만해질 수도 있다. 반면 <아수라>는 그걸 초월했다. 부글부글 끓어넘친다.

김성수_ 올드하다고 해도 상관없다. 나는 내가 경험한 세대의 언어들, 내가 알고 있는 기호들을 쓸 수밖에 없다. 그 언어와 기호가 지금의 관객에게 익숙한 방식이 아니니까 표현이 구닥다리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오승욱_ 한도경 대사에 “좆이나 뱅뱅”이란 말이 있잖나. 그것 때문에 올드하다고 하는 건가.

김성수_ 그 표현 자체는 내가 제안한 건데, 한재덕 대표가 실제로 “너무 올드하다”고 그러더라. 그러면서 정작 자기는 “좆도로바이킹”이 어떠냐고 했는데, 솔직히 그건 좀더 아니지 않나. 지나치게 변두리 느낌이다. (일동 웃음) 그다음 나온 게 “좆까라마이싱”인데 그건 또 너무 익숙한 말이고.

“야, 이건 눈싸움 영화구나”

오승욱_ <아수라>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눈싸움이었다. 역전된 관계, 굴종의 단계, 누군가 조금이라도 승했을 때의 단계가 배우들의 눈으로만 표현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아수라>는 시선에 대한 계산이 철저한 영화다. 한도경은 누굴 만날 때 시선으로 그 사람을 제압하려는 사람이다. 좀 과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게 한도경이라는 인간이다. 영화에서 한도경이 검사들의 수사차량에 타잖나. 그때 검사팀은 한도경의 얼굴에 카메라 라이트를 비추어 그의 시선을 방해해 기선을 제압하려 한다. 한도경은 눈이 부시지만 기싸움을 하느라 그 안에 있는 사람들 앞에서 계속 눈을 부라리면서 위협적으로 보이려고 하는데, 김차인(곽도원)이 들어오면서 하는 첫 대사가 “눈부셔. 꺼라”다. 김차인은 자신이 위에 있는 놈이라 카메라 라이트 따위로 한도경의 시선을 제압할 필요가 없다. 그때부터 김차인이란 캐릭터가 아주 선명하게 들어왔다. 김차인이 앉고 나선 둘의 탐색전이 시작되는데 한도경은 이전처럼 노려보는 게 아니라 슬슬 눈치를 본다. 그러고는 사직서가 등장하자마자 한도경이 다시 눈에 힘을 주기 시작하는데, 그때부터 서로 눈싸움을 시작한다. 그래서 야, 이건 눈싸움 영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한민국의 모자란 남성들이 만나면 꼭 하는 게 눈싸움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눈을 내리깔았다는 기억만으로 2박3일 동안 통탄하는 게 한국 남자다. (일동 웃음) 재밌는 건 앞 장면에서 한도경이 박성배(황정민)를 만날 때는 팔자 눈썹을 하고는 정말 순한 강아지 눈으로 박성배를 바라본다. 또 다른 장면에선 김차인이 자신의 상관인 오 부장검사(최병모)를 만날 때 절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오 검사의 넥타이 핀이나 두 번째 단추를 본다. 한국 관료들의 매뉴얼 같은 건데, 배우들이 그걸 정확하게 지키는 연기를 한다. 인물의 입이나 코가 아니라 눈을 보게 만들더라. 정말 집요하다 싶었다. <아수라>는 비열하고, 야비하고, 더럽고 치사한 대한민국 남자들만을 모은 열전 같기도 하다. (웃음)

김성수_ 배우들의 힘이 컸다. <아수라>에서 인물들의 대사는 사실상 하나마나한 것들이다. 다 거짓말만 한다. 거의 허세를 떨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상대를 떠보거나 제압하기 위해 간을 보는 말들이다. 그래서 대사와 표정 사이에 괴리가 있다. 배우들 스스로가 ‘내가 이 대사를 치고 있지만 시선처리는 어떻게 해야 되겠다’는 훌륭한 계산이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요구한 건 마지막 장면 찍기 전에 조금 미리 와서 블로킹(서 있는 자리 등에 대한 지시) 연습을 해달라는 것 정도였다. 동선의 변화들이 생기면서 폭력의 주종관계가 바뀌는 장면이 많아서 움직임이 정교할 필요가 있었다. 한도경이라는 모자란 놈이 처음으로 자해를 하면서 자기 주인한테 이빨을 드러내는 장면은 가만히 앉아서 해도 굉장한 에너지가 만들어지는 신이어서,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인물 대 인물로 반듯하게 찍은 장면이다. 나머지는 인물과 카메라가 비좁은 데서 막 어우러지면서 찍었다. 배우가 아니라 이모개 촬영감독의 카메라에 맞춰서 블로킹을 짰을 정도다. 어떻게든 좁은 곳을 찾아들어갔다. 이모개 촬영감독과 장근영 미술감독이 원래 친한 사이인데, 모여서 그런 얘기를 하더라. ‘우리가 이 나이에 비주얼리스트라는 소리 들어서 뭐 하겠냐’고. (웃음) <아수라>는 스토리나 사건의 영화가 아니라 인물들간에 이뤄지는 드라마이기 때문에 그들을 날것으로 담는 데 모든 공을 들였다. 그러려면 블로킹 라인을 정확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조명감독에게도 조명을 잘게 쪼개달라고 했다. 조명이 닿고, 안 닿는 구간을 세밀하게 요구했다.

오승욱_ 명민한 배우는 자기가 카메라에 담기는 공간에 들어갔을 때, 빛이 어떻게 들어올지를 감각적으로 안다. 그걸로 자기 얼굴이 다양하게 보이는 걸 즐긴다. <아수라>의 배우들이 연기를 잘했다는 건 대사나 표정 그 자체보다 바로 그 때문이다. 자기가 서 있어야 할 자리를 딱 안다. 김성수 감독님은 배우들의 공으로 돌리지만 그건 분명히 감독과 함께 만드는 거다. 그런 점에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처럼 진짜 ‘선배’의 영화를 본 것 같다. 이제 공간 얘기를 해보면, 영화가 시작하고 한도경 내레이션과 함께 안남이라는 도시가 펼쳐지는데 거기가 (<아수라>를 제작한 사나이픽처스가 위치하고 있는) 한남동인 줄은 몰랐다.

김성수_ 내가 한남동에서 컸다. 세월을 거의 그대로 머금고 있는 곳이다. 영화 속 안남이란 가상의 도시는 말하자면 <아수라> 버전의 고담시다. 내 학창 시절인 1970~80년대는 도처에서 재개발을 외치며 다 뒤집어엎고 바꾸는 게 유행이었다. 그때마다 힘 있는 사람들은 다들 한몫씩 챙겨갔고 못 챙기는 놈은 병신 취급을 받았다. 영화 속 안남시를 구성하는 것들은 사실 지금의 것들이 아닌 거다. 내 기억 속 1970~80년대 서울 변두리 산동네이거나 도시 빈민, 외국인 노동자들이 모인 안산 같기도 한 무국적의 도시지. 나는 <카사블랑카>(1942)나 <공포의 보수>(1953)에 나오는 그런 도시를 만들고 싶었다. 외국인을 숏마다 등장시켰다. 어린애들은 부모 대신 누군가 나이 든 노인이 돌봐주고 있고.

오승욱_ 그러고 보니 한도경이 <공포의 보수>에서 이방인들이 모여 사는 남미의 어느 한 지방으로 흘러들어간 이브 몽탕 같기도 하다. 작대기(김원해) 얘기도 해보자. 작대기는 뭘 그렇게 잘 던지고, 도망치는 것도 자꾸 위로 올라가잖나. 약 먹은 원숭이처럼 보이더라.

김성수_ 우리는 ‘안남 골룸’이라 불렀다. (웃음) 전적으로 그 캐릭터는 김원해 배우가 만든 거다. 내가 처음 생각한 작대기 이미지는 덩치가 크고 우락부락한 캐릭터여서 원해씨가 어울리지 않았다. 솔직하게 내 얘기도 전했다. 그런데 “제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해볼게요”라고 하더라. 우리 영화 처음 배울 때 교과서적으로 한신 한신 해체하고 분석해서 쌓는 것처럼 원해씨가 그렇게 캐릭터를 분석해왔다. 세 번째 만났을 땐가 머리를 확 밀고 나타났는데 뭔가 느낌이 왔다. 그래서 사나이픽처스가 있는 그 낡은 건물의 계단 위로 잠깐 서보라고 하고는 바로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몇장 찍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지만 내가 연상하던 그 이상의 이미지였다. 돌이켜보면 지금껏 나는 중심인물을 정할 때 언제나 만들어져 있던 배우를 가져와서 썼는데, 이렇게 배우와 뭔가를 주고받으면서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 쾌감을 느껴서 앞으로 영화할 때도 좀 그렇게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평소에 원해씨는 정말 점잖고 지적인 분인데 어떻게 그런 연기를 하는지. (웃음)

오승욱_ 나하고 일면식도 없는 분인데 VIP 시사회 보고 나왔더니 극장 복도에 계시더라. 너무 반가워서 나도 모르게 주먹 꽉 쥐고 달려가면서 “영화 너무 좋아요!”라며 껴안으려고 하니까 놀라서 도망가시더라. (웃음)

“이거 <비명도시>네요”

오승욱_ 대담을 준비하면서 시나리오랑 이전 편집본을 봤다. 이전 편집본이 영화에 최종으로 나온 거랑 다르더라. 영화에선 사고치고 나서 한도경이랑 문선모(주지훈)가 서로 마주보며 <아수라> 타이틀이 뜨는데, 이전 편집본은 황 반장(윤제문) 장례식장에 와서 두 남자가 젖어서는 물을 뚝뚝 흘리면서 마치 단죄를 받아 효수가 된 것 같은 느낌으로 있다가 암전된 뒤 타이틀이 뜬다. 이전 편집본대로 갔으면 죄의식에 관한 영화가 됐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최종 개봉 버전처럼 ‘우리 좆됐어’ 하는 표정의 두 남자로 시작하니까, 이건 김성수 감독님이 지금까지 만들어왔던 뜻하지 않게 곤경에 빠진 남자들의 영화가 됐다.

김성수_ 그건 김상범 편집감독님 생각이었다. 이 영화는 ‘누구든 인간은 죽는다. 그러니 이 형도 언젠간 죽었을 것’이란 자기변명으로 시작해서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나는 오늘 죽었다’로 끝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도경의 죄로부터 출발하는 영화이기 때문에 그걸로 번민하는 정서적 장면이 영화를 느슨하게 만드는 거 같다는 편집감독님의 의견이 있었다. 사실 처음엔 동의하지 않았는데 영화를 본 사람들이 지금 버전이 다들 좋다고 하더라. (웃음)

오승욱_ 감독님의 단편 <비명도시>(1993)랑 <런어웨이>(1995)와도 비슷한 점이 있다. <비명도시>에서는 항상 골목길에서 일이 벌어지고 <런어웨이>도 주인공이 골목길에서 쫓긴다. <비트>(1997)에서도 민(정우성)이 지포라이터를 쥐고 복도에서 싸운다. <아수라>에서 제일 멋진 액션 신도 좁디좁은 복도에서 이뤄진 한도경과 문선모의 싸움이다. <무사>(2001)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사막에 고립된 고려 사람들의 이야기다. 항상 감독님의 주인공들은 곤경에 빠진 남자들이고, 그렇게 이야기를 단순하고 굵게 몰아가며 서스펜스를 준다. <아수라>는 곤경에 빠진 남자 주변에 그보다 더 많은 곤경에 빠진 남자들까지 늘어놓는다.

김성수_ 나도 놀란 게 있다. 어느 날, 과거 내 연출부이기도 했고, 이 영화에 배우로 출연도 한 황병국 감독이 한번은 그동안 찍은 걸 좀 볼 수 있겠냐고 하더라. 그러더니 “이거 <비명도시>네요. <비명도시>도 아내는 죽어가는데 남자가 골목에서 쫓기다 죽는 영화 아니에요?” 그러더라. 그렇게 오랜 시간 고민하다 진짜 찍고 싶었던 영화라고 내놓은 게 <아수라>인데, 나는 결국 그때 그 단편으로 다시 돌아가 있던 거다. 정말 놀라운 발견이었는데, 기분이 썩 좋지는 않더라고. (일동 웃음)

오승욱_ <아수라>는 그 아이디어의 완결편이라고 보면 되겠다. 과감한 플래시백도 인상적이다. 상황을 처리하고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도 되는데 플래시백이 훅 들어와서 상황을 설명하고 툭 빠져나가는데, 그게 영화의 속도감을 만들더라.

김성수_ 돌이켜보면, 나는 지금껏 한번도 플래시백을 써본 적이 없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다는 게 아니고, 의도적으로 기피해왔다는 게 맞을 거다. 그런데 필름누아르에 플래시백이 한번도 안 나오면 좀 그렇잖아? (웃음) 그러면서 러닝타임도 줄였다.

오승욱_ 영화에 플래시백이 두번 쓰인다. 한번은 한도경이 빗속에서 병실의 와이프를 떠올리는 장면, 그리고 또 한번은 범죄 현장을 은닉하고 취조실에서 취조받을 때인데 주인공이 한 짓거리가 만천하에 공개되는 느낌이 나서 재밌더라.

김성수_ 주인공이 거짓말하고 있다는 걸 강조하려는 의도는 있었다.

“‘어글리’가 주인공인 영화”

오승욱_ <아수라>의 인물들이 교차하는 걸 보면 세르지오 레오네의 <석양의 무법자>(1966)도 떠오르는데, <석양의 무법자> 원제가 ‘The Good, The Bad and The Ugly’잖나. 한도경은 묘하게 주인공인 ‘굿’이 아니라 ‘어글리’에 가깝다. 남성 감독들이라면 레오네 영화를 리메이크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번쯤 해봤을 것 같은데, 어글리가 주인공인 영화를 만들었다는 게 무척 흥미로웠다. 애초에 좋은 놈들은 하나도 없고 나쁜 놈들 사이의 이상한 놈 하나. 그래서 ‘The Ugly, The Bad and The Bad’. (웃음)

김성수_ 너무 띄워주는 거 아냐? (웃음) 아무튼 다른 사람들은 자발적 악인인 면이 있는데 한도경은 좀 비자발적인 악인, 그야말로 지질한 애다. 그래도 한도경은 <아수라>에서 유일하게 자기반성이란 걸 하는 인물이다. 이 영화 속의 어떤 인간도 남의 말을 듣지 않거든. 자기 신념에 가득 찬, 남의 얘길 결코 경청하지 않는 사람들만 모인 영화다. 후배인 문선모는 물론이고 심지어 작대기도 ‘내가 알아서 할 테니 형님은 신경쓰지 말라’고 한다. 그래도 한도경은 자기를 돌아볼 줄 아는 인물이다.

오승욱_ 박성배가 한도경 아내의 병실을 찾아가서 한도경하고 문선모를 나란히 세워두고는 “니들 형제 같은 사이라며?”라고 묻는 장면에선 인물이 마치 똥개 두 마리처럼 서 있더라. 그때만 해도 한도경이란 사람은 뼛속 깊이 자기가 똘마니란 생각으로 꽉 차 있다. 나중에 그걸 부정하고 깨버리고 얻은 게 ‘박쥐’라는 정체성이다. 누군가 “이런 박쥐 같은 새끼”라고 하는데 한도경이 영화 속에서 거의 처음으로 기뻐하는 얼굴을 보여주더라. ‘그래, 나 박쥐야. 이제 너네 알아서들 하셔’라는 느낌? 똥개가 자기 주체를 갖고 여기서 뜯어먹고 저기서 뜯어먹는 박쥐로 거듭난 거다. (웃음)

김성수_ 너무 확대해석인데? (웃음) 그래도 그렇게 해석해주니 재밌는 것 같다.

오승욱_ 한도경 얘길 좀더 하자면, 한도경이 문선모보다 약간 밀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을 때, 박성배의 행사장에 태병조 사장(김해곤)이 와서 사고를 친다. 거기서 어쩔 줄 몰라하는 문선모를 바라보는 한도경의 표정이 재밌더라. 박성배와 눈을 마주치고는 마치 ‘구관이 명관 아니겠어?’ 하는 느낌으로 칼을 들고 태 사장을 깔아뭉갠다. 그런데 그 뒤에 태 사장을 차로 밀어버린 문선모에게 박성배가 달려가서는 옆에 있던 한도경한테 “저리 가 이 새끼야. 너 얘한테서 떨어져”라고 한다. 나로선 군대에 있을 때, 어느 술자리에서 싸움이 났을 때의 기시감이 확 들었다.

김성수_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건 자연스러운 욕망인데, 나쁜 사회 안에선 그게 사악한 욕망이 되고 악행의 근원이 된다. 그건 김차인도 한도경도 문선모도 다 마찬가지다. 의지 자체는 좋지만 자기가 어디에 속해 있고, 어떤 사람을 보스로 모시며, 그가 무엇을 시키느냐에 따라서 선악이 갈린다. 결국 똘마니들은 자기 보스의 악의 우산을 떠받치는 꼴이다.

오승욱_ 어떻게 보면 영화 속 중심인물들 중에서 도창학(정만식)만이 제정신이 아닐까. 상사가 때리라니까 때리긴 하는데 그다음에 닦으라고 수건을 주니까 안 받는다. 약간 나름의 반항을 한다.

김성수_ 그건 뭐, 괜한 똥폼이다. (웃음)

오승욱_ 또 재밌던 장면은 한도경이 도청당하고 있다는 걸 다 밝힌 뒤에 수사차량 안의 남자들이 다 똥 씹은 표정을 한다. 그런데 차승미(윤지혜)만 웃더라고. 남자들 사이에서 ‘어휴, 병신 같은 새끼들, 완전히 끝장났구나’ 하는 느낌이 좋더라.

김성수_ 내가 의도한 건 이 일을 하는 주체들이 ‘낭패다!’ 하는 와중에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어쨌든 ‘오늘은 일이 빨리 끝나겠다’ 생각하게 되잖나. 그런 걸 보여주고 싶었다. (웃음)

오승욱_ 김차인이 짜장면을 던질 때도 다들 설설 길 때, 차승미 혼자만 ‘또 왜 지랄이냐’ 이런 한심해하는 느낌의 표정을 짓는다. (웃음) 남성 히스테리가 폭발하는 장면에서 윤지혜 배우의 연기가 재밌었다. 반면 한도경은 그런 장면에서 겁쟁이인 걸 들킬까봐 더 발광을 하고, 김차인은 평소 자기가 최고 권력자인 양 행세하다가 사실은 똘마니인 걸 지적받는 순간을 견디지 못한다.

김성수_ <무뢰한>의 정재곤(김남길) 대사를 빌리자면, 예리하시네. (일동 웃음)

오승욱_ 마치 ‘이 구역의 최고는 나’라고 생각하는 것 같던 한도경과 김차인이 각각 더 큰 힘에 무릎을 꿇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 재밌다.

김성수_ 자기들이 행한 대로 당하는 거다. 한도경이 작대기한테 한 행동을 자기가 똑같이 당하게 된다. 문선모를 꼬드길 때 썼던 언어적 폭력이 또 똑같이 자기에게 돌아오고, 김차인이 섹스 동영상으로 한도경을 협박하면서 강제로 무릎 꿇게 했지만 박성배 앞에서 자신도 똑같이 동영상으로 고통받는다. 더 강력한 부메랑을 맞는 걸 반복하고 있다.

<아수라>의 배우들, 그 절묘한 힘의 관계

오승욱_ 영화감독으로선 대사 말고 배우의 기운과 분위기로만 영화를 만들고 싶단 생각을 할 때가 있는데, 김차인이 한도경에게 처음 동영상을 보여줄 때 둘이 눈과 기로만 싸우더라. 난 그런 영화가 좋다. 아까도 눈싸움 얘기를 했지만, 눈으로 싸우는 걸 관철해낸 것이 <아수라>의 여러 성취 중 하나인 것 같다.

김성수_ 내가 곽도원한테 “넌 이 동영상으로 얘를 끝까지 밀어붙여야 한다”고 했더니 “보여주기만 해도 겁을 먹을 텐데 그렇게 해도 될까요?” 그러기에 “보여주면서 얘가 자발적으로 무릎 꿇게 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게 한번 촬영을 하고 정우성이 꿇은 걸 모니터로 보고 나더니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겠어요”라며 “다시 하자”고 하더라. 아예 밀어붙여서 유리창을 깨겠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미처 준비를 못한 상태에서 NG가 나면 수습이 안 되니까 그건 안 된다고 말렸지. 그러고도 미련이 남았는지 나중에 곽도원이 “아끼지 말고 유리 하나 더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더라. (웃음)

오승욱_ 스마트폰을 턱에다 툭툭 치는 그 장면이 무지막지하다보니 ‘저거 잘못돼서 턱에 눌려서 전송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도경 입장에서는 조마조마하겠더라고. 거기서부터 한도경한테 감정이입을 한 것 같다. 역시 나는 지질이 편인 것 같다. (웃음)

김성수_ 남자들이라는 게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무기가 있으면 그걸 끝까지 쓰고 싶어 한다. 나중에 문선모가 수사차량 밖에서 도청기로 으름장 놓는 장면을 찍을 때, 주지훈에게 도청기 소품 주면서 이거 잘 사용하라고 했더니 도청기랑 자동차 뒤편에서 나는 붉은빛까지 자기가 가서 받으면서 아수라 백작 같은 분위기를 내더라고. 아주 똑똑한 친구다.

오승욱_ 주지훈이 대사를 안 들리게 우물거리는 것도 재밌더라. 박성배한테 신임을 얻은 문선모가 한도경과 옥상에서 말하는 장면에서 “부러우면 진 거다”라는 대사를 굉장히 웅얼대면서 읊는다.

김성수_ 어차피 다 들어봤자 거짓말들이라 들을 필요도 없다. 있으나 마나 한 대사들이다. 그리고 문선모는 이제 형한테 말을 똑바로 할 필요가 없는 거지. 사실 이번에 주지훈이라는 배우가 연기를 너무 잘해서 깜짝 놀랐다. 다른 배우들도 마찬가지다. 황정민과 곽도원은 자기들 대사를 의성어나 의태어로 고쳐오더라. 나는 “대사도 아닌데 이걸 꼭 해야 돼?”라고 했는데 연기한 걸 보면 ‘저게 진짜 대사’구나 싶더라니까. 나 같은 옛날 사람은 여전히 ‘대사=정보 전달’이라는 강박관념이 있는데, 이번에 연기 도사들 만나서 진짜 많이 배웠다. 곽도원이 한도경을 처음 만난 날 수사차량 의자에 앉을 때도 “야, 저리 가”라는 대사가 있었는데 연기할 때 보니까 곽도원이 그냥 와서 정우성을 탁탁탁탁 치기만 하더라. 그래놓고 모니터할 땐 “어? 두번만 쳐야 하는데 왜 네번 쳤지?”라는 거다. 자기 영토이기 때문에 자기가 액션을 두번 넘게 하면 쫄린 걸 티내는 거라면서. 그러면서 다시 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더라고. 딱 2번으로 족하다고.

오승욱_ 그럼 사직서로 한도경 여러 번 계속 치는 건 이미 쫄린 거네? (웃음)

김성수_ 그런 거다. 안 먹힌다 싶으니까 강압적으로 여러 번 계속 치는 거다.

오승욱_ 폭력을 쓰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상대방의 인격을 파괴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할 수 있는 한 모든 수단을 사용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남자 형사들이 말을 잘 안 하잖나. 자기가 간파당하면 수렁에 빠질까봐 그걸 보이지 않기 위해서다. <무뢰한>에서 인물이 말이 없고 무뚝뚝하고 이런 게 남성성의 표현이 아니라 방어기제란 생각이었다.

김성수_ 그런데 실제 현실 싸움에서 폭력을 쓴다는 건 대등한 게 아니다. 강자가 약자에게 그냥 퍼붓는 거지. 영화에선 액션으로 멋지게 담아내지만 현실엔 그런 게 없다. 사실 모두 다 주접을 떠는 거지.

오승욱_ 결국 <아수라>는 남성주접열전이라니까. 지질열전이거나. (웃음) 인물의 내면들이 텅 비어 있으니까 계속 허세만 부린다. 오죽하면 눈싸움으로 그러겠나. 지적인 말로 할 수 없으니까 대사도 다 으르렁댄다. 그런 면들이 오히려 새로웠다. 그런데 어쨌거나 이 영화의 최고 악인은 박성배다. 박성배가 최악의 악당일 수밖에 없는 게 부끄러움도 없이 엉덩이를 내보이는 장면에서 드러난다. 시도 때도 없이 돌발행동을 하면서, 내가 설령 오줌을 갈겨도 너희는 아무 말 못할 거란 식의 안하무인의 태도가 있다.

김성수_ 그건 황정민의 아이디어였다. 내 설명을 한참 듣더니 “그럼 빤스를 벗어야겠네요” 그러기에 깜짝 놀랐다. 그러더니 정말 벗고 하더라고. 그리고 팔을 자르려고 하는 장면을 찍을 때 그거 진짜 칼을 쓴 거다. 근접숏을 찍을 때 가짜로 보일까봐 진짜 칼을 썼다. 연기하다가 흥분해서 진짜 손 베면 어떡하냐고 나를 포함해 모든 스탭들이 말렸다. 그래서 내가 “박성배는 하는 척만 하는 것”이라고 재차 강조를 하니까 정민씨가 “아이고, 감독님 미쳤어요? 박성배가 설마 그러겠어요?”라며 웃더라. 황정민은 자기가 어떻게 연기를 해야 하는지 다 알고 있다. 그런데 연기를 너무 잘하니까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진짜 영화 속 그놈이 된 거 같으니까. (웃음) 박성배가 바로 그 ‘정말 자를 것 같은 기세’, 그걸로 사람을 제압하는 거잖나. 우리가 견딜 수 있는 지점보다 더 가기 때문에 그런 새끼랑 싸우면 우린 무조건 지게 되어 있다. (웃음) 산전수전 다 겪은 그런 인간은 김차인처럼 책상에 앉아 시험을 봐서 권력을 쟁취한 놈들과 다르다.

오승욱_ 그처럼 인물들의 힘의 관계를 묘사하는 게 굉장히 충실하다. 가령 한도경이 박성배 앞에서 잠시 신임을 얻고 문선모 앞에서 으스대는데 바로 뒷장면이 김차인이 오 부장검사 셔츠의 둘째 단추를 보고 있는 장면이다. (웃음)

김성수_ 권력자에게 자기가 작은 걸 어필한 걸로 뭔가 해냈다고 착각하는 모습이 정말 바보 같지. 정작 박성배는 한도경한테 아무런 관심이 없는데. 버림받은 걸 버림받았다고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게 나쁜 놈들이 아주 잘하는 거다.

“액션하면서 정우성 손가락도 여러 번 부러졌다”

오승욱_ 라스트 장례식장 시퀀스만 40분이 조금 넘더라. 예전에 내가 시나리오작가로 허진호 감독과 우노필름에서 <8월의 크리스마스>(1998)를 준비하고 있던 때, 김성수 감독님은 <비트>(1997)를 촬영 중이었다. 당시 회사 내에서 ‘김성수 감독님이 <비트>를 하루에 100컷을 찍는다’는 게 화제였다. 그때 그처럼 장면 전환이 많고 편집 속도가 빠른 한국영화가 없었다. 또 같은 회사에서 이광모 감독님은 <아름다운 시절>(1998)을 찍었는데 하루에 두컷을 찍었다고들 했다. 그런데 <비트>는 하도 편집을 잘게 하니까 100컷을 찍어도 한신이 안 되고, <아름다운 시절>은 두컷을 찍어서 두신을 만들었다. (웃음)

김성수_ 같은 회사에서 그런 서로 다른 두 영화가 나왔다는 게 놀라운 시절이다. 게다가 <비트>와 <아름다운 시절>은 촬영팀(김형구 촬영감독)과 조명팀(이강산 조명감독) 등 스탭들이 같다. 그러니 더 놀랍지.

오승욱_ 그때와 비교하면 <아수라>는 숏의 길이가 길어진 것 같다. 한도경과 문선모가 마지막 액션을 하는 장면도 길게 찍었다. 엎치락뒤치락하다가 한도경이 벽에 쾅 부딪히고 나서야 컷이 넘어가니까.

김성수_ 액션하면서 정우성 손가락도 여러 번 부러졌다. 부러진 데 또 부러지고. 그래서 인물을 꽉 잡아 던지고 그럴 때 뼈가 덜 붙어서 악력이 안 들어갈 텐데도 악착같이 해냈다. 주지훈이 키가 커서 꽤 무겁거든.

오승욱_ 액션영화를 잘 찍는 어느 감독의 일화를 들은 적 있다. ‘두 사람이 싸운다’라는 지문 한줄만으로도 30분짜리 액션 장면을 만드는 거다. <아수라>의 그 유명한 카체이스 장면도 그렇다. 내가 본 시나리오에는 딱 두줄만 있었다. “차를 모는 도경” “도경 대사 씨발~~~!!!” 그 두줄로 5분이 넘는 대단한 카체이스 장면을 만들어냈다. 역시 ‘액션영화 감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성수_ 카체이스 신은 전적으로 이모개 촬영감독과 허명행 무술감독, 데몰리션 특수효과팀과 CG팀이 만든 거다. 거기에 정우성이 직접 몸으로 뛰어들어서 액션 연기를 한 거다. 다만 액션은 투자한 것에 비해 결과물이 너무 짧으니 아쉽다. 전체 75회차인데 그 카체이스 장면만 12회차였으니까.

오승욱_ 게다가 비오는 장면이다. 시나리오에도 비가 온다는 설정이 없었다.

김성수_ 맞다. 그런데 이모개가 호기롭게 비를 뿌리자고 해서….

오승욱_ 내가 참 좋아하는 촬영감독이기도 한데, 암튼 좀 미쳤다. (웃음)

김성수_ 나도 호승심에 “좋아!”라고 하고선, 참고를 해볼까 해서 빗속의 카체이스 신으로 유명한 드니 빌뇌브의 <프리즈너스>(2013)와 제임스 그레이의 <위 오운 더 나잇>(2007)을 봤다. 그런데 <위 오운 더 나잇>의 경우에는 와이드숏에서 차사고 나는 장면 외엔 다 CG더라. 그래도 만만찮은 일이라 “비 뿌리기 쉽지 않겠다” 했더니 이모개 촬영감독이 “걔네도 우리가 찍은 거 볼 텐데 비를 뿌릴 수 없는 신에 비를 뿌려야 하지 않겠냐”고 하더라고. (웃음) 정우성도 워낙 운전을 잘하고, 맞은편 차량을 몬 서울액션스쿨의 권귀덕도 한국에서는 카체이스를 제일 잘하는 친구인데도 불구하고 걱정이 되긴 했다. 그들 앞에 강우차가 있고, 카메라차가 있고, 또 그 앞엔 내가 탄 차가 있고, 옆에 보조 차량들이 있어서 어떨 때는 시야가 완전히 차단되는 아찔한 순간이 있었다. 아무튼 정말 다들 놀랍게 해냈다. 그리고 정말 수월하게 해냈다. 전혀 힘들지 않았다. 이렇게 애기해야 다른 감독들도 당하지. (일동 웃음)

오승욱_ 장례식 장면을 보면서는, 마카로니 웨스턴의 재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퀀스 시작할 때 발만 보이는 한도경, 절하는 장면, 저쪽에서 한도경 걸어오고, 문선모 걸어오고. 이건 완전히 마카로니 웨스턴에서 최후의 대결 시퀀스가 시작되는 방식이잖나. 또 박수쳤던 장면은 박성배, 김차인, 한도경 셋이 마치 <석양의 무법자>와 같은 삼각구도를 만들 때였다. 누가 누굴 쏠지 모르는 긴장감. 한도경이 어디 붙느냐에 따라 힘의 역학관계가 바뀌는 상황, 그게 참 재밌더라. 특히 총 쏘는 장면은 더하다. 미리 총알을 하나 딱 떨어트려서 나중을 준비하고.

김성수_ 맞다. 그런 순간은 정말. 그래서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카로니 웨스턴과 세르지오 레오네, 그리고 내가 좋아했던 여러 홍콩 누아르영화들. 영영 그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겠구나. (웃음)

오승욱_ 게다가 숙적은 이마 한가운데를 맞혀서 죽여야 한다. 진짜, 나도 벗어날 수가 없다. (웃음)

김성수_ (관자놀이를 가리키며) 그래서 살짝 비켜서 옆쪽을 쏠까도 생각했지만, 그러면 안 되지. (일동 웃음)

오승욱_ 감독님도 나도 왜 이렇게 ‘남자영화’만 만드냐는 소릴 듣는데, 궁극적으로는 한국 사회에 내재된 남성적 폭력이 우리의 무의식에 있기에 자꾸 그런 시나리오를 쓰는 게 아닐까. 현실에서 목격한 풍경, 그리고 영화에서 열광한 장면들이 마구 뒤엉켜서 어느 순간 그 경계 또한 혼란스럽다. <무뢰한>을 만들 때도 그랬지만, 어떤 식으로든 그걸 스스로 풀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게 이후 작업을 하는 데도 중요한 동력이 될 것 같다.

김성수_ 내가 액션영화를 좋아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사실상 군대든 국가든 경찰이든 다 무력과 강제력을 갖고 있는 합법적인 폭력 조직이다. 우리는 우릴 위해 힘을 사용해 달라고 박성배 같은 민선시장을 뽑아 권능을 줬지만 정치인들은 권력이 그들에게 주어진 천부인권인 양 행세하잖나. 갈수록 근사한 ‘액션’과 현실의 ‘폭력’의 차이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것 같다.

정우성이 50대가 되면 김성수 감독과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오승욱_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비트>는 “나에겐 꿈이 없었다”라는 민의 말로 시작한다. 그때 그 스물한살 청년이 한국 사회에서 이십년을 보내고 한도경이 된 것 같다. 싸움은 잘하지만 권력에 속하긴 싫고, 나름대로 인간의 마음을 갖고 있었으나 점차 황폐해져가다가 <아수라>에서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어요”라고 하며 끝나는, 굉장히 짠한 감성이 있다.

김성수_ 그렇게 봐도 무리는 없다. 그때 스무살이었던 친구가 지금 사십대 초반이 됐을 텐데 사회는… 더 나빠졌다. 어른들의 비열한 세계로 가고 싶지 않던 스무살짜리가 어른이 돼서 현실에 치여 비루한 삶을 살게 되고 권력에 꼬리를 흔들며 살고 있지만 얼마나 희망이 없고 거지 같은지…. 그런 모습을 비주얼로 보여주자고 정우성에게 얘길 했다. “난 이 영화에서 네가 (사나이픽처스의) 한재덕 대표처럼 보였으면 좋겠다”고. (일동 웃음) 난 정우성이 그렇게까지 할 줄 몰랐다.

오승욱_ 맞다. 그냥 난 정우성이 아닌 다른 사람을 본 것 같다. 그래서 정우성이라는 배우가 50대 때, 60대 때 김성수 감독님과 또 뭘 할 수 있을까 기대가 된다.

김성수_ 오랜 동료와 같이 늙어갈 수 있다는 건 특별한 일이다. 정우성이 시나리오도 안 보고 나와 일하겠다고 말해준 것이, 내가 이 이야기를 용감하게 쓸 수 있도록 해준 견인차였다. 정우성이란 이름이 너무 강력한 아우라를 갖고 있으니까 그걸 한번 지워보는 모험을 같이 하고 싶었는데 그가 너무 잘했다. 그리고 오승욱 감독과 나는 앞으로 계속 장렬하게 파멸의 길로. (일동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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