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영화 축제의 장 서울프라이드영화제가 16회를 맞아 CGV명동역 씨네라이브러리에서 개최된다(10월20일부터 10월26일까지). 그동안 서울LGBT영화제로 알려져왔으나, 성정체성과 성적 지향에 의문을 가지고 있는 사람(Questioner), 남녀한몸(Intersexual), 무성애자(Asexual)를 덧붙인 LGBTQIA로 확장되어가는 성소수자 정체성을 오롯이 담아내기 위해 지난해부터 서울프라이드영화제로 개명하고 그 시기도 5월에서 10월로 바꾸었다. 프라이드란 성소수자의 자긍심을 드러내는 단어로 2010년대부터 성소수자운동에서 상징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올해의 서울프라이드영화제는 “다양한 가족 형태와 이를 뒷받침할 사회 제도화”를 캐치프레이즈로 삼아 세계 26개국 65편의 영화를 선보인다.
개막작 <스테잉 버티컬>은 극우주의와 혐오로 가득한 동시대 유럽의 분위기를 모호한 우화적 배경으로 삼은 채 출생, 양육, 죽음이라는 주제를 파고든다. 그 자신이 동성애자면서 영화마다 동성애를 다루고 있는 알랭 기로디이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여기서 더 나아가 동시대 유럽의 현대성이 처한 문제에 관심을 두었다. 시나리오를 위해 늑대를 찾아나선 영화감독 레오는 길 위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아이를 얻으며 얻은 아이를 데리고 다시 길 위를 방랑한다. 논쟁적 퀴어영화를 만들어온 알랭 기로디의 가장 정치적이고 미스터리한 작품으로 올해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 화제작이었다. 현실과 환상의 분할선을 두지 않는 낯설고 예측 불가능한 흐름은 여전하다. 늑대와 대면할 때 굴복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영화 제목처럼) 꼿꼿이 서서 정면으로 응시해야 한다. 그렇게 기로디는 야만의 시대정신에 굴복하지 않는 정신의 처세술을 보여준다.
핫핑크 섹션은 올해의 이슈인 다양한 성소수자 가족 및 결혼 제도에 대한 대안적 상상력을 다룬다. 게비 델랄 감독의 <어바웃 레이>는 소년이 되고 싶은 레이와 그 가족의 이야기를 다뤘다. 성확정수술을 결정한 10대의 레이(엘르 패닝)는 싱글맘(나오미 와츠) 및 레즈비언인 외할머니(수잔 서랜던) 커플과 함께 산다. 영화는 10대의 성적 결정권, 레즈비언 커플과 싱글맘으로 구성된 가족, 비생물학적 연관으로 얽힌 관계성을 건강하고 유쾌한 터치로 그려낸다. 소준문 감독의 <연지>는 노인의 하루 여행길을 고요하고 서늘하게 따라가는 단편이다. 끝내 아련한 기억에 다다르게 되는 서정적 여정이 대사 한마디 없이 묵묵히 진행되지만, 우리 사회의 가족과 결혼의 의미를 되묻는 엔딩의 여운이 꽤 길게 남을 것이다.
스페셜 프라이드 섹션에서는 불온하고 매혹적인 퀴어 에로티시즘 걸작 및 동시대 화제작이 소개된다. 퀴어시네마의 기수 데릭 저먼의 시적 영화 <천사의 대화>, 사드의 원작을 각색하여 파시즘과 권력의 핵심을 외설적으로 파고든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의 <살로, 소돔의 120일>이 대표적이다. 라스 폰 트리에의 <님포매니악>도 무삭제 감독판으로 스크린에서 만날 수 있다. 인민군 출신 탈북 동성애자라는, 한국 사회에서 성적/정치적으로 다중의 금기를 넘나드는 작품 <어느 여름날 밤에>의 오프닝 장면은 압도적인 시각적 경험을 제공할 것이다. 호숫가 게이 데이팅 장소에서 벌어지는 반복적 일상을 기묘한 스릴러로 엮어낸 알랭 기로디의 <호수의 이방인>도 함께 소개된다.
코리아 프라이드 섹션에서는 한국 독립 퀴어영화를 발굴해 소개한다. 이들이 소그룹 아마추어리즘에서 벗어나 점차 세련화되고 있음은 총 29편에 이르는 작품 수 및 완성도 높은 장편 퀴어영화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두 유 테이크 디스 캣?>은 고양이 모모를 매개로 세 여성의 감정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연출, 각본, 주연을 담당한 남연우 감독의 <분장>과 남고생이 겪는 첫사랑의 열병을 감정의 진정성을 담아 전달한 원창성 감독의 <꿈>은 주목할 장편이다. <꿈>은 2016인디포럼 폐막작이자 올해의 돌파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두 이야기를 다룬 <꿈의 제인>은 트랜스젠더가 있는 가출팸에서의 색다른 경험을 다루며 가족의 의미를 탐문한다. 독립영화계 스타배우인 이민지와 감독 겸 배우 구교환이 출연해 더욱 주목을 끈다.
월드 프라이드 섹션에서는 동시대 퀴어영화들이 소개된다. LGBTAIQ로 점차 넓어지는 성소수자 정체성의 확장과 더불어 퀴어영화의 범주도 점차 넓어지고 있다. 출산, 양육, 노후, 죽음 등 오늘날 성소수자들의 경험은 삶의 보편적 영역으로 확장되어가고 있다. 베를린국제영화제 퀴어부문 수상작 <톰캣>은 고양이를 키우는 게이 커플을 통해 완곡하게 동성애 가족의 양육과 입양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중산층 게이와 빈민가 청년의 만남을 통해 계층 문제와 사회문제를 감수성 있게 파고든 2015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먼 곳으로부터>도 필견의 작품이다. 베네수엘라의 신예 로렌조 비가스의 이 작품은 제목처럼 이들이 겪는 비극적 경험을 지그시 거리를 두고 바라보며 그 해석을 관객에게 맡긴다. 댄스 배틀 및 게이 백댄서를 다루며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키키>, <마돈나의 댄서들>과 퀴어 액티비즘을 다룬 <씨드머니: 처크 홈즈 스토리>, <아웃 런>과 같은 유쾌한 다큐멘터리도 놓칠 수 없다.
아시아 프라이드 섹션에서는 아시아-태평양 프라이드영화제 연맹 회원국 프로그래머들의 추천작이 선별되었다. 전 카라 출신 강지영이 주연한 일본 퀴어영화 <짝사랑 스파이럴>은 성적 정체성이 남성인 소연이 일본의 셰어하우스에서 겪게 되는 뒤얽힌 애정관계를 다룬다. 인도네시아 작품 <호가호위>는 군사기지촌의 낙후된 마을에 사는 소수민족 소년들이 권력과 성의 혼탁한 결합을 발견해가는 영화로, 칸국제영화제 퀴어종려상 후보작이자 2015년 싱가포르국제영화제 최우수감독상을 수상한 단편이다.
다양하게 변화하는 생존방식과 관계성에 대한 경험
성정체성에 대한 관심을 넘어 삶의 보편적 경험으로 확장되는 이슈들을 담아낸 올해의 프라이드영화제는 질적으로나 대중적으로 그 바운더리를 한층 넓혀가고 있다. 정주하지 않고 길 위에서 아이를 키우는 싱글 파더를 제시한 <스테잉 버티컬>을 보라. 왜 육아를 가정이라는 고정되고 폐쇄된, 성차적인 공간에서 해야 하는가? 동성애 커플의 출산과 양육의 문제는 요즈음 가장 핫한 쟁점이다. <두 유 테이크 디스 캣?>이나 <톰캣>에서처럼 반려동물과의 공생 문제는 동성애 커플의 양육 문제와 맞물려 차후 퀴어영화의 중요한 소재가 될 것임을 예견케 한다. 비혼, 비결혼적 동거, 반려동물과의 공생, 대안적 거주방식 등 우리 시대에 다양하게 변화하는 생존방식과 관계성에 대한 경험은 LGBTAIQ 영화의 관심사가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당면한 문제임을 실감하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