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영화]
[내 인생의 영화] 김승일의 <그리즐리 맨> 미친 사람
2016-10-19
글 : 김승일 (시인)

나는 내가 미친 사람을 좋아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것은 미친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이름은 베르너 헤어초크다. 그의 영화에는 자신의 딸과 혼인해서 자신만의 왕국을 세우려는 일개 군인, 고무나무를 경작해서 돈을 벌기 위해 증기선을 산등성이로 끌어올리는 남자, 화산이 터진다고 모두가 대피한 섬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할아버지가 나온다. 그리고 내가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사랑하는 다큐멘터리영화 <그리즐리 맨>에서는 13년 동안 여름마다 알래스카의 국립공원에 체류하며 곰과 함께 생활한 남자가 나온다. 그 남자의 이름은 티모시 트레드웰이고, 그는 결국 곰에게 잡아먹힌다. 헤어초크는 트레드웰이 틈틈이 촬영한 100시간가량의 필름을 편집하고, 그의 주변 인물을 인터뷰해서 영화를 만든다.

헤어초크가 미친 사람을 좋아하는 이유는 어쩌면 이 세상에 미친 사람이 거의 남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의외의 순간, 예상할 수 없는 것들,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행위, 현 인류로서는 인지할 수 없는 현상들을 촬영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제 거의 대부분의 일들이 상상 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 예술이 메시지를 던지는 도구가 아니라 체험으로서 존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CG 기술로 우주를 더 그럴듯하게 묘사한다면, 전쟁을 더 생생하게 그려낸다면 그것은 새로운 시각 체험이 아닌가? 그러나 그런 묘사들은 사실상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의 극단을 보여줄 뿐, 우리의 인식을 벗어난 무언가를 선사하지는 못한다. 한껏 오만해진 우리의 문명은 우리가 이미 모든 것을 상상했다고 믿는다. 더는 충격적인 일이 없을 거라고 안심하고 있다. 전쟁이나 테러가 일어나기 전까지, 우리의 일상은 평범하고 소소하며 정상적이다.

헤어초크의 대표작이라고 일컬어지는 다른 영화들보다 <그리즐리 맨>에 마음이 더 끌리는 것은 티모시 트레드웰 때문이다. 헤어초크의 페르소나였던 클라우스 킨스키는 촬영장에서 항상 욕설을 퍼붓고 찡찡거리는 중2병 어린이기도 했다. 티모시 트레드웰 역시 자기가 곰을 보호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 망상병 환자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트레드웰은 영화감독에게 화를 내거나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욕설을 퍼붓지 않는다. 트레드웰은 감독이자 배우로서, 세상을 향해 화를 낸다. 왜 인간 세상을 싫어하는지. 어째서 곰과 함께 살고 싶은지에 대해서 설명하려고 한다. 어휘가 풍부하지 않고, 어딘가 행동이 이상해 보이기 때문에 그의 설명은 항상 감정적이고 논리가 부족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트레드웰이 촬영한 영상들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아도 그가 무엇을 사랑했는지를 보여준다. 그가 체험한 것들은 그 누가 일전에 체험한 것과도 다르다. 이제 내 얘기를 조금만 하고 싶다.

나는 대학 졸업 작품으로 희곡을 썼다. 제목은 <컴온 베베>였고 주인공 캐릭터는 영화감독 칼 윙거였다. 정글에서 영화를 찍고 있는데, 갑자기 정글을 제외한 온 세상이 멸망하는 얘기였다. 칼 윙거는 스탭들에게 영화를 계속 찍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린다. 칼 윙거는 헤어초크다. 내 시에는 다큐멘터리 감독이 종종 등장한다. 그 감독들이 헤어초크다. 나는 헤어초크에게 내 작품을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시를 쓰거나 희곡을 썼다. 곧 그가 실명으로 등장하는 소설도 쓸 것이다. 나도 처음엔 경험의 지평을 열어주는 미친 사람을 찾아다니는 일을 하려고 했다. 헤어초크처럼 되고 싶었다. 그러나 그건 아직 내 일이 아닌 것 같다. 나는 작은 일부터 시작하고 싶다. 헤어초크 감독이 절대로 보지 못하는 것,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을 그에게 보여주고 싶다. 그건 아마도 헤어초크 자신일 것이다. 사람은 자기 뒷모습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즐리 맨>을 가장 좋아하는 이유는 티모시 트레드웰이 화면 밖으로 잠시 퇴장했을 때, 흔들리는 초목을 바라보면서 헤어초크가 한 말 때문이다. “트레드웰은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그가 없는, 이 장면이 이상하게도 가장 아름다웠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웃긴 내레이션이다. 나도 그런 내레이션을 하고 싶다. 그에게.

김승일 시인. 2009년 <현대문학> 신인 추천으로 시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에듀케이션>이 있다. 베르너 헤어초크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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