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특히 정지영 감독의 이름이 영화제 사무국 명부에 자주 눈에 띈다. 이번엔 제3회 사람사는세상영화제의 집행위원장으로 그를 만났다. 지난여름, 제20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조직위원장으로서 정지영 감독과 인터뷰를 했을 때, 바로 곁에 있던 최용배 집행위원장은 정지영 감독을 두고 “지자체와 정부기관, 그리고 영화인들이 서로 소통을 하거나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때 양쪽 모두의 신뢰를 받는 사람”이라고 말한 바 있다. 현 한국영화계를 이끄는 어른을 향한 후배 영화인들의 인식이 그러한가 싶다. 제3회 사람사는세상영화제는 10월20일부터 23일까지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열린다. 개막작 <나, 다니엘 블레이크>(감독 켄 로치)와 폐막작 <공동정범>(감독 김일란, 이혁상)의 타이틀만 보아도 사람사는세상영화제가 지향하는 세상이 얼핏 짐작된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마무리한 뒤 숨 돌릴 틈도 없이 바로 서울로 와 사람사는세상영화제 사무국을 이끌고 있는 정지영 감독에게 사람사는세상영화제의 앞으로에 관해 물었다.
-올해만 해도 제3회 들꽃영화상 심사위원, 제20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조직위원장, 제3회 사람사는세상영화제 집행위원장을 차례로 맡고 있다.
=부천에 있던 조직위원장이 갑자기 사람사는세상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 나타나서 놀랐을 거다. (웃음) 사람사는세상영화제가 아직 모색기라는 판단이 들었다. 나는 행정적 능력은 전혀 없는 사람이지만(웃음) 영화계 선배로서 이제 막 자리를 잡아가는 영화제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한지 고민하는 시점에 뭔가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 최대한을 해보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한해만 집행위원장을 맡기로 했다.
-지난 2년간 서울극장에서 진행하다 올해부터 아트하우스 모모로 자리를 옮겼다.
=아직 자리가 안 잡혀서 이사를 다니고 있다. 영화제 사무국이 곧 서울 사무실을 신축한다고 하더라. 다목적 영화관도 하나 만들 예정이다. 소규모 영화제가 관이 많을 필요는 없으니까 다용도로 활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아트하우스 모모 최낙용 부사장이 지난해 영화제에 도움을 준 인연이 있어서 대관 계약도 수월하게 됐다.
-제1회 ‘다섯개의 민주주의’, 제2회 ‘70년의 고독’에 이어 제3회 영화제의 주제는 ‘시민의 힘’이다. 슬로건이 훨씬 명료해졌다.
=영화제도 세 차례쯤 했으면 자리를 잡아야 한다. 나는 사람사는세상영화제라는 이름 자체도 계속 유지해야 하는지 회의적이다. 얼마나 이 사회가 살 만하지 않으면 영화제에 이런 이름이 붙었을까 생각했다. (웃음) 영화제에서라면 희망을 볼 수 있어야 하지 않겠나. 이름 자체는 특별하지만 이 이름이 대중에 어필하는 데 과연 효과적인지 생각할 필요는 있다. 다만 확장을 위해 정치적으로 중립화되는 건 영화제의 특별함을 퇴색시킨다고 본다. 사람사는세상영화제는, 영화제 자체가 진보적 인식을 가지고 영화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바가 무엇인지 냉정하게 숙고해야 한다. 우리가 포커스 한국단편에서 시상하는 것도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려는 사람에게 틀리지 않았다는 응원, 용기와 힘을 주려고 그런 거다. 영화감독이 자기 색을 가지고 판에 뛰어들더라도 여러 부침을 겪다 보면 고유의 색이 희석되기 마련이다. 우리 영화제 시상은 앞으로도 제대로 ‘소셜한’ 영화를 꾸준히 만들어달라는 주문인 셈이다.
-‘시네마썰전’의 게스트로 진선미, 김병관 국회의원, 김광진 전 국회의원, 노종면 전 YTN 노조위원장, 정영하 전 MBC 노조위원장, 조승호 YTN 해직기자가 참석한다. 어떤 과정을 거쳐 섭외했나.
=사실상 게스트 섭외는 사무국 직원들이 다 했다. 내가 너무 늦게 합류해서 사무국 직원들이 다 마무리해놓은 일들에 대해 보고만 받고 있다. (웃음) 다만 프로그램들을 짜놓고 게스트 섭외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때 나에게 말이 들어오면 내가 슬쩍 전화를 걸어주기는 한다. 본선 심사위원을 맡아준 김의성의 경우는 배우여서 사무국 직원들이 직접 통화하기 힘들어 했는데 내가 전화를 걸어서 심사를 청하기도 했다.
-관객이 주목해줬으면 하는 프로그램을 추천한다면.
=사람사는세상영화제에서 특색 있게 밀고 있는 시네마썰전이 있다. 극장에서 만나기 힘든 사회 인사들을 초청해서 함께 대화를 나누는 기획전이다. 시네마썰전 안에 두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는데, ‘청춘 네 멋대로 방황해라!’에선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5월 이후>(2012)를 상영한 뒤 청년층의 지지를 얻은 바 있는 정치인들을 초청해 청년세대의 여러 담론을 풀어보는 자리를 가지려 한다. 두 번째 프로그램 ‘야만의 얼굴’은 김진혁 감독의 <7년-그들이 없는 언론>을 해직기자들과 함께 보고 속풀이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다. 내가 정말 보고 싶은 영화도 한편 꼽자면 김일란, 이혁상 감독의 <공동정범>이다. 특히 전작 <두 개의 문>(2012)을 봤다면 그 이후의 이야기도 꼭 봐야 하지 않겠나.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이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져 왔는지, 어떤 부침을 겪고 있는지 함께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집행위원장으로서 사람사는세상영화제가 지속적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은 어느 곳이라고 생각하는가.
=영화제를 특화할 필요가 있다. 규모가 크든 작든 이 영화제만의 전문성을 갖춰야만 내실이 생긴다. 인권을 주제로 한 여러 소규모 영화제들을 생각하면 영화제 자체는 굉장히 의미 있고 소중하지만 그리 힘이 있지 않다는 것도 금방 알 수 있다. 사람사는세상영화제는 그런 면에서도 살길을 모색해야 한다. 노무현 재단의 이름을 뛰어넘을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노무현 재단 이름하에 영화제가 진행되면 개성은 있지만 영역이 좁아질 수밖에 없다. 영화제는 무릇 돈과 사람이 잘 결합하면 잘 굴러간다. 사람이 아무리 좋아도 돈이 없으면 안 되고, 돈이 많아도 좋은 인력이 없으면 안 된다. 두 가지를 오래 지속할 방안을 생각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도 올해 영화제를 마칠 때까지 영화제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려 한다.
-개인적인 연출 작업은 어떻게 되어가나.
=영화감독들이 아무것도 안 하는 것처럼 보일 땐 끊임없이 신작 준비를 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웃음) 시나리오는 이미 다 나왔고 열심히 투자자들도 만나고 있지만 잘 안 된다. 말 그대로 준비만 열심히 하고 있다. 가만 보니 정지영이란 이름이 투자자들에게 금기시된 이름이 아닌가 싶다.(웃음) 연출 안 하고 있는 동안 공교롭게 여기저기서 불러줘서 연출은 안하고 영화제 일만 하는 것처럼 보일까 걱정이다. 각오는 하고 있어서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거니 생각한다. 일단은 사람사는세상영화제의 집행위원장으로서 책임져야 할 일들을 성실히 하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