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우(심희섭)는 시골 병원에서 방사선사로 일한다. 의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다. 누구에게도 쉽게 곁을 내주지 않을 것 같다. 그는 어린 시절 동생의 사고사를 목격한 뒤 정신적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런 그에게 선뜻 말을 건네는 이가 있다. 병원에 새로 온 간호사 원희(고원희)다. 밝고 씩씩해 보이지만 사실 원희는 매일 죽음과 사투를 벌인다. 암 선고를 받은 그녀에게 허락된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연우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원희가 낯선데도 자꾸만 그녀에게 마음이 간다. 영화에는 짙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연우와 원희 두 사람이 처한 상황만 그런 게 아니다. 연우의 가족도 몸과 마음이 아프다. 연우와 원희가 일하는 시골 병원은 살아온 날보다 죽을 날을 가까이 둔 노인들이 자주 찾으며 고요한 마을에는 죽지 못해 사는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있다. 연우 역시 몇 차례 자살 시도를 했을 것이다. 죽음의 정조는 그렇게 영화 전체를 감싸며 퍼져나간다.
김진도 감독은 데뷔작 <흔들리는 물결>을 통해 죽음 앞에 선 나약한 인간과 그 나약한 인간들이 서로를 보듬으며 위로를 건네려는 애처로운 시도를 해 보인다. 자극적이고 화려한 볼거리로 가득한 영화들이 주를 이루는 영화산업 안에서 <흔들리는 물결>의 정적인 정서는 흔치 않은 그림이라 도리어 눈이 간다. 카메라는 내면의 고통을 쉽사리 드러내지 않는 인물들에게 밀착해 들어가 억지로 그 감정이 뭐냐고 묻지 않는다. 그보다는 시종 멀찍이 떨어져서 관조한다. 그런 태도가 영화에 애상감을 더한다. 마음을 표현하는 인물들의 방식도 정적이다. 그 조심스러운 전개가 고통 속에 놓인 인간을 바라보는 감독의 태도로 보인다. 그것이 장점이라면 반대로 그 단조로운 전개가 단점이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삶의 의미를 잃은 연우와 살고 싶다는 절박함을 드러내야 하는 원희 캐릭터가 감정을 세밀하게 묘사하지 못한 건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고통의 끝에 서 있는 인물을 표현하며 한편의 영화를 이끌어간다는 건 보통일이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