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토피아로부터]
[노덕의 디스토피아로부터] 통제 불능의 인생
2016-10-26
글 : 노덕 (영화감독)

밤늦게 카톡이 울렸다. 또래 여배우에게서 온 문자였다. 혼자 술마시고 있으며 외롭다는 내용은, 막막한 미래가 불안하다는 솔직한 고백으로 이어졌다. 선택받아야 일을 할 수 있는 직업적 숙명 때문에 상대적으로 내가 부러웠나보다. 감독은 스스로 할 수 있는 확실한 일이 있지 않느냐, 하는 말에 실은 나도 불안하다고, 아마 모두가 불안할 거라 대꾸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기자와 했던 인터뷰에서 데뷔를 준비하던 시절의 고생담 끝에 기자가 “감독도 되셨고 이젠 걱정 없겠네요”라고 했지. 걱정 없긴. 불과 이틀 전에 난 동료 감독 앞에서 아무것도 몰랐던 그 시절이 그립단 얘길 지껄였다. 그 기자는 인사치레로 건넨 얘기였겠지만 걱정 없는 인생이 어디 있을까.

얼마 전 누군가 내게 사주풀이를 문자로 보내왔는데, 주변 친구들은 다 알고 있는 내 염세 기질이 떡하니 적혀 있어 신기했더랬다. 내 운명 안에서 나의 성격과 사상이 이미 정해져 있다니. 사주라는 게 우주의 빅뱅과 팽창을 블록버스터 속 폭파 장면에 대입시켜보면 도통 실감이 나질 않는다. 영화에선 한순간에 끝나버리는 폭발이 우주 밖에선 아직도 진행 중이고 그 안에 은하계와 지구의 역사가 있다는 생각까지 미치면 내 존재 따위는 아득해진다. 사실 저 멀리 밖에서 보면 바이러스와 내 존재에 무슨 차이가 있겠나. 그런데 이런 미물에도 주어진 운명이 있다라니. 차라리 그저 연속된 우연들에 의미를 부여했고 그걸 운명이라 부르기로 했다, 라는 편이 우주에서의 미미한 내 존재감에 더 그럴듯한 가정이다.

우연이든 운명이든, 이 상념은 언제나 ‘열심히 하면’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깨닫게 하는 작용을 해버린다. 의지와 노력만으로 인생은 꾸려지지 않는다. 질서도 없고 규칙도 없는 이 세계에서 그 모든 변수를 예상해 계획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중요한 순간에 등장하는 불운과 행운의 향방이 결국 인생을 가른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심지어 당사자가 그 사실을 인지하는지조차 별개로 말이다. 성공한 자들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이뤄냈다는 착각은 얼마나 그들을 오만하게 만드는지.

우디 앨런의 영화 <매치 포인트>(2005)를 보며 결말이 비극인지 희극인지 구분할 수 없었던 이유가 그것이다. 내 인생을 내가 조종할 수 없음에도 조종하고 있다는 커다란 착각. 애초 삶이 주어진 것부터 우리가 선택한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실은 인생에 대부분의 선택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원하는 미래를 가질 수 있으리라 믿고 발버둥친다. 그리고 오지 않은 미래를 불안해하고 걱정하며 막막해한다. 어쩌면 우리에게 주어진 권한은 인생은 통제 불능이란 사실에 순응할 것인지 여부뿐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현재의 불안을 신에게 맡기거나 염세로 외면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종교도 염세도 안전한 탈출구는 아니다. 애초 탈출구는 없으며 죽기 전까지 불안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우주 속 미물에게 주어진 유일한 운명일지도 모른다. 그래, 내가 그 여배우에게 할 수 있는 솔직한 위로는 그것뿐이었다. 너 혼자 불안하지 않다. 나도 불안하고, 다들 불안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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