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니까 청춘이다? 열정과 ‘노오력’을 강권하는 시대 속에서 ‘힘든데 왜 참고 견디기만 해야 하냐’고 묻는 이가 여기 있다. 모두가 바삐 뛰고 버스와 차를 타는데 걷는 이 소녀, 선천적 멀미증후군이지만 걷는 것 하나는 자신 있는 무사태평한 만복(심은경)의 이야기를 그려낸 <걷기왕>은 청년세대에게 뛰지 않고 걸어도 괜찮다는 위로를 건네는 영화다. 세대론을 직설적이면서도 경쾌하고 발랄하게 풀어낸 백승화 감독의 이력은 독특하다. 계원예술대학교에서 애니메이션을 전공하고 인디밴드 타바코 쥬스의 드러머로 활동하며 갤럭시 익스프레스의 이야기를 담아낸 다큐멘터리 <반드시 크게 들을 것>(2012)을 연출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활동한 그는 늘 “되는 대로 하고 싶은 걸 하는” 사람이다. 애니메이션도, 밴드도, 다큐멘터리도, 장편 극영화 데뷔작인 <걷기왕>도 “재미있겠다 싶어 하게 됐다”는 그에겐 “혼신의 힘을 다하는 것보단 즐거움이 우선”이란다. <걷기왕>과 닮은 백승화 감독을 만나 영화와 세대에 대한 환담을 나눴다.
-선천적 멀미증후군이 있는 소녀 만복이 경보의 세계에 뛰어든다는 이야기가 흥미롭다.
=쓸데없는 걸 잘하는 주인공이 경쟁의 세계로 들어가는 이야기를 먼저 생각했다. 그리고 거기에 맞는 소재를 찾았다. 볼링을 하게 된 백수, 오목을 잘 두는 아이 등 많은 후보들이 있었는데(웃음) 걷기를 잘하는 아이가 경보를 시작하는 이야기가 재밌겠더라. 걷기를 잘하려면 많이 걸어다녀야 할 것 같은데, 그러려면 차를 못 타는 설정을 만들자는 얘기가 나왔다. 리얼리티와 판타지 사이의 경계에 있는 이야기니까 이런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더라.
-기성세대가 청년세대에게 꿈과 열정, ‘노오력’을 강조하는 세태를 흥미롭게 풍자했다. 영화는 이렇게 죽을 것처럼 힘든데, 왜 극복을 해야만 하냐고 당돌하게 묻는다.
=성장영화를 하고 싶었기에 현재 청년들에겐 어떤 게 고민일까 생각해봤다. 내가 어릴 땐 ‘공부하라’는 게 큰 압박이었는데, 요즘엔 TV에 명사들이 나와서 ‘꿈과 열정을 갖고 도전하라’고 하는 이야기들이 강박처럼 느껴지더라. 기성세대는 요즘 청년들이 냉소적이라고 얘기하지만 젊은 세대들이 가질 수 있는 낙관이 없지 않나. 더이상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없고,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이야기는 무책임하게 들리는 시대다. 성장영화를 하되 장애물을 뛰어넘거나 뭔가를 이룩하는 이야긴 하고 싶진 않았다. 경쟁을 부추기고 성과를 내기만 종용하는 사회에서 고민할 시간을 주고 내버려두는 것도 필요하니까.
-무거울 수도 있는 세대론을 밝고 유쾌하게 풀었다.
=기본적으로 이야기를 함에 있어서 너무 무게 잡고 싶진 않다. 이 주제를 놓고 비극적으로 현실을 재현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런 방식을 선호하진 않는다. 작은 영화일수록 개성과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상당히 적은 예산으로 찍었다고.
=순제작비가 5억원 정도로 25회차로 찍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표준근로계약서를 썼다. 영화 속 메시지와 근로환경이 같이가야 하지 않겠나.
-성장 드라마는 대개 평범한 주인공이 모든 걸 극복하고 성공을 하는데, <걷기왕>은 보기 좋게 뒤통수를 친다.
=관객이 영화를 보면서 만복이를 응원하는 마음이 생길 것 같은데, 극복하고 성취해내지 못하면 배신감을 줄 수 있지 않겠냐고 주변에서 많이들 걱정했었다. 하지만 우리 영화가 <위플래쉬>처럼 채찍질하는 영화는 아니지 않나. (웃음) 어떤 분들은 주인공이 경쟁에서 이겨내길 원하고, 꼴찌로라도 완주해내길 원하시지만 이 영화는 그런 얘긴 아니다. 약점도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한 인물의 개성일 수 있지 않나.
-만복 외에도 노력형 인재 수지(박주희), 꿈과 열정을 가질 것을 격려하는 담임교사(김새벽) 등등 현 사회 속 다양한 인물 군상을 대변한다.
=수지는 만복과 정반대의 태도를 지닌 인물로, 부상마저 이겨낼 수 있다고 믿고 노력한다. 다른 영화에서라면 오히려 주인공을 맡게 되는 유형의 캐릭터다. (웃음) 하지만 수지 역시 이거 아니면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과 불안함에 경보에 매진하는 거다. 그녀는 만복과의 관계를 통해 마음을 놓게 되고 나름의 성장을 한다. 담임교사는 이 영화에서 유일한 악역이라고도 볼 수 있는 캐릭터지만, 그녀 역시 젊은 세대의 얼굴이다. 그 역시 꿈과 열정에 대한 압박이 내면화된 인물일 거다. 선의를 가지고 한 행동이지만 만복이를 통해 ‘혹시 내가 잘못 생각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될 수도 있다.
-배우 심은경은 이 작품을 하면서 터닝포인트가 된 것 같다더라. 연기에 대한 스트레스, 부담과 압박을 덜고 세상을 다시 보는 의미에서 말이다.
=은경씨가 만복 역을 하겠다고 했을 때 의외였다. 이미지 캐스팅으론 얘기가 많이 나왔지만 작은 영화지 않나. ‘어떻게 감히 심은경에게 시나리오를?’이란 생각을 했는데 하겠다니 너무 좋았다. (웃음) 알고 보니 다양성영화에 관심이 많고, 만복과 자신이 닮아서 선택했다더라. 그래서 나도 그가 어떤 사람인가 관찰했다. 엉뚱하고 약간은 느릿느릿한 구석도 있더라. 캐스팅 후 그 특유의 말투, 자세, 걸음걸이 등을 반영해 만복을 구체화했고, 현장에서도 연기를 자유롭게 열어줬다. 현장에서 은경씨의 어머니와 매니저가 “만복이야, 은경이야?” 할 정도로 비슷했다. (웃음) 그래선지 항상 첫 테이크가 좋았다. 인터뷰들을 보니 은경씨가 상황적으로도 편하게 할 수 있는 연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더라.
-애니메이션 전공이다. 첫 오프닝 시퀀스인 로토스코핑 영상도 매력적이고, 연출에서도 만화적 상상력이 톡톡 튀었다.
=전체적으로 이야기가 한편의 동화처럼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동화책 읽어주듯 내레이션도 들어가고. 리얼리티보다 판타지를 좋아하는 내 스타일이 자연스럽게 나온 것 같다. 애니메이션 전공을 할 땐 ‘애니메이션은 그려야 하는데 영화는 찍으면 되니까 영화를 하자’고 생각했는데, ‘영화를 하고 나니 애니메이션은 그리면 되는데 영화는 마음대로 못하니 힘드네’ 싶더라. (웃음)
-밴드 타바코 쥬스의 드러머고, 전작으로 갤럭시 익스프레스의 다큐멘터리 <반드시 크게 들을 것>을 연출했다. 이번 영화의 엔딩송 가사도 직접 썼다.
=드러머로 6~7년간 활동하며 영화와 밴드를 겸업했다. 밴드할 때도 가사를 많이 썼다. 영화 볼 때 크레딧이 올라가면 대부분 나가지 않나. 그런데 ‘핸드폰 잘 챙기시고 조심히 들어가시라’라는 가사가 나오니 관객이 놀라서 쳐다보고 다시 앉아서 보시는 분도 있었다. 잘 넣은 것 같다. (웃음)
-차기작 계획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이야기가 몇 가지 있다. 천천히 생각해보려 한다. <걷기왕>과 비슷한 톤 앤드 매너이지 않을까. 하지만 주변에서 자꾸 착한 영화라고 하니 이번엔 조금 덜 착한 영화를 해보려고 한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