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아픈 나라에서
2016-11-02
글 : 김혜리
<로스트 인 더스트>

<로스트 인 더스트>의 텍사스는 날씨와 사투리를 제공하는 배경 이상이다. 주요 등장인물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텍사스’라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는 표현이 차라리 어울린다. 토비(크리스 파인)와 태너(벤 포스터) 형제의 은행털이 여정에 굴곡을 만드는 것은 보안관과의 대결이 아니라 그들이 마주치는 텍사스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습성이다. 범죄 뉴스를 접한 늙은 주민들은 “은행을 털며 하루하루 살다니, 참 어리석군”이라며 라이프스타일을 품평하고 형제의 사연을 들은 변호사는 “텍사스 사내라면, 그렇게 갚아줘야지”라고 묵인한다. 동네 카우보이들은, 보안관보다 앞서 총을 빼들고 개척 시대와 다름없이 자경단 역할을 한다. 잠시라도 스크린에 들어왔다 나가는 모든 인물에 캐릭터가 주어지니, 재미없기가 힘들다.

09/24

<다가오는 것들>의 나탈리(이자벨 위페르)는 철학 교사다. 더이상 삶에서 다가올 것은 없다고 여길 무렵 25년을 함께 산 남편이 이별을 고하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다. 아내와 딸의 역할이 사라진 자리를 나탈리는 객관적 자유로 인식하지만 대신 무엇으로 채울지 찾기 쉽지 않다. 그리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미아 한센 러브 감독은 장년의 위기를 <베스트 메리 골드 호텔> <어바웃 슈미트> <버킷 리스트> 등과 같은 실버영화나 나이 든 인물이 낯선 문화를 배우는 좌충우돌 코미디로 풀지 않는다. <다가오는 것들>의 나탈리는 다행스럽게도 “자아를 찾아” 훌쩍 떠나지 않는다. 그 나이까지 차곡차곡 살아온 시간이 자아가 아니라면, 무엇이 자아란 말인가? 위기는, 그동안의 삶이 청산돼야 한다는 선고가 아니다. 미아 한센 러브 감독은 나탈리의 지난 인생을 부정하는 대신 다가오는 것들에 대응하는 방법을 그녀가 평생 공부하고 가르쳐온 철학에서 찾는다. 여자의 성공적 인생은 궁극적으로 사생활의 행불행에 달렸다는 편견을 가볍게 엎어치는 전개다. 어찌 보면 나탈리의 사생활에 닥친 변화는 마침내 이론을 실제에 적용해볼 기회이기도 하다. 여기서 <다가오는 것들>은 철학이 얼마나 실용적인 학문인지 깨닫게 한다. 불행을 불행으로 확정하는 것은 객관적 사태인가 주체의 대응인가? 인간의 정신은 삶을 움직이는 물리력으로서 어떤 가능성을 갖고 있는가? 영화는 파스칼과 루소를 구체적으로 인용하면서 나탈리의 머릿속에서 진행 중인 사유를 관객에게 내비친다. 수업 중 나탈리는 <신 엘로이즈>의 일부를 강독한다. “원칙적으로 우리는 행복 없이 지낼 수 있다. 행복이 도래하지 않으면 희망은 지속된다. 그 근심에서 나오는 일종의 쾌락은 현실을 보완하고 더 낫게 만들기도 한다. 좋은 세계를 향한 희망은 좋은 세계를 대신할 수 있다.” 영화를 본 다음 들춰본 <신 엘로이즈>에는 나탈리가 눈에 담았을 법한 다른 명제도 있다. “소진된 사랑이 영혼을 고갈시킨다면, 억제된 사랑은 영혼을 고양시킬 수 있다.” 내 눈에는 나탈리의 대처가 힘든 현실을 회피하는 ‘정신 승리’로 보이지 않는다. 예술, 철학, 종교의 궁극적 효용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나는 같은 지점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다. 예술도, 철학도, 종교도 세계를 직접 개선하지는 않는다. 다만 인간이 세계를 개선하려는 태도를 유지하도록 지지해준다. 이것은 엄연히 실질적이며 위대한 힘이다. <다가오는 것들>의 마지막 장면은 무척 아름답다. 전남편이 빠진 자녀와의 크리스마스 저녁 식사. 갓 태어난 손주를 위해 나탈리는 <플라톤의 비밀>이라는 책을 선물한다. 아기 울음소리에 방으로 간 나탈리는 “나는 연인을 잃었다네”로 시작하는 자장가를 부르며 손자를 어른다. 그녀를 두고 뒷걸음질로 카메라가 물러나면 아들딸 부부가 둘러앉은 테이블과 나탈리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 프레임에 들어온다. 카메라는 기척 없이 떠나려는 손님처럼 현관쪽으로 조용히 물러나오다 입구에 쌓여 있는 나탈리의 책더미가 화면 오른쪽에 살며시 모습을 내미는 자리에서 멈춘다. <다가오는 것들>은 철학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표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10/13

이번 가을도 부산에서 맞는다. 경험에서 도통 배우지 못하는 나는, 올해도 설마 하면서 서울에 두고 온 외투를 그리워하며 극장과 극장 사이에 부는 밤바람에 종종거린다.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정성일, 허문영 선배와 함께 한국 독립영화 11편이 경쟁하는 비전부문 심사를 맡았다. 본디 감독조합이 심사하는 섹션이라 조금 더 긴장했다. 아시아경쟁부문인 뉴 커런츠 상영작 가운데에서는 이동은 감독의 <환절기>를 볼 수 있었다. 며칠 동안 집중적으로 영화를 보며 느낀 바를 여기 적어두기로 한다.

먼저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감독이 청년빈곤과 LGBT를 제재로 선택했다. 특히 후자는 “퀴어영화제에 온 줄 알았다”는 농담이 통할 정도로 크고 작은 비중으로 여러 영화에서 다뤄졌다. 비전 경쟁작 11편 중 <분장>은 호모포비아가 중심 소재이고 <꿈의 제인>의 타이틀롤 캐릭터(구교환)는 트랜스젠더 여성이다. 이 밖에도 <컴, 투게더> <나의 연기 워크샵> <누에치던 방>에 소수자 성을 암시하는 장면이나 서브플롯이 등장한다. 아들의 성 정체성을 발견한 어머니(배종옥)의 성장담인 <환절기>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빈곤과 LGBT를 그리는 방식도 빈도만큼 성숙하다고 보긴 어렵다. 젊고 가난한 예술가 지망생이 인물로 많이 등장하는 현상은 자연스러울 따름이지만, 가난 혹은 부의 모양새나 그것이 인물에게 끼치는 영향은 상투적으로 묘사된 경우가 많았다. 맥락 없는 실직이 묻지마 분노로 이어지는 패턴도 보였다. 경제적 궁핍이 인물을 얼마나 힘들게 하고 분노하게 만드는지에 집중하다보니 사태를 인간의 조건으로서 관찰하기보다 한탄하는 데에 스크린 타임을 소모하는 식이었다. 성 소수자의 경우 여전히 비극적인 존재로 등장하는 예가 많았다. 다양한 퀴어 서사에 예술영화, 독립영화 관객이 노출돼 있는 현황에서, LGBT가 인정투쟁을 벌이는 불운한 존재로만 그려지는 이야기가 흥미롭기는 어려워 보인다. 소재 착취로 귀결될 위험도 크다. 성 소수자를 동등한 존재로 인정하는 주인공의 태도가 공허한 가식으로 드러나는 <분장>의 경우 원점에서 의제를 던졌다는 점은 의미 있으나, 이야기 과정에 노출된 끔찍한 혐오가 (인물이 아니라) 영화에 의해 성찰되지 않은 채 시스젠더 헤테로섹슈얼 남성의 고뇌를 웅변하며 영화가 마무리됐다는 점이 우려를 남겼다.

영화제에 선정된 새로운 독립영화들을 보면서 문득 우울해졌던 이유는, 병동을 연상할 만큼 망가진 인물이 많아서였다. 어둡고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그린 영화가 많아서 힘들었다는 뜻이 아니다. 삶에서 불행은 언제나 행보다 큰 지분을 차지하고, 더구나 영화는 현실에서 볕이 들지 않는 장소를 비추는 매체다. 불길해 보인 것은, 모순과 부조리의 부피 자체가 아니라 거기 대응하며 서사를 끌고 가는 영화 속 인물의 대다수가 유아적이고 파괴적으로 말하고 행동한다는 점이었다. 삶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이들은 왜 불행한지 생각하기보다 좌절을 타인에게 토해내고 폭력적으로 전가한다. 대학 신입생부터 조기 퇴직한 직장인까지 그들의 위안은 하나같이 폭음이다. 운 좋은 이들을 의심하고 본인이 겪는 모욕에 화를 내면서도 스스로도 인간의 품위를 이루는 것은 돈이라고 믿는다. 다른 삶의 가능성을 상상의 형식으로라도 이야기 안에 불러들인 <꿈의 제인>이 상대적으로 풍부해 보인 까닭이다. 아마 이 참담한 군상이 젊은 감독들이 보는 현재 한국인의 모습이리라 짐작하면서도, 사회문제의 희생물이 아닌 개인으로서 인물에 접근해 아름다움과 힘을 캐내려 하지 않는 수동성에는 맥이 풀렸다. 몇몇 작품에서는 배우가 영화적 마술을 발휘해주길 바라듯 카메라가 하염없이 기다리는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매직은 준비되는 무엇이다. 감독이 보거나 예지하지 못한 것을 관객이 보기는 어렵다. 카메라가 마냥 오래 바라본다고 배우의 연기가 풍부해지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은 인물의 무기력은 예측 가능한 일화가 연쇄되는 지리멸렬한 플롯으로 연결되기 쉽다. 영화가 극중 인물이나 감독의 테라피로 느껴진다면 경계해야 한다는 교훈을 다시 확인했다.

<벨빌의 세 쌍둥이>

좋 아 요

충견

마피아에게 납치된 손자를 구출하는 할머니의 모험담 <벨빌의 세 쌍둥이>에서 이상하고도 매혹적인 대목은, 이 헌신적 사랑을 받는 샹피옹이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의 무감동함은, 손자를 구하기 위해 대서양을 건너 굶주림과 모욕을 감수하는 수자 부인의 여정에 깊은 페이소스를 드리운다. 보답 없는 헌신으로 치면, 할머니와 동반하는 늙은 개 브루노도 빠지지 않는다. 무겁게 처진 몸으로 자동차의 스페어타이어 노릇까지 불사하는 이 노견도 강아지 시절 잠깐을 제외하고는 샹피옹의 사랑을 받은 적이 없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브루노는 몸을 던진다. 매일 시간 맞춰 지나가는 기차를 향해 짖어대는 일과를 꼬박꼬박 지켰듯이. 실벵 쇼메 감독은 의인화나 감상에 빠지지 않고 개의 마인드가 작동하는 방식을 그린다. 브루노는 주어진 과제 앞에서 갈등하는 법이 없고 반복에 질리지 않는다. 한번 입력된 목적은 영원하다. 어쩌면 샹피옹을 향한 수자 부인과 브뤼노의 일편단심은, 존재를 지탱하는 한 방식일 뿐 샹피옹과는 무관한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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