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김금희의 영화비평] <죽여주는 여자>의 마지막 장면에 대하여
2016-11-08
글 : 김금희 (소설가)

언젠가 엄마는 한 계절 동안 앞서거니 뒤서거니 세상을 떠난 동네 노인들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 유독 그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 건 죽음에 관한 것이고 장소가 병원이었기 때문이다. 수면내시경이 끝나고 가수면 상태에서 깬 엄마는 갑자기 그런 노인들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마지막에는 내게 그런 걸 소설로 써보라고 했다. 그 이야기에서 죽음의 과정이 어떠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러니까 병사(病死)였던가, 사고사였던가, 투병의 기간이 길었던가, 혹은 비참했던가- 그 이야기를 전하던 엄마의 태도에 대해서는 특별하게 기억한다. 엄마는 그들의 죽음이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었는가가 아니라 죽음 직전까지 그들이 어떤 일상을 보냈는가를 주로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의 이런 모습에 대해 기억할 수 있었다. 어느 노인의 산책은 도시의 경계선에 이르기까지 종일 이어지기도 했다는 것. 그 노인에게는 엄마가 여러 번 강조했듯이 번듯한 집이 있었지만 돈이 필요한 자식을 위해 처분하고 세들어 살았는데, 셋방에 누워 있으면 답답하고 무언가가 치밀어올라 살기 위해 공원과 도로와 그 화려한 건물들을 지나 발이 닿는 곳까지, 자신의 삶을 도시 곳곳에 새겨두려는 기록자처럼 오래 걸으면서 일상을 버텼다는 이야기를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 ‘버텼다’는 말을 붙인 것은 나이고 엄마는 그런 것 없이 그냥 ‘걸었다’라고만 이야기했다. 버텼다는 해석보다 노인이 땀을 뻘뻘 흘리며 뭉친 마음을 풀기 위해 걷는 장면을 회상의 말미에 두는 것, 그런 전달 방식에는 어떤 존중- 엄마는 노인들을 평소처럼 ‘할마시’나 ‘영감쟁이’ 같은 애정 있는 하대로 불렀는데도- 이 있다고 느꼈다. 그것은 전달의 대상이 되는 인생과 자신의 인생이 ‘무관하지 않다’라는 감각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오히려 죽음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언급을 줄인다. 죽음이 생의 피할 수 없는 결과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오히려 살아 있다는 감각에 충실하려는 것이다.

죽음을 이야기한다는 것

영화 <죽여주는 여자>(2016)는 노인을 대상으로 성매매를 하며 살아가는 이른바 ‘박카스 할머니’ 소영(윤여정)의 이야기다. 소영은 젊은 시절에는 미군을 상대로 성매매를 하다가 아이를 낳기도 했지만 입양을 보내고 늙어서는 종로 일대에서 성매매를 계속하며 혼자 살아간다. ‘죽여주는 여자’라는 제목은 성적 뉘앙스를 품은 것이기도 하고 말 그대로 누군가의 죽음에 있어 조력자가 되는 소영의 운명을 담은 것이기도 하다.

어려움에 빠진 어린 코피노 아이를 집으로 데려와 보살피는 소영의 모습이나, 트랜스젠더 티나와 한쪽 다리를 잃은 청년 도훈(윤계상)의 연애담을 통해 서로의 빈곳을 보듬으며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다루기는 하지만 영화가 주로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이 도시를 떠도는 소영의 행로다. 소영의 걸음이 탑골공원에서 종로의 거리로, 이태원에서 남산으로 옮겨가는 동안 ‘늙는다는 것’이 환기하는 수치스러움과 허무, 환멸과 비극성, 비애와 관련한 감정들이 우리를 파고든다. 오럴섹스를 하며 소영의 머리채를 잡아 자신의 성기쪽으로 찧는 여전한 폭력성을 보이는 늙음이 있는가 하면 대소변조차 스스로 처리하지 못한 채 남의 손에 맡겨야 하는 현실에 수치심을 느끼는 늙음이 있다. 가족을 모두 떠나보내고 더이상 살아야 할 이유를 잃어버린 고독한 늙음도 있고 치매가 불러온 망각의 상황으로 어떻게 보면 기이한 평정을 지키고 있는 듯 보이는 무기력한 늙음도 있다.

살아 있는 자들이 획득하는 특별한 기품

하지만 나는 그러한 인물들- 모두 남성이다- 이 보여주는 노년의 비극성보다는 그 너머에 있는 소영의 무언가와 조우하고 싶어서 그녀가 얼마나 단정하고 끼끗한 포즈로 서 있는가 생각했다. 그녀가 어깨에 멘 가방을 몸에 바짝 붙이고 공원에서 연애가 필요한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상대에게 접근해 “박카스 한병 딸까요?” 하고 물을 때조차도 나는 그녀에게서 어떤 기품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엄마를 잃어버린 아이가 굶고 있을 때 밥을 먹으라며 쩝쩝 하고 씹는 시늉을 해보이는 소영의 동작이나, 한밤에 문득 일어나 밥을 챙겨들고 나비야, 나비야 하고 길고양이를 부르는 소영의 꿈결을 걷는 듯한 무구한 얼굴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그러한 기품은 오랜 시간 자신의 삶을 감당해온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획득하는 것이고 ‘몸 파는 년’이나 ‘늙은 꽃뱀’처럼 타인이 내뱉는 멸시의 단어로도 절대 훼손되지 않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녀의 삶은 이러한 것들을 이기며 유지되어온 것이기에 더더욱. 가난과 비루함, 자기 스스로 아이를 완전한 상실의 세계로 보내야 했던 어머니로서의 고통과 깊은 고독을 이기면서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소영은 ‘박카스 할머니’로 살았던 어느 날보다도 표정 없고 열없는, 슬프도록 무기력한 얼굴로 변해간다. ‘성매매’를 ‘연애’와 ‘박카스’로 은유하며 살아온 삶이 어떤 은유로도 감당할 수 없는 단단하고 차가운 실체, 죽음이라는 것과 맞닥뜨리기 때문이다. 소영과 성매매하던 남성들이 자신의 노쇠한 육신, 감당할 수 없는 상실감을 호소하며 자신을 죽여달라거나, 자살하는 과정에 함께 참여해달라고 요구하면서 소영의 삶은 살아가는 존재가 본연으로 가지는 무구한 생기와 특별한 기품을 잃어버린 채 표류한다. 소영이 자살을 원하는 누군가의 옆에서 손을 벌벌 떨면서 농약병을 들고 서 있을 때, 바위에 선 누군가의 등을 차마 똑바로 보지 못한 채 밀어버릴 때, 일평생 가본 가장 화려한 호텔에서 ‘연애’도 ‘섹스’도 없이 다만 자살의 조력자로 침대에 누워야 할 때 나는 나무들이 싱싱하게 뻗어올라가는 공원의 어느 곳에 서 있던 소영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살아 있고 살고 싶었던 그녀의 여름날을 말이다.

결말에 이르면 영화는 겨울이라는 계절에 도착해 있다. 모든 것이 얼어붙는 이 계절은 도처에 상실과 죽음이 자리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소영이 경찰차로 이송될 때 희끗희끗 눈이 내리고, 맞은편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에 그녀의 얼굴이 여러 번 빛난다. 환하고 따뜻하게 조명된다. 거기서 영화가 끝이 났다면, 기어코 담배 한대를 얻어 피우는 소영의 포즈에서 이야기가 멈췄다면 더 낫지 않았을까. 하지만 영화는 반드시 보여줘야 하는 어떤 결과가 죽음이라는 것에 있는 것처럼 비정하고 독하게 마지막 장면을 구성해놓는다. 사각의 유골함에 담긴 ‘무연고’라는 단어가 본명이 양미숙이었던, ‘할머니’라 부르는 걸 기분 나빠하고 싸구려 모텔방에 들어가서도 아로마향초에 불을 붙여 은은한 향을 피우던 그녀의 일생을 일시에 지운다.

그것은 우리가 필연적으로 맞닥뜨리게 될 늙는다는 것과 죽음에 대해 어떤 진실을 전달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맞게 될 궁극의 겨울이 이렇다면 우리는 과연 삶에 대해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골똘해지다보면 어쩌면 그러한 불가해함에서 도리어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소영이 뉴스의 기삿거리로 등장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저 사람도 무슨 사연이 있겠지. 모르는 사람들이 거죽만 보고 대충 지껄이는 거지” 하고 말했듯 그 알 수 없음의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야말로 삶을 살아가거나 이야기하거나 더 나아가 존중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삶이라는 것이 필연적으로 껴안고 있는 죽음을 대하는 것에서도 그것은 동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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