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금요일 아침, ‘음란마귀’의 영화 낭독 시간이 찾아온다. 개그맨 장도연이 진행을 맡은 채널CGV 영화 소개 프로그램 <아가씨-네>다. 영화 <아가씨>의 히데코(김민희)처럼, 장도연은 초록빛깔 기모노에 잔뜩 부풀린 머리를 하고 매주 영화 한편씩을 소개한다. 평소 장도연이 즐겨온(?) ‘19금 개그’를 십분 활용하고 있기에 적어도 영화를 궁금하게 만드는 데는 적중한 것 같다. 2007년 데뷔한 장도연은 <개그콘서트> <코미디 빅리그> 등의 공개 무대와 <롤러코스터2>(2012), <썰전>(2013) 등의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단련한 거침없는 입담과 몸개그로 최근 방송가를 종횡무진하는 중이다. 이날도 장도연은 바삐 라디오를 마치고 인터뷰를 하러 왔다. 여러 방송국이 모여 있는 상암동에서 그를 만나 <아가씨-네> 진행 소감과 희극인으로서의 지난 10년의 삶에 대해 물었다.
-현재까지 2회 방영했다. 주변 반응은 어떻나.
=프로그램을 보고 말하는 사람은 얼마 없고 CJ 건물에 대문짝만하게 걸어둔 홍보 현수막을 보고선 대체 그렇게 입고 뭘 하느냐는 호기심 어린 시선이 대부분이다. 나조차도 지금 영화 프로그램 진행자로 <씨네21>과 인터뷰하고 있는 내가 신기하다.
-진행해보니 어떤가.
=첫 녹화 땐 어떻게 될지 몰라 시간을 길게 잡았는데 영화에 대해 꼭 전해야 하는 정보만 포함하면 편하게 막 뱉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 예상보다 녹화를 빨리 마쳤다. 두 번째 녹화 땐 자신감이 붙어서 스탭들더러 ‘다들 저녁 약속 편히 잡으시라’고 허세도 부려봤다. (웃음)
-‘음란마귀의 시선으로 영화를 해설한다’는 컨셉 자체가 독특하다.
=아직은 제작진이 선정해주는 영화를, 제작진이 써준 대본으로 설명하고 있다. 첫회 대본에 ‘조루’라는 표현이 나와서 꽤 당황했다. (웃음) 실제로 내가 좋아하는 영화들을 지인들에게 추천하면 다들 보다 우울증 걸릴 것 같다고들 하는데 그런 영화도 <아가씨-네>를 통해 재밌게 설명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 가볍고 대중적인 프로그램으로 시작했지만 언젠가 내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때 양장 차려입고 진행하는 진지한 프로그램도 맡아보고 싶다.
-평소 영화를 많이 보나보다. 영화 취향은 어떤가.
=직장 없는 사람처럼 엄청 본다. (웃음) 녹화하다가 3시간쯤 비면 후다닥 극장 가서 영화 보고 오던 때도 있었다. 최근 가장 재밌게 본 영화는 윤여정 선생님 나오시는 <죽여주는 여자>다. 노인문제 등 그동안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보게 됐다. 집에 영화티켓 모아놓은 것도 많다. 처음엔 내용이나 정보를 잊지 않으려고 영화 일기를 썼는데 노트를 네장 이상 넘겨본적이 없어서 그냥 티켓만 모으기 시작했다. 이수역 9층 아트나인도 자주 간다.
-<아가씨-네> 진행은 상당한 연기력을 요한다. 최근 드라마 <혼술남녀> <우리집에 사는 남자>에 카메오 출연하기도 했는데.
=지난 10년간 공개무대에서 코미디 연기를 하다보니 연기 자체에도 관심이 생긴다. 요샌 눈치가 좀 생겨서 알겠는데, 오래전 드라마 카메오를 처음 할 때는 무대 연기와 드라마 연기의 차이를 몰라서 쩌렁쩌렁 고함치듯 연기했던 기억이 난다. 어제 내 연기가 둥둥 떠다닐까봐 고민하면서 <우리집에 사는 남자> 방송을 봤다. 내 등짝이 이만하고 내 앞에 조보아씨가 나뭇가지처럼 가녀린 모습으로 서 있더라…. 연기가 문제가 아니구나! (웃음)
-콩트 개그를 많이 하는 편인데 영화를 볼 때도 배우들 연기를 유심히 관찰하나.
=저 역할을 내가 연기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많이 한다. ‘현실 연기’를 잘하는 배우들을 보면 따라다니며 배우고 싶다. 희극인들도 각자 연기하는 스타일이 다른데 그중에서도 나는 현실적인 연기를 추구하려 하는 편이다. 누가 들으면 연기 외길만 걸어온 사람 같지? (웃음)
-2007년 KBS 22기 공채로 데뷔한 지 벌써 10년이 지났다.
=전혀 10년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해온 것보다 앞으로 할 게 더 많을 것 같다. 데뷔하고 4, 5년 동안은 언제든 그만둘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요샌 천직이구나 싶다.
-말 그대로 요즘 물 만난 고기 같다. 여성 희극인들이 대세인데.
=물꼬를 터준 사람이 안영미 선배다. 여성 희극인이라 2030 여성들에게 보다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 같은데 배우나 아나운서에겐 금기시된, 이를테면 ‘19금’ 발언 같은 게 어느 정도 용인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영미 선배가 판을 잘 깔아주셔서 나나 (박)나래 선배, (이)국주씨도 그 위에서 조심스럽게 즐길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늘 외줄 타는 심정이다. 최대한 신중하고자 하지만 희극인인 이상 어떻게 하면 더 자극적으로, 더 재밌게 말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나름 정숙하게 살아왔는데 사람들의 기억엔 19금 개그가 강하게 남더라. 빈 수레가 요란하다고 하잖나? 사실 난 까진 지도 얼마 안 됐다. (웃음) 이 자리를 빌려 문화인으로서 이미지 세탁을 좀 해야 할 것 같다. (웃음)
-잘생기고 예쁘지 않은 외모가 희극인들의 전형적인 자격 요건인 것처럼 여겨진 분위기가 있다. 여성 희극인들에게 그 잣대가 더 심하지만 장도연씨의 경우 예쁘다, 늘씬하다는 말을 많이 듣는편이다. 하지만 <코미디 빅리그>의 ‘여자사람친구’ 코너에서처럼 최대한 외관을 망가뜨려서 웃기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내가 할 수 있는 걸로 뽑아먹을 만큼 뽑아먹으려는 것뿐이다. (웃음) 개그할 땐 웃기는 게 장땡이다. 망가지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다. 망가졌는데 관객이 안 웃으면 정말 초라해지는 기분이 든다. 우리끼리 하는 말로 ‘다리동동 나왔다’고 할 때가 있다. 관객이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박장대소하도록 만든 때를 말한다. 그 순간의 에너지로 몇년을 버틴다.
-<개그콘서트> ‘패션넘버5’ 코너가 유행할 때 허안나, 박나래와 함께 온스타일 <프로젝트 런웨이코리아4> 스페셜 방송에 출연해 기세등등하게 “온스타일 것들아, 나는 KBS가 인정한 개그우먼이다!”라고 외치던 동영상 클립이 아직도 인터넷을 떠돌고 있잖나.
=그때의 좋은 기억으로 또 몇년 버텼다. (웃음) 요샌 다들 패션에 관심이 많아서 아방가르드한 옷을 입으면 패셔니스타라고 해주지만 그때만 해도 그냥 놀림감이었다. 셋 다 온스타일 애청자여서 우리끼리 흉내내고 놀던 건데 관객까지 웃길 수 있을지는 잘 몰랐다. 놀리는 걸로 보일 수 있는데도 그때 유명한 디자이너 분들이 재밌게 봐주셔서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4>에도 출연할 수 있었다. 그분들과 어떻게든 연락의 끈을 놓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웃음)
-그 덕에 패셔니스타의 이미지도 얻었다. 전공도 시각디자인이었잖나.
=지금은 희극인 안 했으면 어쨌을까 싶다. 내가 또라이인 걸 개그맨이 되고 나서 알았다. 예전엔 버스 하차벨 누르고 내리기 위해 일어설 때 사람들이 키 너무 크다고 손가락질 할까봐 의기소침해할 정도로 소심했다. 내가 웃긴 사람인 건 나 혼자만 알고 있었는데 대학생 때 당시 신동엽 선배님이 진행하던 엔터테이너 오디션 프로그램 <신동엽의 톡킹 18금>에서 1등을 하게 되면서 그게 나만의 생각이 아니었다는 인정을 받은 것 같았다.
-희극인들이야말로 노력한 만큼 티가 나는 일을 하는 것 같다.
=맞다. 갈수록 연기는 익숙해지는데 아이디어를 내고 구성을 짜는 게 너무 어려워진다. 소진되는 기분이다. 그럴 땐 남한테 기댄다. (웃음)
-가장 애틋하게 생각하는 코너가 뭔가.
=역시 ‘패션넘버5’가 가장 애착이 간다. 하지만 안타깝기로 따지면, <코미디 빅리그>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금방 사라진 코너가 있다. 분장 개그를 하던 코너였는데, ‘겟잇빈티’라고…. (웃음) 그땐 열심히 분장하고 무대 올라도 사람들 반응이 그저 그랬는데 요즘 나래 선배가 분장 개그의 한획을 긋고 있는 걸 보면 개그에도 타이밍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장도연, 박나래 콤비를 미국의 티나 페이와 에이미 폴러에 비교하는 시선도 있잖나.
=하하하하! 영광이다. 사실 나래 선배와 tvN 개국 10주년을 기념하는 <tvN 10 어워즈> 진행을 맡았을 때도 티나 페이, 에이미 폴러의 골든글로브 시상식 진행을 참고했다. 하지만 어찌나 악플이…. (웃음) 하긴 티나 페이도 악플을 받긴 할 거다. 영어로 써 있으니까 내가 모를 뿐. (웃음)
-희극인으로서의 원칙과 계획이 궁금하다.
=까면 나를 까야지 남을 까는 개그는 하지 말자. 남 얘기로 웃기지 말자, 누군가에게 상처주는 개그는 하지 말자고 늘 다짐한다. 웃기려는 욕심이 과해질까봐 어렵다. 계획은 따로 안 세우고 산다. 기대하면 실망도 크게 느끼는 성격이라 계획해놓은 게 그대로 되지 않으면 제대로 못 산 것 같은 생각이 든다. 0인 채로 사니까 늘 플러스인 인생을 사는 기분이 든다.
-음란마귀의 영화 해설 <아가씨-네>
=<아가씨-네>는 매주 금요일 오전 11시에 채널CGV 페이스북과 네이버 TV캐스트를 통해 공개된다.지난 10월21일 첫 방송했고, 지금까지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2013)와 <브리짓 존스의 일기>(2001), 두편의 영화를 소개했다. 음란마귀의 시선으로 음탕하게 재해석하기 때문에 영화의 진짜 내용을 이해하기는 조금 어렵지만, 스포일러를 피하며 영화에 대한 최대치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데는 이만큼 신묘한 프로그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