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의 영수(김주혁)는 애인 민정(이유영)을 안다고 생각하고, 그녀에게 더 바람직한 일이 무엇인지 자기가 더 잘 안다고 믿는다. 민정이 그의 통제를 거부하고 등을 돌리자 영수는 목발을 짚고 연락이 두절된 그녀의 자취를 애타게 찾아 헤맨다. 그러는 동안 민정은 어디선가 그녀를 본 적이 있다며 접근하는 다른 두 남자를 만난다. 단 “나는 민정이가 아니다”라고 전제하면서. 이 부정이 환멸 끝에 고안한 전략인지, 아니면 그녀가 말하는 대로 우리는 민정의 도플갱어를 보고 있는 것인지 관객은 100% 확신할 수 없다. 다리의 흉터마저 동일한 걸로 보면 전자가 맞지만 “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는 그녀의 대사는 민정의 진실을 다시 앎 너머의 영역으로 보낸다. 그러니까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은 가장 직접적으로는 <우리 선희>에 이어, 패턴을 좇는 남자와 거기에 포획되지 않는 여자의 이야기이며, 앎과 사랑의 차이에 관한 교훈적인 로맨스다. 영화를 통틀어 영수는 세 차례 관계 회복을 꿈꾼다. 한번은 여자의 상냥함에 의지해, 두 번째는 아이 같은 애원에 매달려, 그리고 세 번째는 비로소 어린애도 늑대도 아닌 방식으로. 사랑하는 이와 함께한다는 것은 무수한 나머지 선택지를 포기하는 일과 같으며, 포기해야 할 것들 안에는 “나 자신과 나의 것”도 포함돼 있다는 각성에 마침내 도달하는 이 삼세번의 구조에는, 일체의 냉소를 걷어낸 동화적 기운마저 감돈다. 살짝 보태자면, 익숙히 보아온 홍상수 영화의 줌과 무빙이 이번처럼 간절하게 쓰인 예는 없었다. 요컨대 왼쪽 다리를 저는 남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왼눈을 다친 여자가 스쳐가는 이 영화는, 결국 절룩거리지 않는 사랑을 찾아가는 여정인 셈이다.
<옥희의 영화> <북촌방향> <밤과낮> 같은 작품들에 비해 평평한 구조와 은근한 초현실성을 가진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을 두고 홍상수의 소품으로 간주할 팬들도 있을 터다. 동시에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은 지난해 발표된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와 나란히 홍상수 세계에 입문하기 적당한 입구이기도 하다. 홍상수의 작업을, 보통 영화에서 서사를 추동하는 ‘사건’을 배제하고 일상적 상황에 처한 인물들이 내리는 작은 결단이 모여 어떻게 생의 시간이 달라지는가를 도해하는 프로젝트라고 요약한다면, 두 근작은 한편의 영화 안에서-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는 병치로,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은 이야기 내부의 시행착오를 통해- 글자 그대로 감독의 방법론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은 어느 때보다 정면으로, 연애의 과정에서 본인의 여성 혐오를 깨닫는 남성 주체를 놀리고 반성하는 영화로 보인다(혹자는 홍상수판 <엽기적인 그녀>라는 닉네임을 불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영화를 홍상수의 여성영화로 단정하는 일은 섣부르다. 민정은 이 이야기의 제1 동력이긴 하지만 주체로서는 영화 안팎의 누구에게도 맨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채 미스터리의 자리에 외로이 서 있기 때문이다.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은 2015년 7월15일 서울 연남동에서 크랭크인해서 8월10일까지 총 10회에 걸쳐 촬영됐다. 이미 완성된 걸로 알려진 홍 감독 차기작의 제목은 <밤의 해변에서 혼자>다.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에는 ‘동네 영화’의 분위기가 있습니다. 전작의 대다수 인물들과 달리 영수와 민정은 여행을 가지 않습니다. 딱히 휴가 중도 아닙니다. 두 사람 다 연남동에서 살고 일하고 여가를 보내는 것처럼 보입니다. 영화를 만들 당시의 어떤 기분과 조건에서 비롯된 결정입니까.
=연남동에 가보고 거기 처음 헌팅하는 날, 동네 예술가들, 동네 사람들을 소개받았습니다. 개성이 강한 분들처럼 보여서 혹시 연기를 할 수 있냐고 물었고, 의외로 많은 분들이 할 수 있겠다, 관심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을 포함하는 얘기를 짜게 된 거 같습니다.
-연남동은 어떻게 발견하셨습니까? 공원이 있는 동네라는 점이 독특한 풍경을 만듭니다.
=거기 아는 사람들이 세 사람 삽니다. 다 한 빌딩 아래위층에 삽니다. 그래서 영화 찍을 곳을 생각하다 혹시 하고 한번 가본 겁니다. 그 아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동네 구경도 시켜주고, 동네 사람들도 만나게 해주었습니다. 중앙에 공원이 있어서 뭔가 쓸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크레딧의 손글씨체가 어느 때보다 활달하고 시원스럽습니다. 필기구가 궁금합니다.
=넓적한 사인펜 같은 것으로 썼는데, 막 썼습니다. 크게 썼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민정의 한결같은 행동 패턴이, 영수를 각성시키고 변화시켜 비교적 안정된 엔딩에 도달합니다. 그 때문인지 전작들에 비해 이야기의 얼개를 미리 상당 부분 구성하고 촬영을 진행하지 않았을까 짐작되기도 합니다. 실제로는 어떠했나요.
=전하고 같은 식으로 한 작업입니다. 오히려 전작보다 더 아무 생각 없이 시작했고, 잠도 잘 못 자서 한두 시간만 자고 아침에 쓴 경우가 많았습니다. 두 번째 촬영 전날인가 쌍둥이의 아이디어가 생각났고, 그걸로 잘 끌고 나갔습니다. 하지만 계속 끝이 걱정되었습니다. 뚜렷한 게 있으니깐 잡히는 맛은 좋은데, 동시에 또 끝이 부담스러웠습니다. 뚜렷하면 세고 좋지만, 끝으로 모으면 단순해지기 쉬우니까요. 그러다 마지막에 두 인물이 골목에서 맞닥뜨리는 상황을 생각하게 되어, 엇갈리면서도 어떻게 넘어가는 대사 구성으로 편하게 끝날 수 있었습니다.
-김주혁, 이유영 배우는 홍상수 세계에 처음 들어왔습니다. 두 배우 모두 상대를 약간 추궁하듯 빤히 보는 표정이 있습니다. 감독님은 어떤 느낌을 받으셨습니까.
=김주혁은 자연스럽고 솔직해 보였습니다. 원래는 내성적이고 많이 예민한 사람 같은데, 어떤 과정을 거쳐서든지 이제는 세상살이에 안착한 느낌 같은 걸 받았습니다. 이유영도 솔직했지만, 사는 것에 상처받고, 오해받고 사는데 익숙해진 사람의 느낌이 조금 있었습니다. 삶을 갈구하면서도 의심하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젊으니깐 그럴 수도 있구요. 촬영 초반에 인물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인상을 한쪽으로 정하고 갔습니다. 둘 다 선한 사람입니다. 표현은 잘 안 했지만 둘 다 좋아합니다.
-영화는 중병에 걸려 먹지고 못하고 있는 영수의 어머니 이야기로 시작되지만, 이 꽤 중요한 사건은 처음에만 언급되고 영화에서 다시 제대로 다뤄지지 않습니다. 여자친구 민정의 ‘스캔들’이 즉각 영수의 머릿속에서 어머니를 몰아낸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영화 밖에 있는 아픈 어머니는 영수에게 어떤 존재입니까.
=그 장면 촬영 직전에 제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김주혁의 어머니도 그 좀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첫날 그렇게 써놓고 어떻게 되나 보자였는데, 그냥 잊어버리고 가는 것도 좋아 보였습니다.
-민정은 남자들이 통제나 소유의 제스처를 보이는 순간 도마뱀처럼 몸을 자르고 도망갑니다. 다른 남자를, 혹은 다른 날 사람을 만날 때 ‘나는 (당신이 아는) 그녀가 아니다’라고 잡아뗍니다. 정말 기억을 못하는 특별한 증세이거나, 눈 가리고 아웅하며 속아주길 바라는 경우일 수도 있겠고 쌍둥이(도플갱어)의 가능성도 대사로 던져집니다. 그러나 정황을 종합해보면, “당신은 날 모르고 다시 만난다면 제로 상태로 시작하고 싶다”는 우회적인 선언 같습니다. 민정이 이와 같은 전략을 택하기까지 어떤 경험을 했을 거라고 상정하셨나요.
=그게 다 민정이인지 아닌지 모릅니다. 그러니깐 전략인지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위 누구를 안다는 것은 사실은 50개의 감광촉을 가진 작은 감응판으로 대보는 거고, 원래는 천개의 감광촉을 가진 거대한 감응판으로 처음 느꼈고, 사랑했을 겁니다. 왜 50개냐면 그게 논리적으로 구성할 수 있는 최대치 숫자이고, 누구나 잘들 쓰는 익숙한 판형이라 그렇습니다. 그걸로 허락을 받아야 맘 편히 사랑도 하고 머리로 이해도 되고 소유한 거 같기도 하고 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프리세팅이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요. 그러면 뭐로 살아야 하느냐, 천개가 좋은데 천개로 되돌아가고, 그걸 유지하는 게 가능한가? 영화를 만들 때 그런 물음이 있었습니다.
-“50개가 논리적으로 구성할 수 있는 최대치 숫자”라는 말표현에서 50이라는 숫자는 천보다 작고 쉽게 다룰 수 있는 수의 자의적 예로 든 것인가요.
=논리적으로 구성되기 위해서는 숫자가 적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50이라는 숫자는 임의의 숫자입니다, 그래도 천과의 차이만큼의 차이를 상상하는 겁니다.
-그럼 영화를 찍고 나서 사람을 대할 때 천개의 감광촉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물음에 대해 희미하게라도 답을 얻으셨나요.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알게 된 걸까요? 뭔가 보았다고 해도, 실제 상황들에서 하는 건 너무나 어렵습니다. 포기할 수는 없고, 끝까지 해보는 겁니다. 포기하는 건 더 힘든 일이니까요, 천을 포기하고 50만 갖고 사는 거. 그러나 양쪽을 수용하는 ‘불순함’, 혹은 ‘애매함’이란 삶의 그림을 싫어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물론 천개가 보다 중심에서 활동하고, 가끔 50개로 할 수 없이 옮겨가고 하는 식이 되기를 바라지요.
-민정은 이야기를 움직여가는 인물이지만 관객을 포함한 누구 앞에서도 ‘가면’을 떨어뜨리지 않기에 끝까지 신비한 대상으로 남습니다. 그래서 동시에 무시무시하게 고독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녀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갖고 시나리오를 쓰셨습니까.
=어느 날 촬영할 땐데, 한 남자배우가 민정 같은 여자를 정말 알았다고, 정말 싫다고, 저런 여자와의 경험이 자신의 여성관을 바꾸었다고 치를 떨면서 얘기했습니다. 그때 제가 이렇게 말한 거 같습니다. “그건 네가 가지고 있는 틀에서 허용되는 것만 이해하기 때문에 그렇지, 사실 네가 안 그 여자는 그 사람 내부의 자연스러운 필요와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행동한 걸 거야. 네가 그런 그녀 내부의 그 작은 요소들이 만들어내는 움직임과 형태를 그 모습 그대로 볼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냥 너의 틀에 안 들어오는 사람이 된 거고, 행동이 된 거야. 그래서 이해 못할, 혹은 나쁜 년으로 만들어버린 거고. 네가 이해 못한다고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이 되는 건 아냐, 그냥 너와 너무 다른 사람이거나 너의 틀이 너무 부족하거나 굳어 있는 거야.”
-재영(권해효)과 상원(유준상)이 혼자 커피를 마시는 민정에게 다가가서 공간을 침해하고 캐묻는 행동은 무례해 보입니다. 이런 행동이 가능한 것은 어떤 태도에 기인한다고 보시나요.
=좀 무례한 태도처럼 보입니다. 그러면 안 되겠죠.
-이 영화 속 민정을 보면서 피카소가 거듭 재구성한 연인/모델 도라 마르의 초상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의 인간관이나 사랑에 대한 견해는 홍 감독님의 전작과 통하지만, 이번 영화는 어느 때보다 여성을 쉽게 이해하고 싶어서 임의로 단순화하는 남성의 습성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현재 감독님의 관심이 향하는 주제인가요.
=모든 단순화는 편리함과 위험함이 같이 가는 거 같습니다. 때에 따라서 우린 편리함을 누리고, 때에 따라선 그것 때문에 사람을 오해하고 심판하는 위험한 길을 걷게 됩니다. 단순화라는 것을 극복하는 길은 하나로 정해진 게 아닌 거 같습니다. 수많은 길이 있습니다. 우선은 눈앞의 의심이 가는 그 단순화를 붙잡고 목숨 바치듯 싸워보는 거고, 그렇게 하나씩 이겨나가다 보면 실력이 늘어서 다른 단순화의 틀들을 좀더 쉽게 박살낼 수 있는 거 같고, 그렇게 오래 싸우다 보면 자신의 가장 강한 욕망과 그것을 철골 구조화하고 있는 쾌락/고통의 단순화란 틀도 이기게 된다고 믿습니다. 그러면서 여유가 될 때마다 부서진 것들 사이로 드러나는 넓고 푸른 공간에 맨 얼굴을 이름 없이 눈감고 들이미는 겁니다.
-재영과 상원이 마주쳐 상황이 급전되는 대목은 역대 홍상수 영화 중 가장 큰 웃음이 나오는 장면 가운데 하나입니다. 두 남자는 마치 시야에서 사라진 공을 곧장 잊어버린 강아지들처럼 행동합니다. 그토록 민정에게 집착하더니 뭔가에서 풀려나서 기뻐하는 것처럼도 보이고 민정과 영수에게 공간을 주기 위해 물러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 장면을 좀더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잘 보신 거 같습니다. 그런 신입니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가 영화 밖에서 관계를 리셋했다면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은 영화 내부에서 관계를 리셋하는 이야기입니다. 삶이 좋게 변화할 수 있다는 낙관적 태도가 강해지고 있다고 느끼십니까.
=낙관보다는 포기하고 하늘에 맡길 건 맡기고, 내가 당장 실제로 하는 것, 해야 하는 것에만 충실하는 것, 그러곤 생각하지 않고 지금 앞의 그 작은 것에서 모든 것의 진동과 냄새를 느끼려 하는 것.
-많은 관객이 민정의 모습에서 루이스 브뉘엘의 <욕망의 모호한 대상>을(이 영화 경우는 감독님 영화와 연관해 언급되는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영화의 마지막 장에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사랑을 카피하다>를 연상할 것입니다. 두 작품을 보셨다면 감상을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이란 감독 영화는 못 봤고, 브뉘엘은 다 좋아하니깐 틀림없이 좋아했을 겁니다. 이야기나 정확한 기억이 별로 없고, 그 영화에서 두 번째 여자배우가 처음 등장했을 때, 무슨 철창 뒤편에 서 있었는데 그게 많이 어색하게 느껴졌던 거, 그리고 의외로 쉽게 금방 어색함이 없어진 기억이 납니다.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이라는 영화 제목은 당연히 “소유냐 존재냐”라는 질문으로 해석될 것 같습니다. 더해주실 말씀이 있을까요.
=당신 자신에다가 당신의 소유물 모두를 포함해서 당신을 지칭한다 해도, 사실의 당신은 그 지칭을 벗어나는 곳에 넓게 넓게 산포되어 있습니다. 아마 조금 어떤 부분은 걸리겠죠. 그런 뜻입니다. 반어법적으로.
-“조금 어떤 부분은 걸리겠죠”라는 표현은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을 합치면 진짜 당신의 일부는 그중에 있겠죠”라는 뜻인가요.
=네,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그 사실의 걸리는 부분과 지칭의 형태 안에서 대응하는 그것과는 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지칭의 형태로 쓰이기 위해 흡수되면서 순수한 ‘그것’이 아니게 된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