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송형국의 영화비평] 각자도생의 공기를 건조하게 담아낸 <로스트 인 더스트>
2016-11-10
글 : 송형국 (영화평론가)

※ 영화의 스포일러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땀 흘려 일한 만큼만 받는 사람들, 혹은 그마저도 못 받는 대다수 사람들에겐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게 금융자본주의다. 톰이 100만원을 벌어 은행에 넣고 제임스가 은행에서 100만원을 빌리면, 톰과 제임스는 총 200만원을 쓸 수 있다. 번 돈은 100만원뿐인데 쓰는 돈은 2배가 된다. 이런 방식으로 국내에 도는 돈이 1천조원이 넘는다. 죄다 빚이다. 사람들에게 빚이 많을수록 은행은 돈을 번다. 17세기 영국 금 세공업자들이 탄생시킨 은행업은 대출을 많이 내줄수록 많은 이자를 받아낼 수 있었고 그러면 더 많이 대출해줄 수 있으므로 갖가지 대출상품을 만들어왔다. 처음엔 갚을 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돈을 꿔줬는데, 대출에 맛들인 은행업자들은 담보만 있으면 돈을 내주기 시작했다. 생산되는 가치와 별개로 유통되는 돈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은행이 얼마나 대출을 해주고 싶어 안달인가 하면, 실제로는 아직 사지도 않은 집을 담보로 돈을 빌려준 다음 그 집을 살 수 있게 해준다(모기지론). 집이 온전히 제 집이 되는 것은 10년, 20년 뒤의 일이다. 실물 가치에 비해 세상에 돌아다니는 돈이 압도적으로 많아지니 어디선가 거품이 터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가 대표 사례다. 이를 소재로 한 영화도 숱하다. 세계적으로 고령화가 찾아오고 돈 빌릴 젊은 인구가 줄어들자 은행들은 역(逆)모기지론을 내놓는다. 말 그대로 역발상의 창조경제다. 노인들이 갖고 있는 집을 담보로 대출을 해주는데, 사망할 때까지 연금처럼 나눠서 준다. 향후 고령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어날 텐데 현금 상환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이런 상품이 얼마나 위험한지 경고하는 이는 많지 않다. 물론 은행 입장에선 담보를 압류해 처분하면 되므로 강도가 들지 않는 한 손해 볼 일은 없다.

<로스트 인 더스트>의 토비(크리스 파인)와 태너(벤 포스터) 형제는 숨진 어머니의 역모기지론을 상환하기 위해 은행을 턴다. 어머니에게 대출을 내준 텍사스 미들랜즈 은행 지점만 골라서 턴다. 며칠 남지 않은 만기일까지 대출금을 갚지 않으면 땅을 압류당하게 된다. 마침 땅에서는 석유가 발견됐다. 그러니 대출을 갚을 만큼만 해당 은행에서 가지고 나온 다음 고스란히 돌려주기로 한 거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영미(배두나)의 말대로 ‘은행 입장에선 푼돈이지만 우리에겐 평생이 달린 문제니까 이건 화폐가치를 극대화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정년퇴직을 앞둔 보안관 해밀턴(제프 브리지스)과 인디언 혈통의 후배 알베르토(길 버밍엄)가 이들의 뒤를 쫓는다.

무심함과 덧없음

<로스트 인 더스트>는 산업자본과 금융자본, 옛것과 새것, 머무는 자와 떠나는 자, 기존 세대와 다음 세대, 형과 동생, 시간과 공간, 땅과 하늘이 마주보며 이루는 거대한 대구법(對句法)의 영화다. 이 영화의 원제 ‘Hell or High Water’는 ‘무슨 일이 있어도’라는 뜻의 관용구다. 토비 형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은행(금융자본)의 돈놀이(화폐경제)로부터 석유(산업자본)가 있는 땅(실물경제)을 지키고자 한다. 다음 세대에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도록 하려는 토비가 선택한 방법은, 고색창연하게도 은행 금고에서 실물 지폐를 빼앗는 것이다. 현실을 둘러싼 공간이나 피사체의 관계를 설명할 때 종종 수평이동(fan)하는 카메라는, 인물이나 땅이 간직한 세월 또는 사연을 이야기할 때 주로 수직이동(tilt)한다. 그러고는 수십만년에 걸쳐 주인이 바뀌어온 그곳 땅의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평생 이 지역을 지켜온 해밀턴은 후배 보안관과 유사 형제 관계가 되어 강도 형제를 추적한다.

영화는 이렇게 대구와 대조로 텍사스 벌판을 채운다. 그런데 대척점에 놓인 요소들은 정-반-합의 나선운동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애초에 만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에서 옛것과 새것은 흔히 생각하듯 서로 충돌하고 투쟁한다기보다 심드렁히 방조한다. 황야의 석유펌프와 거리의 대출광고판처럼 서로 엇갈리며 무심하다. 어떤 것들은 그 과정에서 덧없이 소멸한다. 이 영화는 겉보기와 달리,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해 아쉬움을 표명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가 노리는 것은 옛것과 새것이 서로에게 무신경한, 각자도생의 공기를 건조하게 담아내는 것이다. 이 영화의 원제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켜야 할 것에 대한 인물의 의지를 담고 있다면, 국내 개봉 제목은 그저 제 갈 길 가는 시스템과 그 세태에 대한 다소 감상적인 반영이다. 이 무심함과 덧없음의 측면에서 영화를 보자면 <로스트 인 더스트>는 ‘올해의 우수 번역 제목’으로 꼽을 만하다.

땅은 거짓말하지 않지만…

형식적으로 버디무비-로드무비이자 내용적으로 서부영화인 <로스트 인 더스트>의 인물들은 몹시 마초적이며 영화는 남성성의 병렬연결로 진행된다. 미국 서부를 아울러온 폭력의 역사와 정서는 그 자체로 이 영화의 주된 재료다. 죽음을 각오한 형 태너가 동생과 마지막 작별인사를 건넬 때 내뱉는 대사는 이 영화 전반의 정서를 압축한다. “사랑해. 진심이야. 그리고 엿이나 먹어.” 사격에 성공한 보안관은 옆사람의 얼굴을 툭툭 때리며 자축하고, 여성들 역시 총 앞에서 벌벌 떨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연약해 보이는 한 은행 여직원은 보안관에게 조사를 받을 때 가정폭력 같은 남성의 폭행에 일상적으로 노출돼왔음을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이렇듯 무정한 마초들의 세계는, 스티븐 핑커가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 소상히 밝혔듯 미국 서부에 면면이 전해내려온 폭력의 역사에 뿌리를 둔다. 인디언들로부터 빼앗은 땅을 서로 차지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부동산을 총으로 지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보안관은 통상 2시간 거리 밖에 떨어져 있으므로 총기 사용 역시 합법적이고 당연한 권리였다. 영화 속 카우보이들은 용의자를 보면 연락 달라는 보안관에게 “그놈을 보면 내가 끝장낼 텐데 무슨 연락을 하냐”며 역시나 심드렁하다(공권력이 아닌 자경단과 카우보이가 재산을 지키는 땅에서 자력구제를 위한 폭력의 욕망을 밀도 있게 표현한 영화로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아메리칸 스나이퍼>가 있다). 자석의 같은 극처럼 척력(斥力)을 발하는 남성성의 병치가 이 영화를 이끈다.

돈이 돈을 버는 금융자본주의는 침략과 합병과 지배를 추구하는 남성성의 체계다. 극 종반, 퇴직한 해밀턴은 대출을 다 갚은 토비를 찾아간다. 그는 궁금하다. “어떻게 한 건가?”라고 물었다가 질문을 바꾼다. “왜 그랬나?” 강도짓 이후 비싼 물건을 산 것도 아니고 농장에서 석유가 나오니 돈도 필요 없어 보이는데 토비가 은행을 턴 이유가 납득되지 않는다. 여기서 ‘어떻게’를 알면 ‘왜’가 궁금해지지 않을 텐데 은행의 협조 거부로 해밀턴은 토비 어머니의 대출 관계를 알 수 없다. 원체 금융자본 시스템은 ‘어떻게’를 뒤에 숨기는 게 장기다. 불어나는 돈이 장부상 데이터에 불과하다는 걸 사람들이 알아서 좋을 게 없다. 현금은 지급준비율에만 맞춰놓으면 된다. 땅은 거짓말하지 않지만 진실을 말해주지도 않는다. 노인은 아마도 끝까지 영문을 모를 것이며 노인을 위한 땅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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