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이지현의 영화비평]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에 대하여
2016-11-15
글 : 이지현 (영화평론가)

여전히 홍상수는 리얼리즘의 감각으로 본질을 이야기한다. 늘 그랬듯 남자주인공은 우유부단하고, 그 때문에 여러 사건들이 생긴다. 술에 취할 때만큼은 용감해지는 인물들의 성향도 여전하다. 영화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을 지배하는 것은 술, 사랑, 충동적 행동들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술 취한 주인공이 쟁취하는 대상은 이전과는 다르다. 주인공 영수(김주혁)는 눈앞에 앉은 여성을 갈구하지 않은 채 자신이 원하는 것이 ‘눈앞에 없단 사실’을 깨닫고 절망에 빠진다. 이 점에 주목해 영화를 살피려 한다. 절망과 깨달음이 현실을 바꿀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이 작품은 진지하게 파고든다. 나아가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만일 현재의 상태를 그저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사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라고. 이 질문은 “영화가 현실의 예술인가?”라는 시네마의 본질적 의문과도 연결된다. 물론 그 대답은 유동적이다. 철학자 클레망 로세의 이야기처럼 영화의 사실성은 어느 누구도 붙잡을 수 없고, 절대적으로 존재하거나 부재하지 않는 ‘상상과 현실의 경계’에 위치해 있다.

먼저 익숙한 것부터 시작하자. 홍상수의 이야기는 두층으로 절단되는 경향을 보인다. 앞선 이야기에 포인트를 두고서, 감독은 두 번째 이야기를 반복하여 주제에 관한 동력을 끌어낸다. <하하하>(2010)나 <오! 수정>(2000)처럼 동일한 시간에 대한 다른 관점을 보여줄 때도 있고,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2015)처럼 동일한 시점의 다른(정확히는 반복된) 시간을 보여줄 때도 있다. 어떤 경우라도 각 이야기의 중요성이 동일하게 유지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리하여 두 가지 이야기가 합쳐져 ‘비선형적 서사’를 생성한다. 이번에도 남자와 여자, 두 주인공을 중심으로 이야기는 서로 갈라진다. 영수쪽이 중심축이라면, 민정(이유영)의 이야기는 해석의 발판이 된다. 연인의 행동을 믿지 않고 추궁한 대가로 이별한 남자는, 혹여 그녀가 돌아오지나 않을까 고심한다. 같은 시간, 연인에게 안 좋은 면을 발견한 민정은 ‘진짜 괜찮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환상에 사로잡힌다. 원래 그녀의 직업은 의상과 관계된 일이지만, 이제 글 쓰는 직업을 갖고 싶다. 남들 눈에 보이는 옷보다는 가상의 이야기 만들기에 관심이 간다. 실제로 영수와 헤어진 후, 그녀가 만나는 인물들은 썩 좋은 외적 조건을 지니지 못했다. 남들 눈에 너무 띈다. 그들을 보면서 민정은 지금껏 만나왔던 다른 남자들과 ‘비교’를 한다.

홍상수 영화에서 프레임의 간소화 경향은 꽤 오래전에 완성됐다. 동일한 장소에서 같은 시간에 일어나는 사건이 하나의 컷으로 연결되고, 숏의 크기와 방향은 줌과 패닝으로 조절된다. 이른바 ‘원신 원컷’의 경향이다. 이번 영화에도 신은 하나의 컷으로 완결된다. 하지만 시퀀스는 좀 다르다. 연극적인 신 개념과 달리 시퀀스는 내재적 평균 단위로 추산되는 개념이다. 다양한 시청각적 요소를 배합하며, 암시적 요인들도 포함한다. 따라서 시퀀스 구분은 애매모호하며 평자마다 달라질 수 있다. 바로 그 시퀀스 구분에 관한 힌트가 이 영화에 포함돼 있다. 바로 ‘음악’이다.

<밤과낮>(2007)이나 <하하하> 등 이전 영화들도 끊을 수 있는 방점은 있었지만 그 효과는 각기 달랐다. 자막이나 사진 등 중간 지점은 다중 관점이나 효율적 반복의 기제였다. 하지만 이번 영화의 음악은 겹치거나 반복된 부분들보다 서로 어긋나는 ‘현실’에 더 집중하게 만든다. 영화 속의 연인들은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점점 더 어긋나고, 가상의 힘에 점차 매료된다. 처음에 모든 사건은 기표가 제시한 환영에서 시작됐지만 보이지 않는 것의 작용이 실제가 되어 스크린을 장악해간다.

음악에 따라 시퀀스 구분을 하면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시퀀스에서 제시되는 사건들은 비교적 ‘객관적’이다. “아픈 사람은 사흘을 굶으면 죽는다”는 형의 말에 주인공은 어머니의 죽음을 걱정하는데, 이때 나타난 동네 형이 여자친구 험담을 하면서 영수는 더 예민해진다. 이 시간, 카페에서 (술이 아닌) 커피를 마시던 민정은 어느 중년 남성과 마주친다. 그녀는 그를 피하고 싶지만 이 남자는 꽤 저돌적이다. 그 순간 그녀가 내뱉는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겉만 보고 판단하기 어렵다. 아무튼 그날 밤 영수와 민정은 만나고, 둘은 심하게 다툰다. 영수는 그녀가 약속을 어긴 것에, 민정은 영수가 자신을 믿지 않는 것에 화가 난다. 두 번째 시퀀스에서 남자는 시름에 빠져 있다. 지난 일을 후회하지만 이제 그녀는 없다. 심지어 헛것이 보일 지경이지만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어서 세 번째 시퀀스, 이 부분에서 영수는 ‘죽음’과 ‘사랑’의 중요성에 대해 설파한다. 죽으면 끝이고, 그래서 사랑이 더 중요하다고 그는 외친다. 한편 민정은 자신이 생각하는 남자의 부류를 두 종류로 나누어 정리하고 있다. 모든 남자는 ‘늑대’ 아니면 ‘아기’ 둘 중 하나다. 그리고 이와 상관없이, 그녀는 아직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괜찮은’ 부류를 찾고 있다.

네 번째 시퀀스는 사실이 아닌, ‘주관적이고 이상적인 환상’을 보여준다. 마침내 민정의 집으로 들어간 영수는 ‘진짜 사랑’을 다짐하면서 행복해한다. 한편 유부남과의 연애를 정리한 민정은 한층 개운한 듯 보인다. 하지만 이 일들은 모두 허상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 비현실의 끝에서 영화는 과거와는 달라진, 현실의 일부분을 비춘다. 바람둥이였던 영수가 술집에서 만난 여인의 합석 제안을 단번에 거절한 것은 긍정적인 신호이다. 하지만 정말 그가 달라졌는지는 미지수다. 이후 다섯 번째 시퀀스에 이르러 영화 속 모든 인물들이 한 장소에서 만난다. 바로 이 지점에서 현실과 이상이 부딪혀 발생하는 기이한 특이점이 드러난다. 특히 민정이 쌍둥이가 아닌, 진짜 그녀일 수 있단 증거가 발견된다. 중행(김의성)이 발견한 민정과, 재영(권해효)이 연애했던 그녀가 겹쳐진 것이다. 요컨대 현실 속의 어떤 것은 거짓이고, 환상의 어떤 것은 진실일 수 있다. 그러니 명확한 것은 ‘욕망’뿐이다. 민정은 단어를 통해 규정된 시스템에서 벗어나고자 하며, 영수는 그녀와 만나고 싶단 생각에 빠져 있다. 마지막 여섯 번째 시퀀스, 두 주인공은 끝내 마주친다. 이내 행복한 연애가 시작되지만, 그 과정은 위태로워 보인다. 순조로운 태도 자체가 비현실적인 데다, “멜론보다 수박이 더 낫다”는 꿈속의 대사가 이전의 ‘비교’ 지점을 떠올리게 만든다. 민정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영수도 마찬가지다. “멜론이 달긴 한데 시원한 건 수박이 더 낫다”는 그의 태도는 예전과 동일하다. 모순된 행위에서 쟁취한 아슬아슬한 사랑은 이렇듯 관객의 현실 감각과 어우러져 불안감을 자아낸다.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보자. 침대 옆 책장에는 책이 가득하고, 연인과 함께 삼키는 과일은 정말이지 달콤하며, 촛불이 흘러내리는 한정된 시간은 아름답게만 느껴진다. ‘개념’ 혹은 ‘시간’의 구조를 탐험하던 전작들과 달리 이번 홍상수의 영화는 ‘진실’이란 실존 문제에 집요하게 다가간다. 그것이 무엇이든 사랑이든 죽음이든, 인간의 존재 요건에서 발견되는 가장 낭만적인 요소임은 틀림없어 보인다. “더이상 꿈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행복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을 “당신이 너무 좋아서 당신을 믿을 것”이란 주인공의 대사에 기대어 낙관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영화가 제시하는 달콤한 순간을 우린 떠올려야 한다. 스크린이 환영을 제안하는 동안, 그 가능성은 항상 열려 있다. 실제와 상상의 대면은 늘 제3의 무언가를 끌어내는 동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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