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ns x cross]
[trans x cross] “작가라는 정체성을 묻는 질문에 대한 나의 답” - <실화를 바탕으로> 출간으로 한국 찾은 델핀 드 비강
2016-11-17
글 : 이다혜
사진 : 오계옥

로만 폴란스키의 신작은 2017년에 개봉예정으로 제작 준비 중인 <실화를 바탕으로>다. 올리비에 아사야스가 폴란스키와 함께 각색에 참여하고 에바 그린과 에마뉘엘 세니에가 주인공으로 캐스팅되었다. <실화를 바탕으로>의 원작 소설을 쓴 델핀 드 비강이 한국을 찾았다. 소설 초반, 비평적으로나 상업적으로나 성공을 거둔 소설가 비강은 북투어를 다니며 독자들의 관심에 기뻐하는 동시에 힘들어한다. 작가 자신을 연상시키는 주인공은 차기작에 대한 압박감에 시달리는데 그 정신적 긴장을 따라가다 보면 작가가 놓은 덫에 걸리게 된다. 델핀 드 비강은 한국에서 <귀여운 남자들> <지하의 시간들>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을 비롯, <길 위의 소녀> <실화를 바탕으로>까지 적지 않은 소설이 소개된 프랑스 소설가다. 자전적인 요소가 완전한 상상과 맞물려 이야기를 풍성하게 하는 방법이 궁금했다.

-<실화를 바탕으로>로 프랑스 문학상 중 하나인 ‘르노도상’과 ‘고교생이 뽑은 공쿠르상’을 동시 수상했다. 그중에서도 학생들이 뽑은 상을 받았다는 특별함이 있을 것 같은데.

=프랑스 역시 다른 많은 나라들처럼 상을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공쿠르상이나 르노도상같이 기존 시스템 안에서 전문가들이 선정하는 상이 있고 독자들이 주는 상이 있다. 나는 독자들이 주는 상을 특별하게 생각하고 더 큰 기쁨을 느낀다. 책을 선정하는 독자들은 젊고 감수성이 예민한 독자들이었고, 내 책을 가장 잘 이해한 사람들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청소년기의 독서가 그 이후의 독서를 좌우한다고 생각한다. 전세계적으로 십대의 독서가 줄고 있다는 기성세대의 불안이 대단한데 프랑스는 어떤가.

=특별히 젊은 사람들이 독서를 적게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프랑스 독서 시장에서 젊은 사람들을 위한 책을 많이 내고 있고, 또 많이 읽고 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책을 적게 읽는다는 말이 프랑스에서도 나오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장년층이 하는 보수적인 말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고전소설을 적게 읽는다는 말은 맞다. 하지만 지금의 청년 세대는 읽을 거리가 이전보다 더 다양하지 않나. 젊은 사람들이 적게 읽는다기보다는 다르게 읽는다는 말이 맞을 듯하다. 만화와 그래픽노블, 그리고 <해리 포터> 시리즈 같은 판타지 소설들.

-당신이 십대 때 좋아한 작가는 누구였나.

=모파상, 러시아 작가들 고골,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플로베르도 또래보다 더 일찍 발견한 편이었다. 특이한 점이라면 열두살 무렵까지는 만화만 읽다가 바로 고전으로 넘어갔다. 학교 다니면서 수업 때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을 읽었는데, 깜짝 놀라 그때부터 고전소설들을 열심히 찾아 읽었다.

-처음 몇 작품을 쓰던 때까지는 아이 둘을 키우면서 직장을 다니며 글쓰기를 병행했다고 들었다. 많은 여성 작가들이 살림과 육아를 마치고 나서 식구들이 잠든 뒤 식탁에 앉아 글을 쓴다. 쉽지 않았을 텐데, 소설을 쓴 힘은 무엇이었나.

=내 삶에 글이 워낙 큰 자리를 차지했던 것 같다. 직장에서 일하고 엄마로 살면서 소설을 쓰려니 식구가 다 잠든 밤에 써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했나 싶다. 남편이나 아이들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소설을 쓰다가 네 번째 소설 <길 위의 소녀>부터 상황이 바뀌었다. <길 위의 소녀>가 나온 뒤 직장을 잃었다. 20년간 회사를 다녔고, 마지막 다닌 곳에서 11년동안 일하면서 팀장이 되었는데, 윗선과 의견이 맞지 않아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아야 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마침 <길 위의 소녀>가 인기를 얻으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다른 직장을 찾기 전까지, 이전에는 꿈이었던 낮에 글쓰기를 시작했다. 햇빛 보며 글쓰는 게 소원이었거든. 그런데 다섯 번째 소설 <지하의 시간들>이 또 성공을 거두면서 전업작가가 되었다.

-<길 위의 소녀>의 두 십대 주인공은 처한 상황이 다르다. 루는 아이큐 160에 학교에서 두 학년이나 월반해 천재라는 말을 듣지만 반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열세살 소녀이고, 네댓살 위의 노는 홈리스로 길 위에서 지내온 상황이다. 그런데 이 둘은 서로 통하는 부분을 발견하고 친구가 된다. 이 두 인물을 어떻게 구상했나. 둘의 이야기로 보이지만 천재 소녀 루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되어 있는 구조의 작품이기도 한데.

=루와 노는 달라 보일지 몰라도 정서적인 면에서 둘 다 사회의 변방에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노숙자인 노는 사회 시스템의 변방에, 루는 성격이나 천재적인 면 때문에 쉽게 학교에 동화되지 못한다. 루와 루가 좋아하는 뤼카는 둘 다 집에서 부모로부터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처음 이 소설을 구상했을 때는, 루가 화자이긴 하지만 덜 중요한 인물로 생각하고는 노를 통해 루의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했다. 하지만 쓰다 보니 노는 다가서기 더 어려운 성격이고, 그래서 루의 입을 빌려 노를 이야기하는 쪽으로 바꾸었다. 루라는 인물은 성인이 된 내가 그 또래 아이들을 관찰하면서 다듬기는 했지만, 나의 그 시절을 많이 떠올리며 만들어냈다. 루는 2년 월반했지만 나도 1년 월반을 했고, 다른 아이들과의 간극이 있었다. 그 기억이 많이 떠올라 과거의 경험이 소설에 투영되었다.

-<길 위의 소녀>는 거칠게 요약하면, 또래와 가족에게 소외감을 느끼는 루라는 한 소녀가 첫 키스를 하기까지의 이야기다. 성장이라는 과정은 누구나 통과하지만 진짜 무엇이 나를 성장시키는가를 말하기는 굉장히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그 안에 어두운 경험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고. <길 위의 소녀>가 보편적인 성장 이야기로 매력이 있는 건 그래서다.

=두 아이가 성장하면서 모험하는 이야기라는 말에 동감한다. 우정이 삶을 완전히 바꾸는 이야기다. 젊은 독자들은 세 주인공에 크게 공감하고 좋아하더라. 책을 덮으면서 그다음 일이 궁금해서 떠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많이 받은 질문은 그다음은 어떻게 됐는지, 뒷이야기를 쓸 생각이 있는지였다.

-<길 위의 소녀>가 처음 한국에서 소개될 때는 청소년 소설로 소개되었다. 영미 문학계에는 영어덜트라고 해서 청소년 소설과 성인 소설을 분리해 시장이 만들어지고 있다. 십대를 위한 소설이 별도로 쓰이고 유통되는 것에 대한 생각은 어떤지.

=나누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길 위의 소녀>는 애초에 성인을 위해 쓴 책이다. 어린 시절에 당신이 꾸던 꿈은 어떻게 되었는지, 불의에 저항하고자 했던 마음은 어떻게 되었는지를 묻고 싶었다. 북미지역에서 <길 위의 소녀> 청소년판과 성인판 두 가지로 표지를 나누어 만든 것도 봤는데 바람직한 것 같지는 않다. 15, 16살이면 충분히 성인과 같은 책을 읽을 수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는 비평적이고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뒤에 스트레스를 받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당신의 경험과 맞닿아 있겠다 싶던데.

=스트레스이기 이전에 그런 큰 성공은 작가에겐 큰 행운이고, 작가로서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좋은 일이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 같은 경우 아르헨티나나 칠레에 갔을때 독자들이 날 부둥켜안고 울기도 했다. 그 소설은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거기에는 복잡한 심경이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게, 아주 개인적인 가족의 이야기를 쓰면서 나 자신의 감정과도 싸워야 했다. 그다음에 쓴 <실화를 바탕으로>는 주인공 델핀이 작가인 나와 같은 인물인 것처럼 독자들이 믿게 하기 위해 여러 계산을 하며 썼다.

-영화화하기 딱 좋은 이야기다. 주인공으로 생각한 배우가 있나.

=영화화하기 좋게 쓴 건 맞는 것 같다. 뒤쪽에 놀라운 반전이 있기도 하고. 책이 출간된 뒤 여러 감독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하지만 <실화를 바탕으로>는 문학 창작과 작가로서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이기도 해서, 영화와는 많이 다를 것이다. 주인공 델핀을 연기할 배우라면 상드린 키베를랭이라는 배우가 어떨까 생각한 적은 있다. 나와 닮았다는 말을 종종 듣기도 했고.

-현대사회의 익명성과 불안을 소설에 담아냈는데, 현대 프랑스 사회에서 가장 큰 불안 요소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지하의 시간들>에서 다루기도 했지만 대도시 속의 고독, 특히 몇주간 아무도 만나지 못한 채 방치되는 나이든 사람들의 삶에 대해 말해야 한다. 그리고 또 하나는 기술 문명의 발달이다. 소설로 다루기는 어렵겠지만 SNS에 대한 문제의식, 네트워크에 대한 이야기도 생각 중이다. 인쇄매체는 죽었다고 할 정도로 쇠락했고, 사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개인의 글이 의견과 사실을 구분하지 않고 인터넷을 통해 유통된다. 아이들에게도 위키피디아만 믿지 말고 사실 여부를 대조하고 확인하라고 말하지만, 그냥 인터넷에서 본 대로 믿어버리는 게 더 익숙해 보이더라.

<길 위의 소녀>

델핀 드 비강 지음 / 이세진 옮김 / 김영사 펴냄

<길 위의 소녀>는 프랑스 서점 직원 2천명이 뽑은 ‘프랑스 서점 대상’과 로터리 인터내셔널재단에서 수여하는 ‘로터리상’을 동시에 수상한 델핀 드 비강의 대표작 중 하나다. 열세살 루는 뛰어난 지적 능력으로 2년이나 월반해 학교를 다닌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무시당하고, 집에서는 어머니의 우울증으로 소외감을 느낀다. 그러다 우연히 노숙자 노를 만나 친구가 되고, 동시에 학교에서는 수업에 불성실하기로 유명한 뤼카를 좋아하게 된다. 노를 길에서의 삶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루의 노력은 성공할 수 있을까. 최근 출간된 <실화를 바탕으로>에 대해서는 ‘북엔즈’ 108p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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