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밤마다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 이 나라 국정을 농단한 무당 일족과 그 꼭두각시(들) 때문에? 세계의 경찰인 크고 아름다운 나라의 대선 결과로 도래할지 모르는 미래의 아포칼립스가 묘하게 기대되어서? 트위터에는 또 누구의 배꼽 아래 세치에 존재하지 않는 인격의 폭로가 이어질까 궁금하여서? 아니다. 난 그저 언제나 도대체 영화란 무엇이며 나아가 현실이란 무엇인가를 암중모색할 뿐이다. 사실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일들. 어차피 다 잘 안 될 테니까.
과거에 나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 몇편을 보고 서둘러 감동하여 그의 이름 옆에 ‘=’표시를 하고 ‘휴머니즘’이라 적어 눙치는 걸 좋아했다. 하지만 함부로 그러기 이전에 구로사와는 최고의 액션영화감독이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항상 분명하게 움직인다. 배우의 행위를 분명하게 표현하는 것부터가 영화에선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그의 영화엔 휙휙 움직이고 땀 뻘뻘 흘리며 눈빛을 번쩍이는 것이 정확하게 찍혀 있다. 배우의 눈을 반짝거리게 하려고 항상 거울을 썼다는 이야기는 늘 잊히지 않는 거장의 팁이다. 그의 영화들에서 미장센이란 대체로 모래와 바람과 안개와 비와 수풀과 인마(人馬)였다. 그 모든 계획과 통제가 너무나 대단하지만 그의 영화는 기본적으로 ‘하드보일드’다. 하드보일드는 스타일로 보이지만 사실은 태도다. 영화는 물론 문학과 만화까지, 서사를 다루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 하드보일드가 가장 높은 수준으로 서사를 다루는 법임을 깨닫는 날이 온다. 구로사와가 만든 흑백의 하드보일드를 보고 있으면 스크린의 검은 입자가 먹처럼 흘러나와 관객의 폐 속으로 그 흑색이 스며들 것만 같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이 비정한 서사로 결말에 휴머니즘을 향하지 않고 끝내 철저한 절망을 그린 적이 있다. <거미집의 성>(1957)이 그러한 형식미로는 일품이며, <천국과 지옥>(1963)도 가슴을 치지만, 최고 정점은 <나쁜 놈일수록 잘 잔다>(1960)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1959년에 그가 설립한 ‘구로사와 프로’의 첫 작품이었다. 제작 전반을 장악할 수 있게 되자, 가장 어두운 작품을 만들어낸 것이다(다음 작품이 초특급 엔터테인먼트 <요짐보>(1961)였던 건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복수는 실패로 돌아가고
영화는 주택공사 부회장 딸의 거창한 결혼식 풍경에서 시작한다. 신부가 발을 헛디디며 <결혼행진곡>이 중간에 ‘탁’ 끊기고, 식장에 배달된 기묘한 디자인의 케이크를 본 사회자가 나이프를 ‘딱’ 떨어트린다. 단절. 이상한 결혼식이 끝나고 난 후, 뇌물 스캔들과 관련한 비리 공무원과 건설주를 향한 누군가의 복수에 가까운 압박이 시작된다. 그 누군가는 5년 전 뇌물 스캔들을 잠재우기 위해 강제로 투신자살‘당한’ 후루야의 숨겨진 아들, 비리의 주체인 이와부치(모리 마사유키) 부회장의 딸 요시코(가가와 교코)와 방금 결혼식을 올린 신랑 니시(미후네 도시로)다.
부패권력에 대항한 주인공의 대담한 복수극은 현실의 소시민인 관객을 사로잡는다. 관객은 주인공이 이겨서 비리가 속 시원히 까발려지리란 희망을 품고 영화를 본다. 나 역시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짙은 눈썹의 호남 미후네 도시로가 질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원한을 품은 채 결혼식을 치렀지만 니시는 요시코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원수의 딸을 품에 안은 주인공을 보면서 예의 구로사와식 휴머니즘, 희망과 용서가 더해질 거라는 예측까지 했더랬다. 이와부치의 오른팔 모리야마(시무라 다카시)부장을 붙잡아 가두는 곳은 패전의 흔적이 남아 있는 을씨년스러운 폐허다. 폐허 위에 서 있는 니시의 모습은 전쟁을 벌이고 부패한 시스템을 구축한 윗세대에 당당히 도전하여 죄를 묻는다는 의미로 보였다.
그러나 정의로운 청년들이 휘파람 불며 전진하던 통쾌한 비리척결 복수극은 절정에서 뚝 끊긴다. 단절. 주인공은 갑자기 어디로 사라졌는지 없고 그가 몰고 갔던 자동차가 길 위에 널브러진 참혹한 잔해로 스쳐 지나간다. 남편과 아버지를 찾아온 요시코와 그녀의 오빠 앞에서 니시의 동료는 울부짖는다. “우리는 실패했다! 우리는 너희를 결코 이길 수가 없었다!” 나는 영화를 보다가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 6년 전의 극장에서, 관객의 “헉!” 소리를 들었다.
조직의 비리가 밝혀질 뻔했던 일련의 사태를 완벽히 진압하는데 성공한 이와부치 부회장은 언론 앞에서 뻔뻔한 기자회견을 마치고 자신의 거대한 집무실로 돌아온다. 그의 유일한 가족인 아들과 딸 요시코는 ‘우리는 당신 같은 자와 살 수 없다’는 말을 남기고 떠난다. 자식들을 붙잡으려던 이와부치는 그 대신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를 받는다. 이와부치는 부회장이었으니까 전화 저편의 권력자는 회장이거나 혹은 그보다 더 높은 곳에서 지시를 내리는 자일 것이다. 그러니까 진짜 ‘실세’다. 괴물 뒤에는 언제나 더 거대한 괴물이 있다. 이와부치가 전화를 받는 모습은 예의 높은 사람의 전화를 받는 우리의 부모들이나 직장 상사들의 모습과 똑같다. “예, 예, 그렇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부 잘 해결되었습니다. 그동안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그럼 안녕히 주무십시오… 아! 지금 오전이지요. 제가 철야를 한 나머지 착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럼 전화 끊겠습니다. 안녕히….” 관객의 눈앞에 연신 굽실거리는 악인은 날밤을 새웠지만, 거대한 권력과 그를 지탱하는 철저한 구조 속 미지의 악인은 간밤에 편히 잘 잤다.
제일 나쁜 놈은 병든 조직
영화에는 이런 대사도 나온다. “공무원은 사람이 아니라고! 놈들은 상사와 조직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는 종자들이야!” 생전 공무원과 행정을 싫어했던 구로사와는 그의 영화에서 관료주의에 대한 비판을 숨긴 적이 없다. 그가 이상적이라고 믿은 상하 주종 관계는 오히려 봉건적인, <호랑이 꼬리를 밟은 사나이들>(1945)에 나오는 주군과 무사의 모습이다. 아군과 적군마저 예의를 다하는 세계에서 적진을 넘기 위해 승려로 변장한 무사는 짐꾼으로 위장한 주군을 몽둥이로 두들겨팬다. 위기를 넘긴 무사가 주군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자, 주군 역시 무릎을 꿇으며 그를 일으켜 세운다. 적장이 보내온 술로 한바탕 술판을 벌이며 영화 내내 냉정하고 침착했던 무사는 칼을 놓고 말술을 들이켜더니 노래까지 부른다. 맞아, 뮤지컬영화였다.
관료주의는 민주주의와 함께 국가나 조직 같은 거대한 무언가를 어쨌든 굴러가게 만드는, 인류의 인기 발명품 중 하나다. 나 역시 조직과 구조 안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다. 상사에게 기안을 올리고 결재를 받아 뭔가 일이 진행되게 만드는 과정은 분명히 쾌감을 준다. 상사에 대한 충성심이 주군에 대한 무사의 도리처럼 느껴져 뭔가 근사해 보일 때도 있다. 상하관계에서는 상사에 대한 부하의 인간적인 존경이 업무에 대한 열정으로 이어져 이상한 시너지 효과를 낸다. 한번 만나본 적도 없이 그 존재와 지위만 아는 높은 사람의 전화를 받았을 뿐인데 전화기를 붙들고 온몸을 덜덜 떨어본 적도 있다. 권위와 공포는 인간을 매혹시켜 자발적인 노예로 만든다. 과거 파시즘과 나치즘은 조직과 행정을 통해 빛을 발했다. 더러운 일이지만 상관을 위해, ‘조국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다. 구로사와의 가장 어두운 비전인 <나쁜 놈일수록 잘 잔다>는 조직과 행정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이 권력의 지속을 위해 존재하는 한 언제나 유효한 텍스트다. 구로사와는 이 통렬한 비판을 위해 철저하게 실패하는 결말을 만들고 뚝심 있게 밀어붙였다. 그 절망의 외침은 50년이 넘은 지금의 현실에도 제대로 먹힌다.
언제나 정말로 두려운 것은 권력자가 아니라, 그 권력을 구조로서 지탱해주는 조직과 행정이다. 오직 위를 향한 충성으로 아래는 밟아도 결코 위로는 항명하지 않는 조직은 병든 조직이다. 그런 조직에서는 청렴과 창의가 절대로 공존할 수 없다. 나는 항상 맨 위에 있는 한 사람보다 그를 떠받치고 있는 자들, 이러한 구조를 통해 뭔가를 계산하고 이익을 얻는 미지의 배후자들이 두려웠고, 걱정은 작금의 현실이 되어 진행 중이다. 너무 격이 낮아서 악당 축에도 못 낄 비선 실세와 인간적 내면이 언제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겠는 허수아비 왕보다 그 밑의 충신들이 진정한 악당이다. 이 황당한 세계를 걱정해봤자 분명 잘 안 될 거다. 그렇지만, 광장에는 나가야지. 나쁜 놈들도 잠이 안 와서 내내 끙끙거리는 소리를 듣고 싶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