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니체는 병에 시달렸다. 결국 스위스 바젤대학의 교수직도 35살 때 그만뒀다. 불과 25살 때 임용돼, 학계의 비상한 주목을 받았던 자리였는데, 병이 강단 경력을 중지시킨 셈이다. 이후 니체는 건강을 돌보기 위해 맑은 공기를 찾아 여름이면 스위스 알프스의 실스마리아로, 그리고 겨울이면 따뜻한 지중해 연안의 니스, 제노바 등으로 옮겨가며 집필 생활을 이어갔다. 그런데 이때, 곧 건강을 걱정하며 떠돌 때, 니체는 필생의 역작들을 써냈다. 니체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되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는 제노바의 바닷가와 실스마리아의 숲에서 잉태됐다. 니체가 매일 제노바와 그 주변의 해변을 미친 듯 하루 종일 걸은 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1부를 불과 10일 만에 써낸 것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알프스와 지중해 도시를 떠도는 방랑 생활과 저술 활동은 서로 비례하며 상승곡선을 그렸다. 그런데 이런 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일이 발생했으니, 바로 그 유명한 ‘토리노의 말’ 사건이다. 이탈리아 북부의 산업도시 토리노에서 니체는 사실상 철학자로서의 죽음을 맞이했다.
미친 철학자 니체, ‘토리노의 말’
카를로 알베르토 거리 6번지(via Carlo Alberto 6). 이곳이 니체의 주소다. 토리노 시내의 한복판이고, 카를로 알베르토 광장을 끼고 있는 곳이다(카를로 알베르토는 이탈리아 통일 왕조인 사보이 왕가의 19세기 초 왕이다). 1889년 1월3일 프리드리히 니체는 토리노에 있는 하숙집 주변에서 산책을 했다. 그런데 광장에서 이륜마차를 끌던 한 마부가 채찍으로 말을 심하게 때리고 있는 것을 봤다. 니체는 갑자기 그곳으로 달려가 마부의 채찍질을 말리고, 말의 목을 끌어안고 울었다. 그러고는 쓰러졌는데, 이후 사실상 미친 상태로 10여년을 살다 죽고 말았다. ‘초인’을 주장하고, 약자에 대한 동정심과 연민을 싸구려 감정으로 질타하던 ‘사자’ 같은 철학자가 매 맞고 있던 말을 (아마도)동정하여 미쳐버렸으니, 이런 아이로니컬한 사건도 없었다.
수많은 전공자들이 니체의 죽음에 대해 설명했다. 채찍에 맞는 말은 수난을 당하는 예수의 은유라느니, 혹은 예수와 대적하여 자신을 ‘안티크리스트’로 여긴 니체 자신의 은유라느니, 많은 말들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날 이전에 이미 광기의 조짐을 보인 남자의 행동을 논리적으로 설명한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더 혼란스런 미궁으로 빠지는 행위일 테다. 니체의 학자로서의 삶은 이탈리아의 토리노에서 끝나고 말았다. 이후 10여년간은 독일의 고향 나움부르크에서 정신을 잃은 상태로, ‘미친 천재’를 보러오는 방문객들 앞에 사실상 ‘전시’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토리노의 말’ 사건 이후 니체는 더 유명해졌고, 여동생이 오빠의 유명세를 잘 이용했다. 말하자면 토리노는 니체가 제정신으로 철학에 매진하던 마지막 도시였다. 이곳에 머물며 그는 말년의 걸작들, 곧 <안티크리스트>(1888)와 <이 사람을 보라>(1888) 등을 썼다. 그래서인지 토리노의 하숙집은 지금도 니체의 팬들에겐 필수 방문지다. 토리노시는 1944년 니체 탄생 100주년을 맞아 건물의 벽에 이곳에 니체가 살았다는 사실을 기록한 기념석을 새겨놓았다.
토리노에서 니체는 1년도 채 안 살았다. 하지만 불같은 열정으로 집필 활동을 이어갔다. 그때 니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을까? 자신의 광기와 죽음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까? 브라질의 지적인 감독인 줄리우 브레사네(Júlio Bressane)는 당시에 집필된 니체의 책들,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바탕으로, 토리노에서의 니체의 마지막 날들을 그렸다. <토리노에서의 니체의 나날들>(2001)이 바로 그 작품인데,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니체가 한때 그렇게도 좋아했던 리하르트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음악을 배경으로, 토리노의 하숙집으로 철학자가 막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에 따르면 니체는 건강을 상당히 잃었다. 니체는 곧 쓰러질 듯 다리를 끌며 토리노에 도착했다.
니체는 바젤대학의 동료교수이자 유명 미술사학가인 야곱 부르크하르트에게 편지를 쓰며 토리노의 인상을 털어놓는다. 니체에게 토리노는 ‘품위 있는 귀족의 도시’이고 맑은 공기, 아름다운 풍경, 밤의 아름다움까지 간직한 놀라운 곳이었다. 말하자면 도시와 니체의 궁합이 잘 맞았다. 편지에서 니체는 ‘이곳에 와서 아주 기쁘다’라고 밝힌다.
<토리노에서의 니체의 나날들>은 일종의 전기영화다. 니체의 글을 기초로 하여, 그의 삶을 반추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어서다. 대사는 전혀 없고 니체가 자신의 글을 읽는, 또는 들려주는 내레이션만으로 영화는 진행되는데, 이때 인용되는 작품들은 대부분 니체 자신을 설명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를테면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이미 왕의 아내가 된 ‘임자 있는 여인’ 이졸데를 사랑하는 왕의 조카 트리스탄의 비극적 이야기인데, 니체는 자신을 트리스탄으로, 그리고 열렬히 사랑했던 바그너의 아내 코지마를 이졸데의 위치에 놓고 있는 식이다. 트리스탄이 죽는 순간에도 이졸데에 대한 변치 않는 사랑을 약속했듯, 죽음이 다가오는 토리노의 하숙방에서 니체는 코지마의 이름을 반복하여 부르는 것이다.
이것뿐 아니다. 니체는 걸작이라고 찬양했던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을 보며, 남자들을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는 카르멘의 모습에서 자신을 냉정하게 버리고 떠났던 루 살로메를 그리워하고, 그리스 고전 <오이디푸스 왕>에서는 자신을 살부(殺父)의 주인공 오이디푸스와 동일시하고, 셰익스피어의 <오셀로>에서는 아내를 의심하는 장군의 모습에서 살로메를 의심했던 자신을 기억하는 식이다. 결국 니체가 인용하는 작품과 캐릭터는 니체 자신의 비극적 운명과 연결돼 있는 셈이다. 어쩌면 가장 처절한 장면은 니체가 미쳐 쓰러진 뒤, 하숙방에서 나체로 혼자 춤을 추거나 소리를 지르는 순간일 테다. 그럴 때면 니체는 자신을 ‘토리노의 시저’라고 부른다. 로마의 영웅 시저가 니체의 영웅이었던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니체는 역사적 인물 가운데 시저, 알렉산더 대왕, 나폴레옹을 자주 거론하며 ‘초인’의 힘을 묘사했다. 특히 1821년에 죽은 나폴레옹은 니체(1844년생)에게 가장 실감나는 영웅일 것이다. 토리노에서 쓴 자서전, 혹은 유서 같은 저작 <이 사람을 보라>에선 니체의 나폴레옹에 대한 사랑이, 또는 그와의 동일 시가 종종 발견된다.
<선악의 저편>, 살로메와의 비극적 사랑
철학에는 천재였지만 사랑에는 미숙했던 니체는 평생 두 여성을 사랑했는데 한명은 코지마이고, 아마도 더 유명한 또 다른 한명은 러시아 출신의 학자 루 살로메일 테다. 니체의 친구이자 대학 후배인 파울 레가 소개한 여성인데, 문제는 두 남자 모두 살로메를 사랑했던 점이다. 두 남자는 젊은 학자들답게 당돌한 살로메의 제안에 따라 두 남자와 한 여자가 함께 동거하는 ‘실험’에 동의했다. 니체의 모교가 있는 독일의 라이프치히에서 동거가 시작됐고, 니체는 내심 사랑의 승리를 확신했다. 그때 이들은 그 유명한 사진을 찍는다. 살로메는 채찍을 들고 있고, 두 남자는 ‘토리노의 말’처럼 마차를 끄는 모습이다. 그런데 동거 한달쯤 지난 뒤, 파울 레와 살로메가 동시에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미련하게도 니체는 그게 뭘 의미하는지 몰랐다. 두 사람이 베를린으로 사랑의 도피를 감행한 사실은 며칠이 지나서야 알았다.
이탈리아의 여걸 릴리아나 카바니 감독이 만든 <선악의 저편>(1977)은 이들 세명의 삼각관계를 그린 멜로드라마다. 라이프치히에서 세 사람이 공동생활을 하던 1882년 10월이 강조돼 있다. 그 앞뒤로 로마에서의 만남, 베를린으로의 줄행랑, 그리고 토리노에 혼자 남은 니체의 비참한 생활 등이 이어진다. 잉마르 베리만의 배우로 유명한 엘란드 요셉슨이 혼이 나간 니체의 연기를 얼마나 실감나게 하는지, 니체의 비극을 다룬 영화가 어이없는 부조리극처럼 종종 헛웃음을 짓게 한다. 배신과 버림받음의 고통 속에서 니체는 아편에 의지하고, 영화는 결국 그 사랑의 상처가 니체 광기의 중요한 원인인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도 니체는 토리노의 카를로 알베르토 광장에서, 말의 목을 끌어안고 울다가 미쳐버린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니체처럼 과감한’ 릴리아나 카바니(논란 많았던 <비엔나 호텔의 야간배달부> 감독)가 니체뿐 아니라 파울레까지 모두 동성애자로 묘사하는 사실이다. 남성 동성애를 표현하는 두 발레리노의 이중무(二重舞) 시퀀스는 <선악의 저편>의 가장 뛰어난 장면으로 남아 있는데, 이는 카바니가 갖고 있던 무대공연, 특히 오페라 연출가로서의 역량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니체의 동성애성은 소수 학자들에 의해 이미 제기된 바 있다. 여기선 특히 두 남녀가 줄행랑을 친 뒤, 그 상처에 의해 촉발된 자기 학대처럼 동성애를 표현하고 있다. 니체는 부끄러워서라도 라이프치히에 머물 수 없고, 그길로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로 가서 ‘수려한 남자들’과 어울린다.
벨라 타르와 니체의 니힐리즘
벨라 타르의 마지막 장편인 <토리노의 말>(2011)은 카를로 알베르토 광장의 그 사건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그런데 카메라의 초점은 미쳐버린 니체가 아니라, 채찍으로 맞던 그 말에 맞춰져 있다. 니체는 미쳐 누웠고, 그러면 채찍에 맞던 말은 어떻게 됐을까? 이런 질문과 함께 화면은 시골길에서 힘들게 마차를 끄는 늙은 말을 보여준다. 영화는 벨라 타르의 조국인 헝가리의 부다페스트 근처에서 촬영됐다. 하지만 텍스트의 논리대로라면 영화의 도입부는 19세기 말 토리노의 근교라고 봐야 할 것이다.
니체의 ‘말씀’(니체는 ‘안티크리스트’로서 자신을 예수와, 그리고 자신의 말을 복음과 견주었다) 가운데 가장 수용하기 어려운 부분이 ‘약자’에 대한 공격일 테다. 그 약자에 대한 공격이 지나칠때면, 니체에게 기독교는 동정심에 근거한 ‘무리한’ 평등주의의 선동이고, 이와 마찬가지로 법 앞에 만인의 평등을 설파하는 민주주의도 인류의 나태와 타락을 부추기는 선동이란 것이다. 말년에 토리노에서 쓴 <안티크리스트>에선 이런 위험한 발언이 어안이 벙벙할 정도로 넘쳐난다. 니체의 책에서 모티브를 따왔고, 발표 당시 논란을 몰고 온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안티크라이스트>(2009)는 책에 비하면 순진한 수준이다. 숨길 수 없는 사실이자 불편한 사실인데, 니체는 민주주의를 반대한 귀족주의자이고, 귀족의 고귀한 정신과 순결한 피를 믿고 찬양했다(나치들이 니체를 추앙한 첫째 이유가 아마 이것일 것). 그는 말년에 자신이 ‘폴란드 귀족의 후예’라고 떠들고 다녔다.
벨라 타르가 <토리노의 말>을 만든 것은 니체의 ‘말’(言)에 찬성해서일 것 같지는 않다. 혈기방장한 니체가 보면 분명 ‘약자’라고 공격할 늙은 부친과 딸에 대한 연민을 자극하고 있어서다. 제목을 <토리노의 말>이라 해놓고, 니체의 존재를 거의 지운 것 자체가 니체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이다. <토리노의 말>은 말에게 채찍질을 할 수밖에 없었던 가난하고 늙은 마부와 딸, 그리고 그 말의 이야기다. 그날의 사건 이후 일주일 동안, 이들이 어떻게 소멸 해가는지의 과정이 벨라 타르 특유의 롱테이크와 세밀한 묘사로 전개된다. 처음엔 말이 더이상 먹이를 먹지 않고, 우물에 물이 마르고, 사람들도 더이상 먹지를 못하고, 최종적으로는 오두막집에 모든 불이 꺼지는 결말이다. 사실상의 세상의 종말, 파국인 것이다. <토리노의 말>은 사람들이 나빠지고, 세상이 나빠지고, 그래서 결국 종말로 치닫는 니힐리즘의 정석처럼 진행된다.
‘잘난 니체’보다 사회에서 밀려난 마부와 그 딸의 편을 드는 것이 벨라 타르의 평소의 태도일 것이다(그는 세계화, 신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비판한다). 마부의 이웃이 나타나, ‘잘난’ 사람들은 과거보다 더욱더 나빠졌고, 거의 모든 나쁜 부(富)를 독점하고, 그래서 세상에 종말이 올 것이라고 마치 니체처럼 포효하듯 말하는데, 이는 니체의 귀족주의를 혐오하는 필부의 웅변으로 봐도 될 것 같다. 흥미로운 것은, 벨라 타르는 니체의 귀족주의를 에 둘러 비판하며 세상의 종말이 임박했음을 예시했는데, 귀족주의를 주장하던 니체도 사실은 세상의 종말을 예언하던 비관주의자였던 점이다. 논란이 많은 주장이지만, 역설적이게도 파국을 극복하기 위해 니체는 ‘고귀한 정신’의 귀족주의가 도래하기를 바랐다.
토리노, 통일 이탈리아의 첫 수도이자 왕도
토리노는 통일 이탈리아의 첫 수도였다. 곧 통일을 이끈 사보이 왕가의 왕도다. 지금도 사보이 왕가에 관련된 건물들, 곧 ‘왕궁’(Palazzo Reale), ‘카리냐노 궁전’(Palazzo Carignano) 등은 전부 유명 관광지이자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에 등록된 유적지다.
왕도여서인지, 이탈리아 최고급 포도주인 소위 ‘3B’, 곧 바롤로(Barolo), 바르바레스코(Barbaresco), 바르베라(Barbera) 등이 모두 이곳 토리노 주변에서 생산된다. 메디치 가문과 관련된 피렌체 주변의 키안티 포도주가 귀족의 포도주라면, ‘3B’는 왕족의 포도주인 셈이다. 포도밭이 많아서인지 토리노 주변은 야트막한 언덕들이 쉽게 눈에 띄는데 이곳의 풍경이 절경이고, 그래서 영화의 촬영지로도 자주 등장한다. 이를테면 킹 비더의 대서사극 <전쟁과 평화>(1956)는 나폴레옹의 프랑스군과 러시아군의 전투 장면을 이곳 토리노 근처에서 찍었다. 들판에서 양쪽의 대군이 대오를 갖춰 전투 준비를 하는 장면도 장관이지만, 너무나 아름다운 전장의 들판은 전쟁의 허무함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 풍경이라면 모든 무기를 손에서 내려놓고 싶을 정도로 자연은 숭고한 자태를 뽐낸다.
토리노의 귀족문화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통일을 이끈 왕도로서의 역사적 자부심, (출판)문화의 중심지로서의 자부심, 그리고 이탈리아 산업의 견인차로서의 자부심 등이 배어 있다. 이탈리아 출판의 명예인 ‘에이나우디’(Einaudi), 이탈리아 자동차 산업의 본산인 피아트가 토리노에 있다. 토리노는 뭐든 최고이고, 최고여야 한다는 생각들이 이들 시민들에게서 느껴진다. 최고로서의 자부심을 대중적인 면에서 찾자면 유벤투스 축구팀이 떠오른다. 최대 우승 기록 같은 성적보다는, 유벤투스가 내세우는 ‘협력과 희생’의 이미지가 아마 이 팀을 이탈리아에서 가장 사랑받는 축구클럽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알다시피 그런 미덕은 이탈리아의 다른 팀에선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토리노인의 귀족문화를 풍자의 대상으로 삼은 대표적인 코미디가 디노 리지 감독의 <여인의 향기>(1974)이다. ‘초인’을 흉내내는 ‘마초맨’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전역한 파우스토 대위(비토리오 가스만)는 군대에서의 폭발사고로 장님이 됐다. 그는 최고의 군인이 되고자 했고, 지금도 남성적인 군대식 예절을 최고로 여긴다. 그런데 앞을 보지 못하는 처지가 되자, 그는 삶의 의욕을 잃었고 비밀리에 자살 계획을 세운다. 파우스토는 차라리 죽는 게 자신의 명예를 지키는 것이라고 여긴다. 세속화된 혹은 얼치기 니체 숭상주의자를 상상하면 파우스토의 모습이 그려질 것이다. 파우스토는 어린 신병의 도움을 받아, 토리노에서 나폴리까지 여행길에 오른다. 그곳엔 함께 죽기로 합의한 전우가 살고 있다. 그도 사고로 눈을 잃었다. 파우스토는 언제나 얼굴을 빳빳하게 들고 있으며, 주위의 동정을 느낄 때면 불같이 화를 낸다. 그에게 가장 큰 모욕은 다른 사람이 도움을 주거나 동정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허세와 자기기만으로 가득 찬 이 퇴역장교가 나폴리의 바닷가에서 처음엔 동정을 받았다고 느꼈던 모욕을 사랑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삶의 전환점을 맞이하는 결말이다. 당시 이탈리아 영화계의 스타였던 비토리오 가스만이 마치 자신이 나폴레옹이나 된 듯 온갖 허세를 떠는 연기로 강한 인상을 남겼는데, 그는 이 영화로 칸국제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이 영화를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한 작품이 알 파치노 주연의 <여인의 향기>(1992)이다. 파치노도 이 영화에서의 연기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두 영화 모두에서 귀족적 허세, 또는 귀족적 품위가 남성의 매력으로 제시됐다.
왕도 토리노는 귀족의 도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노동자의 도시이기도 하다. 이탈리아공산당의 창건자 안토니오 그람시의 활동 거점이 바로 토리노였다. 토리노는 니체의 도시이자 동시에 그람시의 도시인 것이다. 다음엔 그람시의 도시 토리노로 가겠다. 마리오 모니첼리의 <동지들>(1963) 같은 코미디가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