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김소희의 영화비평]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와 앨리스 먼로의 소설이 여성들간의 관계를 말하는 법
2016-11-29
글 : 김소희 (영화평론가)

페미니즘 영화를 만든 남성감독을 꼽는다면 내겐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이름이 먼저 떠오른다. 이를 설명하는 데는 한편의 영화로 충분하다. 알모도바르의 <내 어머니의 모든 것>(1999)은 조셉 L. 맹키위츠의 <이브의 모든 것>(1950)의 여성 관계에 대한 전복을 시도하는 담대한 작품이다. <이브의 모든 것>에서 스타 자리를 놓고 벌어진 쇠락해가는 배우 마고(베티 데이비스)와 그녀의 팬이었던 젊은 이브(앤 박스터)의 암투는 <내 어머니의 모든 것>에서 각자의 자리를 침범하지 않은 채 지속 가능한 관계들로 변모한다. 아들의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에서 시작하지만 영화는 단지 모성에만 매여 있지 않고 다양한 이들간의 관계를 향해 나아간다. 알모도바르 영화를 페미니즘 영화라 확신하게 된 이유도 그가 여성, 어머니의 이야기를 주로 다룬다는 주제적 측면보다는 그가 여성들의 관계, 여성간의 연대기를 능히 다루기 때문이다.

한 인물 두 배우

알모도바르 영화가 부재한 대상과 그것을 채우는 관계를 그려왔음을 염두에 둘 때, 영성수련을 떠난 18살 딸 안티아가 어떤 말도 남기지 않은 채 잠적해버린 뒤의 어머니의 삶을 그린 <줄리에타> 역시 크게는 알모도바르의 영화세계에 부합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몇 가지 이상한 점이 있고, 이것이 곧 알모도바르 영화의 변화로 인식되는 것 같다. <줄리에타>는 안티아가 사라지고 12년이 흐른 뒤의 시점에서 시작한다. 기존의 알모도바르 영화의 여인들이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다른 여성들과 끈끈한 관계를 맺었던 것과는 반대로, 줄리에타(에마 수아레스)는 딸의 소꿉친구 베아를 통해 안티아의 소식을 우연히 접한 뒤, 연인 로렌조(다리오 그란디네티)를 비롯한 모든 관계를 폐쇄하고 내부로의 침잠을 선택한다. 그 후 줄리에타는 오로지 자신의 기억을 꺼내보는 일에만 골몰한다. 이런 선택으로 인해 그녀는 알모도바르의 여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연약하고 소극적인 여성성을 지닌 것으로 인식되는 것 같다. 물론 나는 이와는 조금 다른 견해를 갖고 있는데 이에 관해서는 다시 이야기하겠다.

또 다른 변화는 기억이나 사건의 강렬도에 관한 것이다. 알모도바르의 영화는 대부분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구성을 취하고 있으며, 둘을 오가는 가운데 점차 드러나는 사건은 반전에 가까운 강렬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그에 비해 <줄리에타>의 이야기는 다소 밋밋하기까지 하다. 핵심적인 사건은 남편 소안(다니엘 그라오)이 바닷일을 하던 중 거센 폭우에 휘말려 익사한 것이다. 소안이 실종된 날 오전에 줄리에타와 자신과 아바의 외도 문제로 다퉜던 점, 딸 안티아는 캠프로 집을 비운 사이였다는 점이 사건의 변수로 인식되며 인물들에게 죄책감을 안긴다. 그런데 이러한 사건으로 인한 감정은 <귀향>(2006)에서 의붓아버지를 살해하거나, 딸을 강간한 남편과 그의 정부를 살해한 사연에 비하면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은, 의아하기까지 한 고통이다.

이를 알모도바르의 변화라고 성급히 선언하기 전에 아직 말하지 않은 이상한 점 한 가지를 더 짚고 싶다. 줄리에타가 자신의 기억을 꺼내는 과정에서 우리는 또 다른 줄리에타(아드리아나 우가르테)를 보게 된다. 한 인물을 두 배우가 번갈아 맡는 것은 알모도바르의 세계에서 드문 일이다. <내가 사는 피부>(2011)에서 비센테와 베라처럼 성전환수술과 성형으로 외모가 바뀌게 된 경우를 제외하고 말이다. 물론 줄리에타를 맡은 배우에게 30년에 걸친 시간을 연기할 것이 요구되고, 이 시간을 한 가지 얼굴로 연기하는 것은 무리가 있으므로 배역의 분화는 필연적이기도 하다. 주목하고 싶은 건 두명의 줄리에타가 필요했던 이유보다는 이로 인해 발생한 효과다. 줄리에타의 분화는 칩거하며 자신의 기억과 씨름하는 줄리에타의 행위에 이상한 기운을 불어넣는다. 두 줄리에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에 기억하는 그녀의 행위는 마치 기억 속의 나와 새로운 관계 맺기처럼 보인다. 회상 장면 사이로 인서트되는 현재의 줄리에타는 마치 자신과 자신의 주변 인물을 활용해 새로운 인물을 창조하는 소설가처럼 보이기도 한다.

<줄리에타>가 알모도바르의 작품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모성이 약화된 것처럼 보이는 이유 역시 2인1역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은, 약화된 것은 어머니가 아니라 모성이라는 점이다. 이런 경향은 줄리에타와 함께 안티아 역시 (갓난아이 때를 제외하고) 두 배우가 나누어 맡는 것으로 강화된다. 두번째 안티아는 영성수련을 떠나기 직전에만 잠깐 등장할 뿐이다. 줄리에타와 안티아의 분화는 관객이 모녀 관계에 몰입할 근거를 빼앗는다. 영성수련을 떠나는 십대 후반의 안티아와 에마 수아레스가 연기한 줄리에타 사이에는 어딘가 어색한 기류가 흐른다. 결과적으로 분화된 인물은 과거와 현재 인물간의 연속성을 의도적으로 끊는 기능을 하며, 관객이 인물에게 동일시하며 느낄 연속적인 감정 역시 어느 정도 차단한다.

알려진 대로 <줄리에타> 원작은 앨리스 먼로의 단편집 <떠남>(원제 ‘Runaway’)에 나란히 실린 세편의 단편, <우연> <머지않아> <침묵>이다. 따로 떨어진 이야기인 동시에 주인공 줄리엣을 비롯한 등장인물이 겹치며 등장하는 연속된 이야기이기도 하다. 알모도바르는 이 소설의 흐름을 뒤집어 <침묵>에서 시작해 <우연>과 <머지않아>의 세계로 들어간 뒤 다시 <침묵>으로 빠져나오는 구성을 취한다. 알모도바르는 <우연>과 <머지않아>의 이야기를 현재가 아닌 기억 속에서 보여주기로 한 것이다. 예전보다 사건의 파급력이 약해진 자리에서 곰곰이 더듬게 되는 것은 기억하는 행위, 그 자체다. 이때 기억하는 행위는 주인공이 느끼는 죄책감이라는 보이지 않는 감정과 조응한다.

과거의 나와 대면하기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시퀀스는 첫 번째 회상 신인 기차 장면이다. 특히 달리는 차창 밖에서 기차를 똑바로 응시한 채 같은 방향으로 수사슴이 달려오는 슬로모션 장면은 시퀀스 전체에 미스터리한 기운을 불어넣는다. 원작의 늑대를 수사슴으로 바꾼 것은 짐작건대 사슴의 뿔 때문인 것 같다. 사슴뿔은 초반 줄리에타가 앉은 차창을 때리고 지나간 불길한 나뭇가지를 연상시킨다. 돌이 켜볼 때 이것은 누군가의 죽음을 예고한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누군가 기차에 치인 사건이 벌어진 뒤 줄리에타는 기차에서 만난 또 다른 남자 소안에게 가장 먼저 ‘사슴이에요?’라고 물은 뒤, 이어 ‘그 사람(줄리에타가 대화를 거절한 기차 맞은편의 남자)이에요?’라고 묻는다. 두 질문에서 느껴지는 근심은 비슷하며 서로 다르지 않다. 이윽고 남자가 앉았던 자리에 소안이 앉으면서 소안이 모종의 공동 운명체 속으로 들어온다. 소설 속에서 죄책감에 대한 논쟁이 벌어진 자리에 알모도바르는 소설에는 없던 줄리에타와 소안의 섹스 신을 삽입한다. 이 행위는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날 딸 안티아를 연상시키므로 기차는 모든 인물과 사건, 감정이 배태되는 최초이자 결정적인 공간이 된다.

달리던 사슴과 자살한 남자, 남편 소안과 딸 안티아, 그리고 과거의 줄리에타 자신까지 누구 하나 중하고 덜함 없이 줄리에타의 기억 속에서 평등하게 뒤섞인다. 이것은 알모도바르 영화 사상 가장 내밀한 방식의 연대다. 연대는 기억하는 행위를 통해, 오직 기억을 통해서만 지속되는 죄의식의 공유, 그리고 과거의 나와의 대면이다. 이것이 알모도바르 영화의 가장 중요한 변화라고 여겨진다. 이런 변화의 의미를 판단하기는 아직 이르다. 그럼에도 알모도바르의 세계에 출현한 세심한 자아분열적 결합과 어쩌면 이것이 불러올지도 모를 앞으로의 변화를 섣불리 긍정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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