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1971년 아니면 72년쯤이었을 것이다. 당시 다섯살 남짓했던 소년은 부모와의 오랜만의 외출이 마냥 즐겁기만 했다. 부모는 아이를 데리고 극장에 들어갔고 아이는 뭔가 재미있는 영화겠거니 생각하며 텅 빈 극장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웬 걸, 그날 보게 된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라는 영화는 데이브라는 심야 라디오 DJ가 이블린이란 여자와 놀아나다 잘못 걸려들어 끈질긴 스토킹을 당한다는 매우 비교육적이며 무시무시한 내용이었다. 무서운 장면이 나올 듯싶을 때마다 꼬마는 어머니의 등 뒤로 고개를 파묻고 “무서운 장면 끝났어?”라고 물어보며 어서 영화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한숨을 돌리고 있는 데이브에게 또다시 칼을 들고 방 한구석에서 나타난 이블린의 광기 어린 눈빛, 그리고 언덕 위의 하얀집의 원경과 스토커의 최후로 이어지는 마지막 장면으로 영화는 끝났다. 너무나 오랜 시간 긴장을 했는지 극장을 나와 먹던 불고기도 별로 내키지 않았고, 속만 울렁거릴 뿐이었다.
이후 소년은 그 끔찍했던 영화관람 사건을 잊고 싶었지만, 밤에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또 추억의 명화랍시고 텔레비전에서 재탕 삼탕을 할 때마다 찝찝한 기억이 의식 표면으로 솟아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한 여학생을 좋아하게 되었지만 왠지 가슴이 두근거리고 울렁거려서 ‘보기만 하면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그 애도 나를 좋아한다는 소문에 기쁘기는커녕, 이상하게 피하게 되었고 결국 그녀의 눈물을 보고 말았다. 대학 1학년 때에는 미팅에서 만난 친구가 처음 만난 날 생맥주 3천㏄를 마시며 내게 친하게 지내자고 했을 때 나는 왠지 모를 두려운 긴장감이 들면서 그녀를 멀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십수년이 지나 소년은 데이브를 괴롭히던 이블린과 같은 ‘경계성 인격장애 환자’를 치료하는 정신과의사가 된 뒤 이런저런 잡다한 문화계의 ‘경계’에서 얼쩡거리고 있다.
그 소년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다. 아마 그 전에도 극장에 간 일은 있었겠지만 최소한 내 기억 속에서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는 ‘내 인생의 첫 영화’라 할 수 있다.
아이의 정서교육보다 자신들의 영화 욕구충족이 먼저였던(!) 부모 덕분에 미성년자의 신분으로 본 그 영화는 생각보다 광범위한 임팩트를 줬다. 당시 백지장 같던 어린 내 머릿속에 각인된 첫 영화의 잔상은 내 발달과정에 산탄총알이 박히듯 여기저기 많은 영향을 끼쳤음이 분명하다. 첫키스, 첫경험이 중요하듯이 첫 영화 경험은 내 인생에 어떤 작용을 했을까? 돌이켜보니 내가 정신과의사가 된 이유가 결국 그때의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을 치료자가 되는 것으로 극복해보겠다는 몸부림의 소산일 뿐이었다. 또 왜 어릴 때 이성관계에 서툴렀는지, 왜 공포영화를 보는 것을 싫어하는지 등의 난삽한 의문들이 이 영화를 기준으로 일렬종대로 늘어서며 한꺼번에 풀려버렸다.
아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기껏 영화일 뿐인데 이렇게 내 인생을 규정하고 있다니. 또 영화적 선호도로 보면 형편없는 그렇고 그런 이 영화가 왜 하필 ‘내 인생의 영화’라는 제목의 글을 쓰려는 이 시점에 내 의식선상에 떠오른 것인가. 지금도 뭔가 앙금이 남아 있는 걸까? 고백컨대 이 글을 쓰면서 위에 묘사한 영화 속의 장면이 실제로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비디오를 빌려보는 수고를 하지 않았다. 아니, 하고 싶지 않았다. 내 기억 속의 그 장면들이 내게 중요한 것이니까(웃기지 마, 역시 뭔가 남아 있는 게 분명해).
끝으로 내 딸의 첫 영화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였다. 그 행위가 내 딸을 환경론자로 만들려는 의도에서 한 일은 절대 아님을 밝힌다.